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사과를 드립니다. 글은 삭제했는데 부부싸움 에피소드에서 제가 나이트 갔던 이야기를 썼었는데,
읽는 분들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린 점 사과 드립니다. 나이트 간 것도 잘못이지만, 그런 걸 자랑스럽게 쓴 점이 더 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댓글 보고 더 반성했습니다. 물론 읽고나서 부끄러워서 삭제했습니다.
그리고 취소선때문에 읽기 불편하시다는 분들께 해명을 하자면 제가 엔하위크 미러를 즐겨 읽는 데 그곳의 취소선을 보고
재미있겠다 싶어 따라했던 겁니다. 앞으로는 다른 분들을 배려해서 쓰겠습니다. 수정했습니다. ㅈㅅ
초등학교때 이사간 집을 못 찾아서 예전 살던 집에서 울며 엄마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는 나는 심각한 길치다.
시골집의 누렁이도 밥때 되면 알아서 들어오는 귀소본능이 있는데, 가끔 몇번 갔던 장소도 제대로 못찾는 나를 보면 개만도 못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절대 개들 무시한 발언 아닙니다. 저 개 되게 좋아해요!! 하지만 고양이가 더 좋은....)
그런 길치였던 내가 아버지의 권유로 운전면허를 대학 입학 하자마 취득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남자는 생존을 위한 기술이
하나쯤은 꼭 필요한데, 너는 밭가는 거 빼고 재주가 없으니 운전면허를 따거라" 하시며 강제로 학원에 보내셨다.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의 생존 기술은 점 50 고스톱이시란 말입니까.... )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운전면허 필기고시를 난 두 번만에 합격했다. 처음 아버지와 함께 필기 시험을 보러 간날 우리 부자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서 조상 대대로 필기에서 떨어진 경우는 없었다며, 그래봤자 아버지와 형 두 명인데... 만일
내가 필기에서 낙방하면 그것은 바로 가문의 망신이라 하셨고, 난 나의 실력으로 아버지에게 내가 바로 가문의 망신임을 증명했다.
결국 아버지 감시하에 3일간 밤낮으로 공부한 뒤 아버지의 모의검사를 몇 번 치루고, 당당히 필기를 합격한 뒤 의외로 실기는 쉽게 합격했다.
역시 도시 아이들이 미니카를 손으로 끌고 놀 때, 경운기를 몰고 논으로 밭으로 누비고 다닌 보람이 느껴졌다.
하지만 심각한 길치였던 나는 운전할 때 다녔던 길도 제대로 못찾아서 고생을 했다. 차를 사면 가장 먼저 서점에서 지도책을 산뒤
운전하던 시절, 지도책도 길치인 나에게는 전혀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다. 물론 네비게이션이 보편화된 지금도 네비게이션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다시 검색합니다." 이다. 그러고보니 인정하기는 싫지만 운전도 못하는 거 같다.
부인과 연애할 때도 나는 수많은 경로를 이탈하고 방황했다. 30분 거리내의 맛집을 찾아갈 때 최소 1시간 정도 시간을 허비한 뒤
목적지에 도착한 적도 많았다. 맛집의 음식이 아닌 욕으로 배를 채운 날들도 많았다.
부인은 연애할 때 내가 부인과 좀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길을 헤매는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훗날 "이 자식은 진짜 길치라서
헤메고 다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부인이 운전면허 취득을 결심한 계기는 신혼 초 친구부부들과 함께 펜션에 놀러가기로 한뒤, 펜션에서 다같이 만나기로 했다.
아침 9시에 똑같이 출발해 다른 부부들은 11시경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길을 잃어버려서 계곡을 건너고, 수풀을 헤치고 비포장 도로의 자갈들을 튕겨가며 "길은 아는데 시원한 양평의 공기를 만끽하며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런거야" 라는 희대의 개드립을 날리며 운전하는 동안 부인은 공복에서 찾아오는 분노와 동시에 자신이
면허를 꼭 따서 다시는 나에게 다시는 핸들을 양도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결국 부인은 서울로 오는 즉시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을 하고, 필기와 코스는 빠르게 합격했다.
운전면허 간소화 업적을 남기신 쥐새끼 아니 이명박 덕분이었다.
이제 남은 건 도로주행이었는데, 도로주행 역시 강사 선생님께 강사를 하신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과감함과 신중함을 동시에 갖춘
유연한 핸들링을 가진 운전신동이라며 극찬을 받으며, 필기 - 코스 - 도로주행을 모두 한 번에 합격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들은 말이 아니므로 절대 믿지 않겠다.)
부인은 면허가 취득되는 날부터 "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핸들을 잡았다. 부인이 심호흡을 하며 핸들을 잡을 때 나는 안전벨트를 타이트하게 조이며,
'오늘도 무사히"라는 기도와 함께 조수석 옆 손잡이를 꽉 잡고 동승했다. 내 소중한 3년 할부로 구매한 수미 (나는 차를 의인화 시켜 수미라 부르며
딸처럼 아꼈다. 하지만 부인에게 수미는 한때는 남편차 지금은 내차 일 뿐이었다.)는 이제 나의 곁을 떠나 부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수미는 점점 수만이로 불리는 날이 늘어가고 있다. (차를 나는 여성미 넘치게 수미, 부인은 남자다운 이름인(?) 수만이라 불렀다.)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 3년이 되어가는 동안 부인은 큰 사고를 낸 적이 없었다. 물론 주차할 때 여기저기 쾅쾅은 몇 번 했었지만,
(그때마다 난 쓰린 속을 참아가며 "괜찮아! 초보 때는 다 그런거지" 하면서 대인배 인척 했다. 사실은 돈도 아깝고 10년만에 장만한 내 차
이러면서 눈물도 났다. 하지만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운전에 제대로 재미를 느낀 부인은 올 여름 선그라스까지 장만했다.
선그라스를 끼고 여유있게 운전하는 부인의 모습을 뒷자리에서 보니 마치 머리털 난 '빈 디젤'이 운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체형도 상당히 비슷하다. 부인은 운전하면서 델마와 루이스의 그녀들을 상상했겠지만, 난 자꾸 분노의 질주의 빈 디젤이
떠오른다.
관우에게는 적토마가 있었듯이 그리고 부인에게는 수만이가 있다. 부인은 기분이 안좋거나 나와 싸운 날 수만이를 데리고 달린다.
내가 풀어주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수만이가 아니 나에게는 아직도 수미가 고맙다. 그리고 아주 가끔 내가 술마신 날 나를
데리러 와 줄 때 너무나도 고맙다. 물론 내가 옆에서 "이 길로 가야되는거 아니야?" 이러면 "닥쳐 운전은 내가 한다" 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길을 간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고독하게 "마이 웨이" 불렀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1. 부인이 1종 대형면허 시험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내년 봄 친구들과 제주도를 놀러가기로 했는데 목표가 25인승 미니버스를
운전하며 제주도를 누비는 것이라고 한다.
2. 부인이 운전하며 가장 화를 낼 때는 휘발유 값이 2천원을 돌파했을 때 였다. "자원외교 했다는 놈들이 도대체 뭐를 했냐!" 이러면서
무능한 정부를 욕했었다.
3. 부인이 유일하게 핸들에 손을 놓았을 때는 임신했을 떄 였다. 그때가 수미와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안전 운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