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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드라마 본것이 9회였다.
군복무중 9회 보면서 '드라마 정말 웃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빌리 박의 황장군 패러디, 상실과 꽃다발의 카페에서의 기싸움, 거북도사 빌리등이 일반 코메디영화 이상으로 재밌었다.
그래서 다음 회를 기다리게 되었고 10화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제대하고 나서 1~16회까지 전부 다시 보았고, 신나게 웃어댔다가, 가슴 찡한 멜로씬도 보고, 결국 폐인이 되었다.
그런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내가 왜 폐인이 되었을까?
1. 코믹 장면은 극과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없다.
위에 적었듯이 재미있는 장면때문에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 끌어모으려면 이만한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이거 웃긴다' 라고 그 장면들만 편집해서 뿌리면 그 장면들 보고 다른것도 궁금해졌다.
하지만 계속 코믹 씬만 사용하다가는 드라마가 유치해진다.
그리고 코믹 장면들도 언젠가는 질리게 되어 있다.
대부분의 코믹 영화들의 평이 나쁜 이유도 코믹 장면에만 신경쓰다가 정작 이야기 흐름을 놓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르다.
빌리의 꿈속에 계속 등장하는 안나 귀신이 그 대표적인 예.
빌리가 보는 안나의 모습은 빌리 생각대로 바뀐다.
2화에서 등장하는 모습은 물귀신 그대로,
기억을 잃은 뒤 처음으로 마주친 안나를 무시하고 돌아선 4화에서는 '난 당신을 기억해' 라는 안나 귀신의 대사,
병원을 찾아 안나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랬던 7회에서는 '이래야 니가 더 무섭지, 후회하게 될거야',
8화에서 안나의 변한 모습을 보고 죄책감이 든 9화의 안나 귀신은 물에 젖지도 않았고 '이미 늦었어' 라는 대사,
불리한 상황에 처한 안나를 보고 나서지 못한것에 후회되는 12화는 물에 빠지던 때의 옷이 아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안나의 모습과 '이미 늦었어, 당신은 날 버렸잖아.'라는 대사
안나 귀신의 모습만 봐도 안나에 대한 빌리의 생각이 변해가는 모습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안나 귀신 장면에서 12화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코믹한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코메디가 단순히 웃기기 위해 사용된것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코메디 장면을 보지 않으면 이야기 전개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 드라마에는 이런 장면들이 넘친다.
그냥 재밌어서 코메디 씬을 따라가보면 어느새 드라마 폐인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2.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대부분 꽉 조이는 긴장감의 스릴러 영화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6화 막걸리씬을 보자. 다른 드라마들이었다면 상실의 취한 모습, 취중진담까지 하고 집에서 자는 상실을 보여주며 끝냈을 것이다.
근데 여기서는 끝없이 간다. 취한채로 예전 기억을 되살리며 철수와 추는 왈츠까지 보여준다.
그리고 논바닥에서 뒹굴고 버스정류장을 집으로 생각하며 누워버리는 모습까지 거침없이 이어진다.
잠시 철수가 상실에게 한마디 하며 훈훈한 모습까지 보여주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바로 아침으로 바뀌어 구토로 인해 더러워진 침구류를 세탁하며 이를 가는 철수를 보여준다.
오밤중에 막걸리 마시고 취하면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의 전부를 6화에서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걸리 마시기, 취중진담, 취중 왈츠, 빌리의 회상, 버스정류장, 토슬이 씬이 잠시의 쉴틈도 안주고 계속 이어진다.
바로 1분 앞이 궁금한 드라마라는것은 이걸 보고 이야기하는 거다.
3. 잠시라도 극의 흐름이 완만해지면 바로 코믹 씬으로 빠르게 가버리는 절정의 완급 조절능력.
12화 초반부에서 상실은 철수가 꽃다발을 만날거라 생각하며 매우 심각하다.
근데 철수한테 책임지라고 하고 벌을 준다는 상실이가 원래 그 성격이었던가?
웬지 이제는 꽃다발한테 캐발렸구나 하는 그런 실망감에 거의 기죽어버린거나 마찬가지일듯 하다.
원래의 상실이었다면 6화에서 꽃다발을 집에까지 데려다주려던 철수에게 하는 말처럼 쏘아붙여야 한다.
이 장면에서는 너무 심각해보인다.
<12화>
<6화>
하지만 우리의 감독님과 홍자매는 딱 여기서 끊어버린다.
'낚시질'이라는 엄청난 상징을 끌어와버린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급반전되어 상실이는 원래의 성격대로 '됐어' 한마디 던지고 돌아서버린다.
게다가 또다시 열받은 상실이가 운전하는 차가 빌리 박을 보고 급회전하면서 사고를 내며 다시 끊임없이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드라마에서 어찌 폐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4. 의외로 미술과 음악에 신경을 쓴 흔적이 많이 보인다.
처음에 이 드라마는 작가가 중심이 되는 드라마라 생각했는데 계속 보면 멋진 연출들이 많이 보였다.
음악이 가장 멋지게 쓰인 씬을 꼽자면 2화의 용달차 뒤에 상실이 태우고 집에 가는 씬, 15화 조안나 화장씬
2화 용달차 씬은 지난번 포스트를 참조하고,
15화 조안나 화장씬은 Don't Hate Me 2번 트랙의 재발견 수준이다.
화장하는 안나와 그 모습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카메라, 그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라틴풍의 음악.
화장을 끝마치고 목걸이를 차는 모습을 한 바퀴 돌면서 전체적인 윤곽을 보여주는 연출... 완벽했다.
그냥 그저그런 TV 드라마인줄 알았는데 철수의 집과 조명, 색감등을 보면 심상치 않았다.
장철수 집 세트 구성이 꽤나 세밀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집 내부의 색깔은 파란색과 풀색들이고, 조명도 그냥 형광등 켠것 같지 않고 부드러운 빛을 주고....
(이것들 보면 뭔가 동화적인 공간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1~2회 잔뜩 어질러진 꼬라지가 정말 초등학생 저학년 삼형제 있는 집인것 같았고
여기 저기 붙어있는 돈과 관련된 소품들, 아이들 낙서...
(이것들 보면 어딘가 있을법한 매우 현실적인 집 내부라는 생각이..)
궁 처음 1화 보면서 배우들 연기 어색하고 웬 고등학생이 시집을 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보게 했던 것은 뛰어난 비주얼이었다. 그 멋진 화면발을 계속 보게 되자 이건 가짜가 아니라 진짜 저런 상황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환상의 커플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건이 벌어지는 장철수 집 세트장과 천혜의 세트장 남해군 절경은 '환상'적인 극본을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5. 소품 하나하나가 복선이 된다.
자장면이 뒤에 가서 장철수와의 소중한 기억을 상징하는 사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종영하기 몇화 직전에 나왔던 전기장판이 그 빠른 사이에 장철수 집에서의 따뜻했던 기억을 상징하는 사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막걸리와 고스톱이 소박한 생활속의 행복을 상징하는 사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강자와 하던 얼음땡 놀이가 안나의 마음을 풀어주는 열쇠를 상징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드라마를 보던 시청자들은 그 던져진 소재 하나하나에 대한 갖가지 분석글을 쏟아냈다.
그거 하나씩 하나씩 보면서 의미를 생각해보면 폐인 고속도로를 타게 된다.
6. 캐릭터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다.
상실이가 아무리 귀엽고 예뻐도 왜 저런 행동을 할까? 어쩌다 저렇게 된걸까? 하는 설명이 없다면 그냥 '재수없다.'라는 말 한마디로 끝난다.
한예슬이 이제까지 연기한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다 저렇게 싸가지없고, 재수없는 캐릭터들이었다.
그럼 환커의 나상실과 구미호 외전 등의 드라마 캐릭터는 뭐가 달랐을까?
도대체 무엇때문에 환커는 뜨고 구미호 외전은 버로우탄거야?
작가들은 조안나/나상실 캐릭터의 기본 설정에 꽤나 많은 공을 들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나 많은 과거 플래시백 사용이 없었을 것이다.
빈번한 플래시백은 조안나가 어쩌다 성질이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계속 단서를 던져줬다.
시청자들은 그것을 통해 과거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고 조안나/나상실의 태도는 이래서 그랬을거야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조안나의 어린 시절은 재산을 노리는 친척들로 가득하다.
그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13화 빌리 생일 플래시백처럼 지갑을 열어주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돈이면 다 되는 줄 알며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거부감을 느꼈을것은 뻔하다. 이런 상황에 안나의 어린시절이 평탄했을리는 없다.
어린이 시절은 중간에 건너 뛰고 바로 세상의 쓴맛을 알아버린 어른이 되어버린 느낌.
기억을 잃어버린 한달 사이에 조안나는 정신적 성장과정을 다시 겪고있는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빠같은 장철수에게 이리저리 투정부리던 나상실이 14회에 가서는 어린이들까지 따뜻하게 보살피는 어른이 되어버린다.
<10화> 어린이같은 모습(대본에 그런 느낌을 내라고 적혀있음)
<1화> 칼로 끝장을 보려고 했는데 배짱이 부족해서 물에빠져 죽어.
-> 인어공주 이야기가 이렇게 시니컬한 결론이었나?
<13화> 내 지갑을 닫아버릴지도 몰라.
<13화> 정성이 무슨맛이야? 단맛? 짠맛? 신맛? 아무 맛도 없는 정성따위 신경쓰지마.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일수록 가족이 필요하며 빌리를 취중에서(6화), 꿈에서(12화) 찾았던것은 그가 최초의 가족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2화> 잠꼬대 하는 상실. 빌리. 빌리.
돈을 노리는 친척들중에 그녀에게 이로운 사람을 골라내려면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해야 한다.
<1화> 빌리 : 안나의 안목이 틀린적은 없었잖아. 조리장, 객실장 문제가 있긴 했어.
그 정확한 눈은 미술품을 보는 심미안과 화려한 패션 감각에도 뜨였겠지.(1화, 5화, 6화)
<1화> 미술품 경매장 씬
<6화> 준석 그림 미술관 전시 씬 - 구도와 표현테크닉은 떨어지지만 색체에 대한 감각적 표현력은 매우 뛰어나. 가능성 있어.
그것을 통해 조안나의 어린시절을 조금이라도 짐작하게 되자 그녀가 겉으로는 할말 다 하며 당당하게 보이지만 실은 매우 연약하고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7. 주/조연 가릴것 없는 명연기
더 설명해봐야 입만 아프다. 두마디로 끝낸다.
싱크로율 100%. 남해 가면 정말 나상실, 장철수가 있을것 같다.
지난번 포스트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폐인될까봐 더이상 안쓰려고 했는데...
결국 쓰다 보니 끝이 없다. 언제쯤 되야 환상의 커플 정도로 폐인될 드라마가 나올까?
아니아니아니... 폐인되면 안돼. 나오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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