밤11시. 달덩이같은 허기가 돋는 시간.
늦은 귀가에 이어, 뭐 줏어먹을게 없나 주방을 기웃대다가
식탁위에 덩그렁 놓여있는 밥그릇을 본다.
"아까 내가 비빔국수할때 삶아놨는데, 너 주려고 남겨놨지요."
뚜껑 덮은 밥그릇 안에 매끈하게 깐 달걀 하나가 조신스레 들어 앉았다. 통통한 볼따구니 같은 것이 이 남자의 것과 퍽 닮아서 웃음이 샌다.
냉장고에서 조개젓무침에 오이김치를 꺼내 찬밥을 수줍게 곁들인다. 덧거리가 많아진 느낌인데, 아무렴 어떤가.
식탐은 있고 시간은 없다고 했다.
"비빔국수 드럽게 맛없어서 체한것 같아."
식탁에 따라 앉은 조신한 볼때기남이 오늘 해먹은 비빔국수 후기를 풀어놓는다.
"어제 티비에서 임성근 한식조리기능장이 알려준대로, 국수 삶아서 찬물에 씻고 참기름 약간 해서 무쳤거든?"
"많이 넣어서 느끼한 거 아냐?" 하고 물으니,
"요만큼 넣었어." 라며 새끼손가락 반마디를 가리켰다.
"간장 한 큰술 고추장 한 큰술, 양념 따로 넣길래"
"아니, 왜 따로 넣지?" 하고 또 물으니,
"몰라, 따로 넣는데 넣을수록 떡이 되는거야. 막판에 급해서 다 때려 부었다."
완성한 비빔국수는 폭삭 망했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나니 급하게 먹어서, 많이 먹어서가 아니라 맛없게 먹어서 체했다는 희한한 말도 수긍할뻔 했다. 체했으니까 아이스크림 먹어야 겠다는 말만 안했다면.
귀납법인지 연역법인지 문맥이 없는 이 구역의 논리왕. 이 남자를 연구한지 8년차지만 아직 배움의 길이 먼 듯 하다.
"아이, 뭐야. 구구콘하나 먹을까 했더니...내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냉동실 문을 열고 실의에 빠진 자네에게 미안하지만, 너는 평소 구구콘을 소중히 하지 않았지. 있을 때 잘하라는 인생의 진리를 잊지말게나.
홀랑 먹어버린 아이스크림 대신 얼려놓은 야쿠르트를 하나 쥐어줬다. 녹색 뚜껑을 따더니 "어떻게 먹어?" 하길래, 이로 야쿠르트 주댕이를 까고 한바퀴 돌려 플라스틱을 벗겨냈다.
"쪽쪽 빨아먹어라. 얼린 야쿠르트는 단물먼저 빨아먹는 것이다."
샐쭉한 입에 턱 하니 물려주며 말했다.
"대박."
자기도 해보겠다며 오물대다가 곧 이가 아프다고 성화를 부린다.
"왜이래 아마추어같이. 야쿠르트 안얼려봤어?"
"응. 안먹어봤어."
"아니, 야쿠르트도 안얼려먹고 뭐했어? 제리뽀 얼려서 안 먹었어?"
"안 먹어봤다! 엄마가 팥빙수 갈아줬다. 떡이랑 제리 많이 안줘서 맨날 조르고."
석유왕이야 뭐야. 순간 금잔디가 된 기분이 들었다. 구준표가 따로 없구만. 고생이 많으셨을 임여사님을 생각하며 속으로 삼킨다. '아드님을 귀하게 키우셨네요. 입만 고급으로.'
갑자기 떠오른 듯 내남자가 말했다.
"그거 뭐지, 네모난 아이스크림. 임페리얼? 그건 먹었지."
임페리얼은 술이름 아니던가. 이놈은 대체.. 진짜다. 뼛속까지 진짜 술쟁이.
"엑설런트?" 하고 답하니,
"그래 그거. 난 파란색이 맛있더라." 한다.
맞아. 흰 천과 바람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있을 맛이었지. 파란색 금색 하나씩 집어 껍데기를 까먹는 맛.
아무래도 내일 퇴근할 때 카톡해야겠다.
'올때, 엑설런트'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