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북한이 발견한 평양인근 낙랑한묘 2600기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수만점의 낙랑도판및 유물은 제외.
북한거는 그렇다고 치고, 국립중앙박물관 도판이랑 유물은 일제조작이라고 헛소리를 하도 많이들 해서.
1. 낙랑호구부 목간
기원전 45년(한나라 연호로는 초원 4년) 낙랑군 내 25개 현의 현별 호구와 인구, 전체 인구 28만여 명을 기록한 당시 공문서 목간이 평양 낙랑 구역의 옛 귀틀무덤에서 발굴됐다는 내용. 이른바 낙랑 호구부 목간
2.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부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3. 정약용 아방강역고
/ 낙랑군의 치소는 본디 조선현에 있었는데, 조선현은 즉 지금의 평양이다. 패수란 지금의 대동강에 연한 지역이다.
4. 안정복 동사강목
《통전(通典)》에도, “평양성(平壤城)은 곧 한(漢)의 낙랑군 왕검성(王儉城)이다.” 하였다. 지금 평양을 낙랑이라고 칭하니 그 유래가 오래다.
5. 한치윤 해동역사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의 해동역사 속집 제1권 > 지리고 > 최종정보
평양인근에 낙랑 비정하는 지도
6. 고려사
고려사 권58 > 지 권제12 > 지리3(地理 三) > 북계 > 서경유수관 평양부 > 연혁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는 본래 3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이다. 당요(唐堯) 무진(戊辰)년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國人)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아 단군(檀君)이라 부르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 되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했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 되었다.
41대 후손 준(準)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쓰고, 곧 평양이다.】을 도읍으로 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右渠)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자,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樂浪郡)으로 하였다.
7. 2011년 낙랑 북중공동발굴 보고서<평양일대의 낙랑묘장>
고고학자인 정인성 영남대교수는 최근 중국 연변대학이 펴낸 2010~11년 북중공동발굴 보고서 <평양일대의 낙랑묘장>을 입수해 30일 <한겨레>에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평양시 남사리 구역에서 확인된 낙랑 계열의 전축분을 정영근, 이동휘, 정경일 등 연변대학의 조선족 고고학자들과 북한의 고고학자들이 2년간 공동조사한 성과들을 담고있다.
특히 조사에서 나온 벽돌무덤 내부와 주요 유물들을 찍은 컬러 도판들이 발굴 상보와 함께 실려 눈길을 끈다. 평양 일대의 중국풍 전축분은 식민지시대 일본 학자들이 100기 이상 굴착해 <조선고적도보>와 당시 보고서들에 조사개요와 흑백도판들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80~90년대 이후 북한 당국이 조사한 낙랑계 고분의 근래 발굴 내용들이 전체 컬러 도판으로 소개된 것은 이 보고서가 처음이다.
정 교수는 “부장품이 매우 고급스럽고, 먹과 벼루가 나온 점 등을 보면 태수급 이상의 고위급 유력자가 묻혔던 무덤으로 추정된다”며 “분명한 중국 한대 전축분 양식을 띠고있어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자리했음을 확실히 입증하는 유적이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보고서는 이 무덤을 낙랑군의 전형적인 전축분으로 결론짓고 있다. 이는 공동조사를 벌인 북한 학계의 공식 견해와 배치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