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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271 지난해 7월 재벌닷컴 발표에 따르면 15대 재벌 중 조세 피난처에 가장 많은 자회사를 보유한 그룹은 롯데다. 이 중 버진아일랜드(버진 군도)에 있는 롯데의 자회사는 2009년 중국의 대형마트인 타임스(현재의 중국 롯데마트) 매장 65개를 7327억원에 매입했다. 매장 한 개당 매입비는 평균 112억원. 그런데 여기서 의혹이 발생한다. 이마트가 비슷한 시기 다른 중국 매장 6개를 약 220억원, 매장 한 개당 평균 36억원에 매입한 바 있기 때문이다. 롯데의 버진아일랜드 법인은 이마트보다 3배 정도 비싼 가격으로 중국 매장을 매입한 것이다(민주당 김현미 의원실 자료).
왜 롯데는 국내 법인이 아니라 조세 피난처의 법인을 통해 높은 가격으로 매장을 매입하는, 석연치 않은 거래를 한 것일까? 조세 피난처 법인이 탈세에 이용된 것은 아닌지,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버는 돈은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반드시 국내로 반입하고 이에 따른 세금을 내야 했다. 그러나 외환 규제가 사실상 폐기된 이후 기업들은 해외 수입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해외에서만 돌릴 수도 있다. 더욱이 한국 대기업 중 상당수는 2000년 이후 해외 여러 곳에 제조업이나 유통·금융 관련 법인을 두고 지구적 차원에서 사업을 벌이는 ‘초국적 기업’으로 발전했다. 국내 법인과 해외 법인 사이, 혹은 해외 법인들끼리 거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일관된 지휘가 가능한 그룹 내 거래이고, 따라서 ‘가격 조작’을 통한 탈세 가능성이 발생한다.
‘가격 조작’을 통한 탈세, 얼마든지 가능
예컨대 한국의 초국적 기업은 홍콩 같은 조세 피난처에 세운 연구소 법인에 특정 기술의 지적재산권을 부여할 수 있다. 이 초국적 기업의 국내 법인은 해당 기술을 활용해 만든 제품에 대해 일정한 ‘지적재산권 사용료’를 홍콩 법인에 내야 하는데 그 가격을 엄청나게 비싼 수준으로 책정할 수 있다. 가능성으로만 보면, 국내에서 벌어들인 10억원 중 9억원을 ‘지적재산권 사용료’로 홍콩 법인에 지급해버리면 국내에서는 1억원에 대한 세금만 내면 된다. 혹은 국내 법인이 조세 피난처에 법인을 만든 뒤 이 법인을 통해 중국 제조업체에 투자한다. 이렇게 하면 중국 제조업체가 거둔 수익 규모가 조세 피난처를 거치면서 조정될 수 있다. 이는 국내 법인이 조세 피난처의 자회사로부터 배당금 등의 형태로 받을 수 있는 수입(국내 과세 대상이 되는) 역시 조작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에 더해 네덜란드 같은 ‘조세조약 피난처’(국가 간 조세조약의 빈틈을 이용해 자금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나라)에 자회사를 두면 금상첨화다. 지구 곳곳의 조세 피난처에 설치한 여러 종류의 법인이 동원된, 정교한 ‘탈세 네트워크’가 완성되는 것이다.
한국수출입은행 자료에 따르면, 2012년 6월 현재 한국인이 조세 피난처에 설립한 현지법인 수는 모두 3092개로, 필리핀에 1374개, 말레이시아에 621개, 싱가포르에 555개 등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영국령 버진 군도와 케이먼 군도에도 132개의 법인이 있다. 그래서 한국의 기업들 역시 조세 피난처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묻어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사IN>은 한국산 초국적 기업들의 조세 피난처 법인을 본격 취재하기 위한 첫 시도로 SK그룹의 감사보고서를 살펴봤다. SK그룹은 그나마 지주회사 체제이기 때문에 비교적 투명하게 종속회사나 계열사를 드러내어 취재가 용이했다.
국내 최대 지주회사 그룹인 SK(주)의 2012년 감사보고서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그룹은 홍콩(13개), 싱가포르(13개), 케이먼 군도(7개), 버뮤다(1개), 네덜란드(3개), 파나마(1개), 말레이시아(1개) 등 조세 피난처에 39개 법인을 갖고 있다. 종류별로는 제조업체, 투자회사, 컨설팅 업체 등이다. 지역별로는 동남아시아와 유럽, 태평양 섬나라들을 잇는 지구적 금융 네트워크가 가동되고 있다. SK(주)는 미국과 영국에도 법인을 다수 설치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감사보고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미국의 델라웨어 주나 네바다 주, 플로리다 주, 영국의 저지 섬 역시 조세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통제 사실상 폐기
구체적으로 보면, 그룹의 최상부라 할 수 있는 지주회사 SK(주)가 케이먼 군도에 ‘SK GI매니지먼트’라는 투자회사를 직접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손자, 증손자 격인 수많은 조세 피난처 법인이 있다. 예컨대 SK(주)의 자회사인 SK이노베이션은 버뮤다에 금융법인인 ‘SK이노베이션 인슈런스(버뮤다)’를 설치해놓았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인 SK에너지는 홍콩에 ‘SK에너지 홍콩’, 케이먼 군도에 ‘SK에너지 로드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회사를 두었다. 케이먼 군도의 ‘SK에너지 로드 인베스트먼트’는 홍콩의 ‘SK에너지 로드 인베스트먼트(HK)’를 거쳐 중국의 아스팔트 제조업체 등 8개 기업을 지배한다. 말하자면 SK그룹의 중국 자회사들이 거둔 수입은 조세 피난처인 홍콩과 케이먼 군도를 거쳐 SK이노베이션이라는 한국 법인의 소득에 잡히는 것이다. SK에너지의 다른 자회사인 ‘SK에너지 인터내셔널(싱가포르·석유류 제품 무역)’은, 네덜란드에 ‘SK터미널 B.V. 암스테르담’이라는 투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SK그룹의 다른 핵심 기업인 SK텔레콤은 케이먼 군도에 ‘YTK 인베스트먼트’와 ‘아틀라스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회사를 갖고 있다. 이 중 아틀라스 인베스트먼트는 다시 ‘테크놀로지 이노베이션 파트너스’와 ‘SK텔레콤 차이나펀드 I’이라는 투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또한 SK텔레콤은 네덜란드와 홍콩에도 투자회사를 가지고 있다. SK라는 초국적 기업이 전 지구적으로 형성한 생산-금융의 네트워크다. 이 밖에도 SK건설이 싱가포르에 자회사와 손자회사로 투자회사를 갖고 있으며, SK종합화학도 홍콩의 투자회사 지분을 100% 가지고 있다.
SK나 다른 재벌 그룹의 해외 법인 중 다수는 시장 접근성과 금융거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종류와 지역을 망라한 조세 피난처 법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탈세에 이용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렇게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영국의 시민단체인 ‘조세정의 네트워크’가 870조원(한국 GDP의 70%)에 달하는 한국 자금이 조세 피난처로 이전되었다고 발표할 정도라면, 정부나 시민사회 역시 국내 재벌그룹의 초국적 자금 운용에 대해 연구하고 파악해서 탈세 가능성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지하경제 양성화가 이 지점에도 닿아 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