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상진 선수(178cm-77kg, 광주 출생)는
1977년 음력 3월 9일생(네이버에 잘못 나왔네요.)으로 광주 진흥고 출신입니다.
광주 서림초등학교-진흥중-진흥고-해태, 2남 2녀 중 막내, 별명 : 멀뚱이,
야구입문 : 서림초등학교 5학년 때 주무기 : 몸쪽 직구
좌우명 : 남들보다 한 번 더 한다.
입단 동기로는 (장성호-충암고, 김종국-고려대, 김상훈-광주일고)이 있습니다. 서재응은 미국 진출
95년 고교 전국 대회에서 평균 방어율 0.86, 커브, 슬라이더, 직구가 좋음, 최고구속 145Km
당시의 출사표.
"8일 선수단의 첫 훈련이 시작된다. 프로는 오직 성적으로 말 할 뿐이다."
"명문 해태의 10승대 투수로 태어나 선배들이 일군 업적을 이어가겠다."
96년 입단 당시(무등기 MVP) 계약금 1억원(연봉 2천)으로 팀내 고졸 최고대우(장성호와 같은 금액)였습니다.
당시 70세를 이미 넘기셨던(73세) 고령의 아버지와 다친 팔을 안고서도 공장에서 생계를 위해 일을 했던
어머니를 위해서 연세대 진학을 포기하고 해태에 입단했습니다.
-1996년 8월 19일 경향신문 인터뷰 中-
"아버지 어머니가 편히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한다"
"야구가 내 직업이잖아요. 야구말고는 살 길이 없어요.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놀 시간이 어디있어요."
김상진의 소꿉친구 나종용(32)씨의 기억.
“저나 (김)상진이나 집이 무척 어려웠다. 특히나 당시 신안동에 살던 상진이는 방 하나짜리 집에서 살았다.
‘운동 열심히 해서 부모님 호강시켜 드리자’는 일념으로 5학년 2학기 때 상진이와 함께 야구부가 있는 서림초교로 전학을 갔다.”
96년 데뷔년(19) 29경기 출장(21경기 선발) 9승 5패 0세이브 123.2이닝 / WHIP 1.35 / 방어율 4.29
97년 2년차(20) 30경기 출장(24경기 선발) 9승 10패 1세이브 147.2이닝 / WHIP 1.28 / 방어율 3.99
98년 3년차(21) 25경기 출장(20경기 선발) 6승 11패 1세이브 121.0이닝 / WHIP 1.34 / 방어율 3.97
신인으로서 상당히 좋은 성적이었으나 신인왕은 박재홍(당시 현대 유니콘스-현 SK)의 몫이었습니다.
1997년 10월 25일 잠실에서 열렸던 해태와 LG의 한국시리즈 5차전(해태가 3승 1패로 우세)에서 선발등판
1회 LG 서용빈 선수에게 1타점 우전 적시타(2피안타(2볼넷) 1실점 완투 해태 6-1승)
4회 이후로는 18명의 타자를 모두 범타처리 하는 완벽투구로 해태의 9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만 20세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기록.
98년 김상진은 고질적인 목 통증을 호소했었는데,
9월 19일 잠실 OB와의 경기에서 2회 통증으로 강판 후 부상자 명단에 올라 시즌을 마쳤습니다.
이후 10월 광주에서 친구들과 식사도중 후두부 통증을 호소한 뒤 각혈하고 기절해 전남대 병원으로 후송.
정밀검사 결과 3번 목뼈 척추에서 종양이 발견되어 대수술을 받았지만(위암 4기 판정)
이미 위에서 시작된 암이 척추까지 전이된 것이었습니다.
위암진단은 본인과 어머니 신XX씨에게만 알려지지 않은 채 중앙대부속병원과 서울 중앙병원에서 재차 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생을 마치기 직전 김상진은 63빌딩 전망대에 올라 자신이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잠실구장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김상진은 98년 10월30일부터 본격적인 항암치료를 받아 한 때 호전 되는 기미가 보이기도 했지만
99년 3월초 위벽 천공으로 다시 입원했고 6월 2일에는 병세가 악화돼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다
99년 6월 10일 오후 3시 55분 강남성모병원에서 그의 짧았던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일 수원구장에서 있었던 해태:현대의 경기는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에 임한 해태의 10:2 승리였습니다.
(소소경 7이닝 4피안타 2실점-현대의 홈구장 11연승 저지)
당시 이대진은 후배의 죽음 앞에서 "앞으로 1년이 됐든 10년이 됐든 김상진을 기억하겠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진흥고 3년 선배)
김상진이 위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고 해태 이대진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식욕과 의욕을 잃었습니다.
98년 12월 “우리 착한 상진이를 살려야 한다. 내가 살려내겠다”며 사방팔방으로 치료비를 모았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알아보고 다녔습니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지대에 말기 암환자를 고쳐내는 자연요법 병원을 알아내 ‘미국행’을 권유했지만
김상진의 체력 문제와 완치 여부에 대한 불확신 등에 걸려 미국행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김상진 치료비 모금운동 관련 기사
http://bit.ly/km5PV9 에이스 오브 에이스로 불리는 이대진 선수는 2000시즌을 앞두고 김상진을 기리며, 자신의 등번호를 김상진의 11번으로 바꿉니다.
이후 이대진 선수는 부상에 시달리다 "저 세상 사람이 된 상진이에게 더이상 누를 끼치지 않겠다"며 05년에 다시 45번으로 바꿉니다.
"그동안 상진이의 배번을 달고 상진이가 못다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상진이에게 누가 될 것같아 배번을 바꾸기로 했다"
이대진은 "비록 배번은 변경하기로 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영원히 상진이가 살아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이 또 그날이네요.
오늘은 선수들이 검은리본을 달고 나올까요?
꼭 기아가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위 글은 제가 여기저기 참고해서 쓴 글이구요.
아래글은 박동희 기자의 2009년 6월 13일 블로그(http://bit.ly/mBt2uO) 내용 중 일부입니다.
호전될 것 같던 김상진의 병세는 1999년 봄부터 급격히 악화했다.
3월 초 통원치료를 해오다가 갑자기 각혈과 하혈로 응급실로 실려와 4시간의 큰 수술을 받고 4월부터 눈에 띄게 체력이 떨어졌다.
누구보다 앞장서 김상진의 투병을 도왔던 김준재 트레이너에게 하루는 김상진이 “형님, 바람…좀…쐬고 싶어요”라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 어디 가고 싶니?” 김 트레이너가 물었다.
“63…63빌딩에…가고…싶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김상진이 대답했다.
김상진을 휠체어에 태우고 김 트레이너는 63빌딩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때였다.
김상진이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어딘가를 찾고 있었다.
김 트레이너가 “상진아, 어디 보고 싶은 데라도 있니?”하고 물었을 때 김상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잠실야구장”이라고 답했다.
김 트레이너가 잠실구장이 보이는 쪽으로 휠체어를 놓자 김상진은 한동안 전망대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 갓 뽑아낸 밀크커피처럼 따뜻한 봄볕이 김상진의 이마를 내리쬐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상진이 항균용 마스크를 입에서 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님. 저기가…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제가…제가 완투승을 거둔 곳이 맞지요?”
김 트레이너는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잠실구장을 바라보는 김상진의 뒷모습을 보며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김 트레이너와 김상진의 마지막 외출은 그렇게 노을에 물든 단풍처럼 슬프게 흘러갔다.
[박동희의 베이스볼포엠] 고 김상진의 비디오테이프
http://bit.ly/2mL85U 그렇게 12년이 흐르고. 마침내 타이거즈가 ‘V10'를 달성했다.
호흡처럼 빈번했던 한국시리즈의 우승이 이토록 간절할 줄은 타이거즈팬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나지완의 한방으로 시리즈가 끝나고 조촐하게 뒤풀이를 했다.
타이거즈의 우승이 기뻐서, 와이번스의 분패가 아쉬워서, 한국시리즈 7차전의 감동이 하도 진해서, 그래서 잔을 들었다.
무엇보다 한 이가 떠올라 내렸던 잔을 다시 들어야만 했다. 그 한 이는 바로 전 해태 투수 고(故) 김상진이었다.
그가 떠올라 갑자기 코가 시큰해지고 어느덧 눈엔 충혈된 달이 떴다.
동행인들을 의식해야 하건만, 순간 나는 넋이 나간 이처럼 그저 한없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렇게.
“상진아, 보고 있니? 네가 도와준 거니? 네가 눈 감기 전 유일한 취미가 무엇이었는지 병원관계자에게 들었던 기억이 나.
그 관계자가 그러더구나. ‘김상진 씨가 밤이면 불 꺼진 병실에서 혼자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 비디오테이프를 봤다’고.
그것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래, 네가 5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결정됐지.
그 이야길 듣고 가슴에 금이 갔단다. 그런데 그 병원관계자가 등을 돌리려는 내게 한마디를 더 하더구나.
지금도 그 말이 귀에 생생해. 그때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 그이가 뭐라고 했느냐고? 이랬어.
‘그 젊은 야구선수가 그랬어요. 자기가 죽기 전에 꼭 팀이 우승했으면 좋겠다고요. 저, 야구를 몰라서 하는 말인데…그 팀 우승했나요?’
난 그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단다.
‘네, 우승했습니다. 우승했고 말고요. 다시 우승하는데 고작 12년밖에 걸리지 않았어요.’라고.
상진아, 이제 그곳에선 새 비디오테이프로…갈아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