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혼자서 카페에 간다.
외출이 하고 싶은데 마땅히 갈 곳이 없거나 시간이 남는데 할 게 없으면 아무 책이나 하나 싸들고 동네
카페로 향한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집에선 담배를 피우며 책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카페에 들어가면 쓴건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왠지모를 의무감에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내가 이걸 왜 시켰을까 하며 후회하고는 한다. 그리고는 시럽통에서 유전이라도
터진것처럼 미친듯이 시럽을 퍼 붓고 나서야 만족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간다.
이렇게 가끔씩 혼자 카페에 가는게 몇 안되는 나의 고상한 취미중 하나였다.
이정도면 잠깐의 티타임을 즐기는 차가운 도시남자 분위기가 나겠지? 라며 스스로 뿌듯해 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카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츄리닝과 삼선 슬리퍼로는 아무리 노력해봐도 한가한 동네 노는형 이상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시럽을 일레븐샷 정도 추가한 설탕물 같은 커피를 냉수처럼 벌컥벌컥 들이키며
허니버터브레드를 장발장처럼 쳐먹는 나의 모습을 보며 이미 품위는 온데간데 없구나 라는걸 느낄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내가 카페를 찾는 일은 점점 잦아들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옛생각이 나 다시 카페를 찾았다. 그리고 항상 앉던 자리를 찾았지만 이미 그자리에는
다른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겨울에는 적당히 따뜻하고 여름에는 에어컨 바로 아래라 시원하며 적당히
구석진 자리에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고 창문과 멀리 떨어져 있어 햇살을 피할 수 있으며
화장실이 바로 옆이라 잦은 배변활동을 실시하는 나에겐 안성맞춤인 그 자리는 이미 다른사람의 차지였다.
그냥 갈까 했지만 이미 커피를 시킨 후라 하는 수 없이 다른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온 카페에는 그동안 장사가 잘 됐는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커플들이었고
그들이 내뿜는 사랑의 아우라가 카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 찢어죽이고 싶은 모습들을 보며
빨리 다른 취미를 찾아야겠다 라며 고민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커플이 카페에 들어왔다.
역시나 한쌍의 거머리 같은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그들은 내 바로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이윽고 쉴새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계속 나에게 들려왔고
도저히 읽던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나는 잠시 책을 덮고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쉴새없이 왱왈왱왈 떠드는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과묵한 모습이었다. 핸드폰만 들여다보면서
간간히 응. 응. 그래. 그래. 같은 성의 없는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지만 여자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히려 옆에 앉은 내가 그 남자보다 더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학교얘기, 친구들 얘기,
부모님얘기등 온갖 잠담들을 늘어놓고 있는 와중에도 남자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기죽지 않고 여자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여자는 영화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겨울왕국을 얼마 전에 본 모양이었다. 이제 겨울왕국도 좀 시들하지 않나? 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을때
여자가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기 나 겨울왕국에 나오는 주인공 닮지 않았어?'
나도 모르게 안닮았는데요. 라고 얘기할 뻔했다. 물론 충분히 미인이었지만 그정도는 아니었다.
목석같은 그 남자가 처음으로 움찔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린 그 남자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나의 엘사를 모욕하지마!' 라며 귓방망이를 후려갈길 듯한 표정이었다.
금새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정을 되찾은 모습으로 남자는 작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하지만 여자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남자에게 대답을 요구했고 계속되는 질문에 남자는 살짝 짜증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넌.. 뒤틀린 어미를 닮았어..'
마시던 커피가 코로 나왔다. 대낮의 콜롬비아 원두 분수쇼에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해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당황해서 휴지를 찾고 있는 데 옆에 있던 여자또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꼇는지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지더니 나 갈래 라고 새침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크읍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던 여자가 테이블
모서리에 허벅지를 찍은 것이었다. 나때문에 이쪽을 보던 사람들은 카페에서 새로하는 슬랩스틱 이벤트인가? 박수를
쳐야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새초롬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뒤틀뒤틀거리며 뒤틀린 어미와 엘사빠는 카페를 벗어났고 홀로 남은 나는 앞으로 절대 다시 가지 않을 곳 목록에
그 카페를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