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여가시간을 알차게 보내기란 참 힘든 일이다. 보통 TV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부대는 케이블이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주말 외에는 딱히 재밌는 TV프로그램도 없거니와 시끌벅적한 내무실 분위기 속에서 책을 읽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끔 나가서 족구나 농구등 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해안에선 추위와 살을 에는 바닷바람에 이마저도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하던것이 바로 브루마블 이었다. 내무실엔 언제부터 전해져 내려왔는지 알 수 없을정도로 헤지고 낡은 부르마블
게임판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지루한 여가시간을 보내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아이템 이었다.
평일 쉬는시간엔 보통 브루마블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러다보니 다들 프로브루마블러에 필적하는 실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소싯적에 주사위좀 굴렸다고 자부하던 나였지만 고참들을 이기기는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게임을 오래하다보니 각자의 개성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땅이 어디든 일단 사고보는 복부인 스타일부터 체계적인 분석을 토대로 땅을 사는
공인중개사 스타일. 서울처럼 땅값이 비싼 대도시를 위주로 땅을 사는 이촌향도스타일, 남의 땅이 많은 지역 중간에 꼭 하나씩
자기 땅을 끼워넣는 알박기스타일. 후반에 무인도로 들어가서 나올줄 모르는 로빈슨크루소 스타일에 남들 몰래 한두칸씩 더
가려는 사기꾼 스타일. 거기에 황금열쇠에 집착하는 황금열쇠 성애자 스타일까지 이 사소한 게임 하나에 각자의 성격이 드러난
다는 전혀 군생활에 도움이 안되는 쓸데없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찌됐건 이처럼 우리들은 부르마블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사실 한두판 하면 쉽게 질리는 게 브루마블이었다. 군대라는
특별한 환경 때문에 어쩔수 없이 계속 하긴 했지만 결국은 이마저도 질리게 되었고 다른 재밌는게 없을까 고심하던 차에 내 머리
속에 번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건 할게 없으면 직접 만들면 되잖아? 라는 생각이었다. 대학시절 당시 한차례 보드게임방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그때 했던 게임들 중 재미있고 쉽게 만들수 있는 게임이 뭐가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한가지 게임이 떠올랐다. 클루라는 게임이었다. 어디서 누가 어떤물건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추리하는 추리게임이었는데 왠지
간단하게 만들수 있을것 같았다. 바로 작업에 착수한 나는 이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을 금새 깨달았다. 사실 간단하게 만들고자
마음 먹었다면 금방 만들수 있었겠지만 쓸데없는 열정에 불이 붙어버린 나는 좀더 완벽한 물건을 만들길 원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겐
그림 실력도 필요한 재료도 없었다. 이런 나에게 필요한건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란 사실을 인지했다.
그때부터 나는 후임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첫번째 타겟은 미대를 다니고 있는 후임이었다. 바로 헤드헌팅에 들어간 나는
내가 이러한 일을 할건데 나에게 힘을 보태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지만 후임은 망설이는 눈치였다. 물론 이 역시 예상했던 바였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고싶다라는 표정이 역력한 후임에게 나는 준비한 당근을 꺼내 들었다. 그건 내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꼼쳐 놓았던 두루마리 휴지였다. 후임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부대내에 휴지가 거의 바닥난 상태였고 뒤를 닦을수 있는
물건이라면 갈대잎이라도 써야할 판이었다. 특히 그 후임은 이미 일찌감치 휴지가 떨어져 배변활동에 큰 장애가 있음을 아련한
눈으로 국방일보를 바라보던 그 후임의 눈빛으로 눈치채고 있던 터였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은 그 후임은 결국 나와 함께
하기로 했다. 다음은 본부소대 행정병 후임의 차례였다. 판을 만드는데 필요한 종이와 아스테이지 3M까지 모든것을 가지고 있는
어쩌면 이 프로젝트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를 포섭하는건 쉽지 않았다. 본부소대 소속이라 보급품으론 도저히 그를 낚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삼고초려와 온갖 감언이설. 그리고 게임이 완성되었을시 본부소대로 주 2회대여권을 약속하고 그 후임을 포섭할 수
있엇다. 이로써 필요한 인재와 재료가 모두 갖춰졌고 남은건 채찍질 뿐이었다. 이런 일렬의 과정을 통해 나는 나에게 착취와 사탕발림이라는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고 국회의원으로 직업노선을 변경해야 하는건 아닐까라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게 만들었다.
일주일 후 완벽하게 군대버전으로 리메이크된 게임이 완성되었다. 게임의 목적은 후임을 구타한 병사를 찾아 영창에 보내는 것이었고
제목은 '클루 영창을 보내라'였다. 용의자들의 이름은 소대 인원들의 실명이 사용되었고 보일러실과 소각장, 보급창고등 우리에게
익숙한 장소들과 개머리판 식판, 하이바등 익숙한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는 게임이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기존의 브루마블에 식상해 있던 소대원들은 새로운 게임에 열광헀고 게임을 한번 하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다른소대 사람들도 몰려와 게임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부대에 클루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근무자 신고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때였다. 그 순간에도 우리는 낮에 한 게임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xx가 소각장에서 개머리판으로 팬거라니까. 에이 아니지 말입니다. ㅇㅇ가 보일러실에서 하이바로 팬거지 말입니다.
신고를 하러 나오던 소대장이 우리의 대화를 듣고 말았다. 우리는 게임얘기를 했지만 소대장이 듣기엔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말이었을 것이다.
이런 선진병영문화에선 있을수 없는 우리들의 대화를 들은 소대장은 깊은 관심을 보였고 우리는 해명을 했지만 쉽사리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결국 그날 근무가 끝나고 아침에 직접 게임판을 들고 소대장실로 찾아가서야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소대장은 한참을 게임판을 바라보다
부대 비품으로 쓸데없는 짓 한다고 한소리 들을까봐 걱정하고 있던 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피해자를 중대장으로 바꾸고 용의자에 소대장을 넣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