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행>부터 읽었다. 시골풍경이 펼쳐지길래 느린 전원이야기인가 보다 싶었는데 읽다 보니 그렇지 않았다. 삶의 애꿏은 지랄맞음이 (도시사람 눈엔) 엽서사진처럼 아름다워야 할 시골풍경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별다른 이유없이 죽었다는 느낌을 주는 어떤 수줍은 남자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에까지 다다르자 등 뒤에 한기가 서려오기까지 했다.
해가 뜰 즈음에 시작해서 해가 질 즈음에 ‘상행’하면서 끝나는 이 멈춰선 시계같은 하루의 기록은 어떤 스산함, 공포를 남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단편이라는 정보 없이 읽었다면 어떤 묵시록의 서장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오늘 밤 일어난다는 월식은 시골하늘을 찢으며 울어대는 저 개들이 달을 집어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치가 떨어져가는 주상복합아파트에는 달빛이 비치지 않을 것이며, 노모녀는 곧 다가올 겨울을 차디찬 폐공장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오제와 화자가 때가 되었으니 당연하다는 듯 올라간 그곳에, 그 일상에 무엇이 남아있을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이것들을 지킬 수 있을까. 원래 하루라는 것이 그렇게 다 멀어지고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가을이 익어가는 시골에서 고추를 따면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책을 사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양의 미래>가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제 이 책의 회색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반지하의 공간에서 하릴없이 넘겨다보는 바깥이 비치는 밑자락을 반쯤 허락한 문, 늘 햇볕이 비칠 것만 같은 그곳이 단 한 장의 사진처럼 떠오른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유리 너머에 있었다’ ‘맑은 날도 우중충한 날도 여섯 폭짜리 유리 너머에 있었다’ 라고 양은 쓴다. 이 소회는 그 형식을 달리해 계속 반복된다.
반복되는 문장은 또 있다. ‘나는 일을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일을 했다’ ‘그랬네’ ‘대수롭지 않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너머에 있었다.. 나는 일을 했다.. 대수롭지 않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는.. 태어나서는 안 된다 아니 당신은.. 낳지 말았어야 했다..
절망해서는 안 된다 아니 그런 감정을 들켜서는 안 된다. 그러면 지는 것이다. 저 포도는, 분명히 맛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산대에서 그 광경이 다 보이’니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책을, 물건을 끌어당기고 사람들의 물결을 밀어올리고 서둘러 버스를 타고 가끔씩 섹스를 하고 고양이밥을 준다. 그런대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이다. 나른하게 사그라드는 오후 햇볕처럼, 오래가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괜찮다. 익숙하다. 그런 나날들이니 ‘그랬네’, 정도로 잠깐 깨닫고 말아야 하는 것이다. ‘아가씨’라고 호명당하거나, 너머에서 바람이 소용도는 벽을 두들겨 보거나 바깥에서 양을 쬐고 왔을 어떤 여자애(나중에야 호명받은, 진주 양)에게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고 한 적이 없다. 아니 할 수가 없다 했다 해도 누구에게 가 닿지 못했을 것이다. 다 괜찮은 상태라는 시멘트벽을 쌓아올렸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벽 너머의 이야기. 너무 많은 것들이, 바깥 공기를 쓰읍하고 빨아들이는 터널 깊은 곳을 일순간에 터질 듯이 채울까 봐 두려운 이야기. 아니 그 안에서 터무니없이 쏟아져 내릴까 봐 두려운 이야기. 양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건조하게 쓰였지만, 불면증에 시달리는 화자 본인도 알고 있다. 이 양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란 얘기를 터널 안에서 무너져 내리며 하고 있는 중이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그 이야기가 어디에서고,가 아닌 그 안에서 계속해서 메아리되어 울릴 것이다.
그러니 부술까요, 저 벽을? 양을 위해서, 햇볕을 들이기 위해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창고 한켠에서 식은 밥을 밀어넣고 교대를 하고 다시 책을, 물건을, 사람들을 끌어오고 밀어올린다. 누군가처럼, 감전될 위험 앞에서 둔감한 웃음을 흘리고 밥줄을 쥔 자를 노동부에 보란 듯이 신고할 여유마저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스스로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저 벽을 둘러싼 이야기들 역시 그 앞을 한 두어번 서성거리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그냥 괜찮다. 괜찮아야 한다.
..정말로?
<양의 미래>를 읽고 나서 하룻동안 다른 작품을 건드리지 못했다. 책을 펼치면 그 터널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상류엔 맹금류>를 펼쳤다. 좀 가벼운 이야기겠지 싶었는데 웬걸 아니었다. 이 작가분 그렇게 안 봤는데.. 공포소설집인가?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 아니 그보다도 굴육적인 오수더미로 떨어져내릴 위태로운 한 뼘의 공간에서 그만 휘청거리고 마는 사람들. 그러고도 몸을 툭툭 털며 쓰윽 웃고 마는 사람들. 아쉽고 불쌍하고 답답하고 지겨운 오후.
화자는 항변할 수밖에 없다. 지리멸렬함을 다 감싸안을 만큼 긴 팔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모두를 미안하게 하는 것이 왜 나여야 하나.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결국 모두가 모두에게 불쌍하고 답답하고 지겨워서 미안한 기억이다. 그것으로부터 멀리 떠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 그러나 이런 기억은 그들과 그 장소에서 멀어진 후에도 쉬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기억 속에서 그 한 뼘의 자락이 계속해서 휘청대는 것이다.
세 번째로 당하고 난 후 잠시 책을 덮고 다시 표지를 바라보았다. 코트 주머니에, 긴지 짧은지 알 수 없는 팔을 숨기듯이 찔러넣고 머리칼로 옆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반쯤 숙인 그 또는 그녀가 보인다. 문득 묻고 싶어졌다. 정말로, 아무도 아닙니까? 당신이 아닙니까? 아니, 당신은 아니어야만 합니까?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체념 상태로 떠도는 이방인이 잠시 머문 한 뼘의 자락입니까, 아니면 떠나서 살아남은 채 은근한 죄책감을 곱씹는 자리입니까?
물론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반쯤 고개숙인 사람이 말을 걸어주길 바라는 것인지, 다 귀찮으니 꺼지라고 하는 것인지, 살아남은 사람인지, 사라져가는 사람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끝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뒤이은 작품들도 유려한 깊이로 날카로웠는데, 그 중에서도 <누가>가 가장 아팠다. 내 질투심을 자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시빈민문제, 그 중에서도 주거빈곤의 문제는 내가 오랫동안 (당사자로서 시달려오며) 관심을 가졌던 것들이다. 너무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라 이걸 어떻게 글로 풀어 써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누가>를 읽으며 아하, 하고 Ctrl C V 를 누르고 싶었다. 나 역시 주거빈곤지역을 전전하다 어느 샌가, 저 (지긋지긋한) 타인들과 거리를 둘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돈이고 권력, 즉 계급의 힘이라는 것을 이삿짐박스 위에 걸터앉는 순간 깨달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유레카! ..왜 나는 이런 글을 쓰지 못했던 걸까 안됐다 안타깝다.. 하지만 거기까지. 이 너머의 영역은 황정은의 것이니까.
이 글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언젠가 새로운 형식으로 긴 글을 쓰고 싶다. 그래야만 질투심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런 좋은 작가들에게 시달리면서 그냥 펜을 꺾.. 쓰는 것이다.
<누가>에서 누가 누구의 뒤통수를 반질반질하게 밀어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두더지게임의 지옥도는 <복경>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양의 미래>에서의 건조한 그것과 달리, 이제 그만 역정이 난) 화자의 터무니없을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말들 사이에서 이 게임의 조건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충분한 돈, 그것이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돈 아니고 충분한 돈. 그것이 전제이고 전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그냥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 병신처럼. 언제나 그것을 상상해야 해. 그것을 상상하고 여력을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인간다움의 조건은 여력의 여부가 아닙니까. 나는 병원 복도를 서성이며 전화기를 붙들고 소리지르던 남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이 게임에서 이길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다는 뜻이다.
<아무도 아닌>을 읽으며 전반적으로 도드라진다고 느낀 표현양식이 있었는데 짧은 단어들의 나열이 그것이다. 먹는 음식들을 하나하나씩 열거하고 ( ‘야 배고프냐, 바나나도 있고 토마토도 있다, 바나나를 먹겠냐 토마토를 먹겠냐, 토마토를 더 먹어라, 토마토가..’ ‘만두처럼 소를 넣은 주먹밥, 야채김밥, 계란을 넣은 샌드위치와 소시지, 새우튀김, 치즈, 토마토, 단정하게 자른..’ ‘젓갈, 장, 기름, 떡, 피, 삼, 향, 비늘 냄새..’ ), 던지는 무기들도 하나하나씩 알려주는 ( ‘부엌에서 방으로 오가며 구두, 달력, 상자, 책, 컵, 숟가락, 숟가락과 젓가락을 손에 잡히는 대로 다시..’ ) 식이다. 시장 좌판에서 나물을 팔던 아주머니가 국밥집 자리에 턱 하니 주저앉으면서 ‘그게 그러니까 글쎄..’로 시작하는 얘기를 듣는 것 같다. 사실 <양의 미래>와 <웃는 남자>의 건조한 서술방식 외에 다른 글들은 충분히 여유롭게 말하고 있는데, <복경>에서는 아예 화자의 속병앓는 배를 갈라 꺼내듯이 말들이 쏟아진다. 이러한 수다의 전략을, 이 어처구니없는 게임 도중 심판에게 항의하는 주장의 그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아무도 아닌, 아니어야 하는, 숨만 살살 쉬어야 그나마 ‘아무도 아닌’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멱살 잡아야만 게임이 진행되는 경기장에 선 사람들.. 우리들..? 당신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정도로 서로를 미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견딜 수가 없는 게 아닐까요? 내 맛인데 니 맛이기도 해. 니 맛인데 내 맛이기도 하고. 내가 왜 너하고 같지? 같지 않은데 같은 맛이라면 결국은 같은 건가?’
싫어 싫다고.. 난 당신과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싫다고.. ‘그랬네’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영화감상문은 메모 형식으로나마 자주 쓰는 데 비해, 책에 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깊숙이 들어간 감상의 기억이 휘발되기 일쑤였다. 이 책 역시 다 읽는데 1주일이 넘게 걸렸으며, 벌써 잊어가고 있다. 나로서도 이 책의 어떤 부분들이, 니 맛인데 내 맛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는데도, 그걸 견디기가 힘든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망각에서 내 발로 걸어나가야 함을 잘 알고 있다.
그 시도를 위해 누군가 내민 도움의 손길을 받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이곳에서 추천받지 않았다면 아마 이 책을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힘이 난다.
그러므로, 그게 그러니까 글쎄, ‘병들어 썩을 정도로 많은 글을 남기고 죽은 수줍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같은 걸 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쓴다. 벽 너머의 공포에 질리며, 들리지 않는 대답을 상상하며 바락바락 쓴다. 이 감상들을 지금 붙잡지 않으면 망각이 맴도는 하류로 휩쓸려가 버린다. 그러니 아무도 아니어야 한다 해도 ‘아무 말’은 하련다 그래서 나는 쓴다 쓰.. 벌 서고 있는 것이 아니다 쓰..는 것이다 왜 쓰면 안 되냐 장난하냐 내가 지금 쓰는데 이렇게...
외않됀데?
* 이 책과 제 글에 (사실 저도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질문들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답변 여부는 물론 자유입니다.
* 아래의 두 질문들은 그냥 재미를 위한 ‘앙케이트’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1) <상행>에서 상행한 그들과 남아있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가을날 하루의 다음날 또는 있기나 할지 의문인 그 다음 다음 말하자면 에버애프터.. 에 대한 각자의 상상이 궁금합니다.
2) 책 표지의 그 사람에게 단 한 마디의 말이나 문장만 건넬 수 있다면, 또는 단 하나의 제스처(몸짓, 표정 등)만 취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이나 문장, 또는 제스처를 건네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