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월에 접어든 거리는 구석구석마다 크리스마스의 냄새가 풍겨왔다.
여자는 행복을 강요하는 12월의 축제 분위기가 싫었다.요즘 유행하는 기억 제거수술을 받고 와서는 행복한 표정으로 수다를 떠는 직장 동료를 보며 여자는 의구심을 느꼈다.정말 잊어버리면 행복할까.이별의 고통을 참아내는 시간은 정말 무의미한 것일까.어제까지만해도 죽고싶다며 술주정을 부리던 사람이 아침 출근길에 병원에 들러 기억의 일부분을 드러내고서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나타났다.여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기억 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게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여자의 뺨에 차가운 12월의 겨울하늘이 입을 맞추었다.
“첫눈이다.”
조금 늦은 첫눈이 내렸다.첫눈이 내린다고해서 특별히 없던 약속이 생기거나 우연한 만남이 생기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그래도 첫눈의 마법은 결코 영하의 온도에 얼어버린 빗줄기 그이상의 어떤 설레임같은 것을 만들어 주었다.여자는 매년 속으면서도 막상 첫눈이 내리면 또 한번 속을 준비를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자는 발걸음을 재촉했다.저녁 10시가 다가오고 있었다.자정을 넘기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가 된 기분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마감준비를 하고 있는 장터국수 전문점으로 들어갔다.여자는 텅빈 가게에 홀로 자리를 잡고 앉아 국수를 시켰다.사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호남형의 남자가 홀로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여자의 주문을 받고는 주방에서 요리를 한 후 직접 여자의 식탁까지 음식을 날랐다.
여자는 국수를 한 젓가락 들어 올려 입으로 후후 불며 면발 속에 웅크리고 숨어있던 뜨거운 열기를 날려버린 후, 후루룩 소리를 내며 면을 빨아들였다.
첫눈은 어느샌가 함박눈으로 변하여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여자는 결심했다.과거의 기억을 떠안고 살아가리라.아무리 괴롭고 가슴이 아파와도 모든 것을 떠안고 살다가 죽으리라.그렇게 생각하자 뱃속 깊은 곳에서 용기가 솟아나는 기분이 들었다.여자는 국수 값을 계산하고 거리로 나갔다.
가게 주인 남자는 가게 정리를 마치고 문을 잠근 후 눈발이 날리는 겨울 거리에 발을 내딛었다.
“끝나신거에요?”
머리 위로 한얀 눈이 소복이 쌓인 여자가 가게 건너편에 서있다가 다가왔다.남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까딱여서 인사했다.
“아까 그 손님...저를 기다렸나요?”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여자가 다가와 다짜고짜 남자의 팔짱을 꼈다.남자는 당황하며 팔을 빼려고 했지만 여자는 그럴수록 더욱더 힘을 줘서 남자의 팔뚝을 꼬옥 끌어 안았다.
“절대 놓치지 않을꺼야.”
첫눈이 쌓였다.
거리에.
남자의 듬직한 어깨 위에.
갸날픈 여자의 속눈썹 위에.
“날 기억 못하는 구나?”
남자는 당황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지운거야?”
남자는 대답 없이 걸었다.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음에도 여자의 봉긋한 가슴이 느껴졌다.남자는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고 있는 여자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남자 자신보다 열 살 이상은 어려보였다.
둘은 어느덧 남자가 혼자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다.여자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남자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여자는 살짝 흥분한듯한 모습으로 옷에 붙어서 몰래 집안까지 따라들어온 눈을 털었다.둘은 인간형 가사 도우미 로봇이 내 온 따뜻한 차를 나눠 마셨다.
“정말 기억 지운거야.난 자기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데 너무해.”
여자가 살짝 눈물을 보였다.여자의 눈물에 남자는 당황했지만 공통 된 추억이 없는 상대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다.부엌 언저리에서 무표정한 로봇이 두 남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긴 내 첫남자였어.내 몸도 마음도 다 가져갔었잖아.근데 어떻게 기억을 지울수 있어?이기주의자.”
남자는 자신을 책망하는 여자의 힐책을 고스란히 들으며 차를 마셨다.자신이 기억제거 수술을 받은 것은 알고 있었다.지금 눈앞에 있는 이여자를 잊기 위해서 였을까.그나저나 이제 와서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비난해도, 기억에도 없는 일을 사과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해.내가 뭘 잘못했지?”
여자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긋 웃었다.웃을 때 오른쪽 뺨에 보조개가 살짝 들어갔다.
“자긴 나를 너무 아프게 했어.”
2.
소녀는 새로 구입한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는 거실로 나갔다.소녀의 아빠와 엄마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난 딸을 보며 흐믓했다.
“눈...첫눈.”
소녀는 창문을 열고 마당에 쌓여가는 눈을 쳐다보았다.알록달록 색깔을 뽐내던 세상이 어느덧 새하얀 통일된 한가지 색상 속에 파묻혀 갔다.
“춥다 이제 문 닫아라.”
소녀는 엄마의 말을 흘려 듣고는 마당 구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무언가 움직였다.그것은 빠른 속도로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총소리.
아빠는 피와 뇌수가 뒤엉켜서 피고름처럼 보이는 액체를 깨어진 두개골에서 쏟아내며 바닥에 쓰러졌다.그날밤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소녀의 단독 주택에서 울려 퍼진 총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소녀의 아빠를 죽인 범인은 소녀와 엄마를 전리품으로 얻어, 밤새도록 번갈아 가며 마음껏 유린하다가 아침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알고는 두 모녀의 심장에 무정한 총알을 박아 넣고서는 약간의 현금을 챙겨서 사라졌다.
소녀는 살았다.소녀가 다섯살 무렵 인공 심장 이식수술을 했었다.그당시는 지금처럼 강화 플라스틱이 아닌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어진 인공심장이 유행이었다.범인의 흉탄은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어진 소녀의 강철 심장을 뚫지 못했다.
소녀의 증언으로 범인은 잡혔다.그리고 범인에게는 모든 기억 삭제 후 사회 복귀 프로그램 이수 및 사회봉사 삼십년 형이 내려졌다.모든 기억삭제와 인격개조를 통한 인도적인 차원에서 행하여지는 실질적인 사형이였다.
가해자는 사라졌다.영원히.
피해자만이 세상에 남겨졌다.
그날밤, 첫눈이 내리던 그날밤 벌어졌던 참혹한 범죄는 피해자만을 남겨둔 채 사라졌다.
3.
여자는 가방에서 총을 꺼내들고 남자의 복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부엌에 서있던 로봇이 무표정한 얼굴로 여자를 쳐다보았다.이미 경찰에 연락한것이 틀림없었다.여자도 예상한 일이었다.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오분에서 십분 사이였다.
“나도 알아.너가 다른 사람이라는 거.”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머리로는 이해를 했어.근데 이녀석이 이해를 못하겠다고 그러잖아.”
여자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날밤의 악마랑 너랑은 다른 인격체라는거 알아.근데 이녀석이 이해를 못하겠다고 그러잖아.”
여자는 배를 움켜쥐고 엎드려있는 남자의 뒷통수에 총구를 겨누었다.남자가 고개를 들어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모르겠어.난 전혀 모르겠어.”
여자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아쇠를 당겼다.피와 뇌수와 부서진 두개골의 뼈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여자는 두어발짝 뒷걸음질 치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다.그저 입을 크게 벌린채 슬픔에 막혀서 나오지 않는 소리를 쥐어짜며 울었다.창밖으로 새하얀 눈발이 끈임없이 내렸다.여자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문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고리가 박살나면서 경찰들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여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가져다 대었다.경찰들이 여자에게 총구를 겨눈채 무어라 소리를 질러 대었지만 무슨 소린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여자는 창밖의 하얀 풍경을 바라보았다.
“소중한 그 무엇도 잃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매일 악몽을 보아야 했어.”
방아쇠를 당겼다.
-끝-
파옥초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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