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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가 천용택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해상방위대는 해군목포경비부 연혁사 제39쪽의 기록으로 봐 목포 지역에서 약 1년간(50-51년) 존속됐던 보조기관으로 추정된다.[1] 국방부는 천용택 국민회의 의원에게 "해군 목포경비부 연혁사 39쪽에 '당 경비부 내 보조기관인 해상방위대를 총참모장의 명으로 완전해체하고 건물 일체를 인수함'이라는 기록이 51년 5월 3일자로 나온다"는 내용의 답변서를 보냈다.[4]
위키의 내용을 긁어온것이구요
(서울=聯合)尹東榮기자= 국민회의는 22일 金大中총재의 사상전력 시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6.25 당시 해상방위대 근무여부, 청년단 활동 여부, 공산당원으로서 체포여부에 대해 이를 반박하는 관련자들의 증언등을 종합정리, 50여쪽의 자료로 제시했다.
지난 14-16일 미국을 방문, 증언을 녹취하는 등 2개월전부터 증거자료 수집활동을 벌인 千容宅의원은 "이를 계기로 더 이상 소모적인 사상논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국민회의가 공개한 증언등의 요지.
▲金大中총재의 6.25 당시 해상방위대 근무 관련 증언
△宋寅明전목포경비부사령관(해병대준장 예편. 미국 뉴욕 거주)= 1950년 목포경비부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군과 경찰만으로 공산 잔당 소탕과 안녕질서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기때문에 목포시내 청년단과 여성청년단등 애국단체들을 모두 동원해 작전을 보조케 했다.
특히 해상작전이 중요했기때문에 당시 지역유지이던 吳載均씨에게 지시, 해상방위대를 창설해 부대장을 맡게 했고 金大中씨는 당시 목포상선회사 사장으로 배를 여러 척 갖고 있었기때문에 배와 함께 해상방위대에 참여했다.
金씨의 장인 車보륜씨등을 포함한 우익진영의 유지들은 적극적으로 군을 지원했다. 金씨도 해상방위대 역할에 적극적이었으며 사상적으로도 건전한 젊은이로 목포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는 등 상호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吳鍾鉉씨(吳載均전대장의 친조카. 부산거주)= 金大中총재는 당시 해상방위대 부부대장을 맡았었다.
△국방부가 千容宅의원에게 제출한 자료= 해상방위대는 목포경비부 기구표상에는 없으나 해군목포경비부 연혁사 제39쪽의 기록으로 봐 동 지역에서 약 1년간(50-51년) 존속됐던 보조기관으로 추정됨.
▲金大中총재의 청년단 활동 관련 증언
△金聖恩전국방장관= 46년 金長勳 당시 제독이 해안경비대 목포기지 창설임무를 띠고 목포에 부임할 때 참모장으로 현지에 내려갔으나 사령관 숙소가 없어 목포지역 유지들과 상의한 결과 車씨가 소유하고 있던 적산가옥의 2층을 사용케 됐다.
어느날 저녁 車씨가 나를 초대, 식사를 하면서 金大中씨가 자신의 사위이고, 목포상고를 졸업했으며 청년단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받았다. 金씨는 청년단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金大中총재가 6.25 당시 공산당원으로 6월27일 미군함상에 총살당할 뻔 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50년 6월25일 당시 미국의 극동배치도인 `한국전쟁 배치도'와 한국전쟁 직전 상황도인 `한국전쟁 부도'등에 따르면 6월27일엔 한반도에 군사고문단이외 미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6월30일 한.미해군은 북위 37도 이북의 해상은 유엔해군이, 그 이남은 한국 해군이 담당키로 합의했으므로 미해군은 당시 서남해상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전쟁 발발 3일만에 미군이 함정에서 공산당원이었다는 혐의만으로 타국민을 사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주한미대사관은 이를 공식부인했다.
위키의 주석에 있는 기사의 내용을 긁어온것입니다.
일베1충들의 선동에 속지 맙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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