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이네요.
시나리오 공부를 시작한지 어언 13년이 되어갑니다.
작가 생활도 해봤지만, 어쩐지 요즘은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각설하고,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그동안 제가 공부했던 것들. 분석했던 것들. 프로로서 만화를 그리면서 부족했다고 느꼈던 것들.
그것들을 개선하고 정리하여, 제 자신뿐만 아니라 오유에 가입되어 있는 현 작가분들.
혹은 작가 지망생들을 위해 보편적이면서 핵심적이고, 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간단하게 추려보았습니다.
작가지망생이 아니시더라도 애니나 만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 또한 부담없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쉽게 쓰도록 노력했으니까요.
1년 전의 일입니다.
학교에 강사로 가서 몇몇 아이들에게 만화에 관해 짧게 강의를 한적이 몇번 있습니다.
역시 만화, 애니를 좋아하거나 관심있는 애들이 모인 터라 그림에 재능있는 애들이 몇몇 눈에 띄더군요.
그 중에 한 아이가 자신이 그린 캐릭터를 보여주며 자신의 꿈이 만화가라 했습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림에는 일본풍의 스타일로 초롱초롱한 눈을 한채로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물어봤습니다.
"오, 좋은데? 얼굴도 멋있고 포즈도 멋있어. 근데... 얘는 어떤 성격이야?"
".... 그냥 그렸는데요..."
...아아,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자인도 중요하고 보는 사람이 혹하게끔 그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게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었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일이 생각났으니
인물이란 것에 관해 한 번 말해볼까요.
1. 인물
기본적으로 아이들에게 인물이란 것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이야기 해주는 부분이
바로 이 도식입니다. 이야기에 있어서 큰 틀을 잡아주는 거죠.
만약 A라는 인물이 있다 쳐봅시다.
처음모습은 굉장히 차갑고 이기적이지만
나중모습은 이타적이고 남을 배려해 줄줄 아는 따뜻한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정도의
대중적이고 훈훈한 플롯으로 예를 들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이기적인 인간이 이타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 사람은 어떤 일을 겪어야 할까? 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생기는데,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저 괄호 안에
'사건'이란 것이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겪는 중대한 경험은 인간의 사고관과 가치관 혹은 행동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실제 인생도 그렇지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죽고나자 활발했던 성격이 의기소침해진다거나,
열정페이 한번 당해보니까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이 삐딱해진다거나,
여러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의문점이 하나 더 생길겁니다.
"어? 그러면 이 A라는 인물이 처음에 이기적인 인간으로 나오는 이유가 뭐지?" 라는.
그건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처음 모습 이전에 어떤 사건을 경험해서이죠.
자.... A라는 인물의 첫모습이 이기적이라면, 이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한번 되돌아 봅시다.
우리 자신이 이기적일 때가 확실히 있다, 라고 자각할 때가 있다면
우리는 언제, 어떤 연유로 이기적으로 변했나요?
뭐 손에서 장풍나가고 건물이 폭발하고 그런 거창한 것보다는,
우리 마음의 소박하고 진실된 부분을 한번 들여다 봅시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마음을 다 줬는데 배신당했나요?
회사 동료들을 소중히 여겼는데 그 동료들이 뒤에서 당신을 씹었나요?
순수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도와줬는데 그 사람이 얼토당토않게 당신을 해코지 했나요?
친구 잘 되라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친구가 잠수를 타버렸나요?
어떤 사건이든지, 장르에 국한시켜 한 인물의 배경 이야기에 집어 넣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배경이야기는 인물의 처음모습에 설득력을 불어넣어주는 것 외에도
인물의 '상처받은 모습' 속에 우리 자신들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줘서
이야기를 계속 보고 싶게 만들다던가 하는 힘이 있죠. 일종의 감정이입!
자기자신에게 관심없는 인간은 없으니까요.
추측컨데, 여러분들은 이런 경우가 곧잘 있을 겁니다.
영화나 만화를 보다가 처음에 극중 인물이 너무 싸가지가 없게 나와서
'개같은 새끼, 존나 재수없네. 존나 꼴보기 싫어' 하다가 그 인물의 상처랑 연관된 배경이야기가 나오니까
'어....나쁜 새낀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연민이 가....저 성격이 이해가 가.... 불쌍해....' 하는 경우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드라마 미생에서 마부장이나 성대리의 배경이야기가 나올거라 생각했는데
나오지 않았네요.)
자, 다시 A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저는 좀 강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터라 A가 이기적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해
이런 배경이야기를 집어넣어보도록 하죠.
'과거 A는 자신의 소중한 누군가를 살리려 노력했지만, 오히려 그 노력이 그 사람을 죽게 만들어버렸다...'
라는 지독한 패러독스.
이렇게 설정이 되버리면 A는 과거에 자신의 이타심이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고 믿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 관여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3자가 볼 때는 싸가지 없는 인물로
나오게 되죠. 도표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실제로 우리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봅시다.
우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한테도 기분나쁘게 웃는 낯으로 대해야 되는 때가 종종 있지 않나요?
회사에서 상사 패대기치고 싶은데 뭔가 잃기는 싫어서 비굴하게 웃고마는 때가 있지 않나요?
본심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게 인간이기에 당연히 극중인물도 양면성을 지닙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탈탈 털리는 한 인물이 치는 대사가 "부장님. 죄송합니다."지만
표정은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죠. "개같은 새끼. 내가 무슨 야근머신이냐. 언젠가 네놈의 젖꼭지를 비틀어 죽여버릴거야."
우리는 이것에서 인물의 실제성을 느낍니다.
자, 이제 배경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처음모습, 나중모습까지 A의 셋업이 되었으니
괄호 안에 있는 '사건'이란 것에 중점을 둬봅시다.
'사건'이란 것은 대체로 아무거나 일어나는게 아니고
인물의 배경이야기와 관련된 사건들만이 일어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런 식이면 어떨까요.
A야. 과거에 너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구하는 걸 선택했다가 그 사람을 죽게 만들었지.
그렇다면, 나중에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그땐 어떡할래?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이제껏 봐온 수많은 영화나 만화의 황금패턴이 스쳐지나갈거라 생각합니다.
괄호안에 사건이라 써놓긴 했습니다만 사실은 '사건들'이라고 명시하는 게 맞을 것 같네요.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선 굵직굵직한 것들을 먼저 셋업해놓는 것이 효율적이기에 그렇게 써 놓았습니다.
큰 윤곽이 빨리 잡히거든요.
vol 1은 여기서 끝입니다.
이런 지식들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으시면,
계속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쓰게 된다면 vol 2에서는 인물이 소중히 여기는 것(가치)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