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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필 선언을 한 저이고, 그래서 댓글만 가끔씩 쓰는 데, 이글도 댓글로 달려다가 보니 너무 너무 길어서 차마 양심상 남의 글에 댓글로 달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 올리신 분에게 민폐가 될 게 확실해서요. ^^;;; 그래서 일시적으로 본문으로 올립니다.*
이종만씨에 대해 저 사람은 일제에 부역해서 돈을 번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기사까지 찾아다 보여줘도, 읽어보지도 않고 '그 시대에 돈 벌었으면 일제에 부역한 놈이 틀림없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입견은 눈을 멀게 합니다.
나쁜 놈의 눈만 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애국지사의 눈도, 독립군의 눈도 멀게 하는 것이 선입견입니다.
이종만에 대해 제가 좀 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하는 신동아 기사를 중심으로로 하여 제가 보완한 것입니다).
1. 이종만의 삶.
이종만은 조선 말기 (1885년) 울산 대현면 용잠리에서 7남매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고향은 가난한 반농반어의 마을이었고, 인근에 있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게 수탈을 당하는 마을이었습니다. 이종만은 어려서 한학을 배웠는 데 몸이 약해서 서당도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3년을 병을 앓고, 나았다가 다시 병이 재발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스무살이 되자, 이렇게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는 욕망에 뛰쳐나옵니다. 논밭을 팔아 부산에 나와 어물상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어물상을 차린 후에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와서 미역을 자꾸자꾸 사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는 러일전쟁중이었는 데, 미역이 옥도정기(요오드팅크의 일본말, 별칭 머큐롬, 빨간 소독약)의 원료로 쓰이고 있어서 일본에서 고가에 팔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종만도 미역을 엄청나게 사다가 쟁여서 한 몫 볼려고 했는 데, 러일전쟁이 바로 끝나버리면서 미역 재고를 떠안고 망합니다 (1905년).
망해버린 이종만은 빚을 갚기 위해 남의 고깃배에 어부로 타서 일을 합니다. 2년남짓 해서 어부 일에 익숙해지고 빚을 갚자 1907년 23세였던 이종만은 어선을 빌려 어업에 뛰어듭니다. 그러나 명태를 잡으러 갔다가 울산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고 맙니다. 이제는 배 값마저 선주에게 물어주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실패가 거듭되자 다음해 (1908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종만은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피폐한 고향을 보다못한 이종만은 1912년 인근에 흩어져 있는 서당을 통합해서 대흥학교를 설립합니다 (28살).
돈도 없고, 신학문도 모르는 그였지만, 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우쳐 고향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한학을 아직도 믿는 동네 노인들 눈밖에 나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게 됩니다. 1년만에 학생이 한명도 안남고 학교는 망했습니다 (1914년). 돈도 없고, 학력도 없이 학교를 열어봤자 망한다는 것을 깨달은 이종만은 나이 30살에 돈을 벌러 다시 밖으로 나갑니다.
당시는 세계 1차대전중이었고, 광물 값이 비쌌습니다.
강원도 양구로 가서 중석광을 시작한 이종만(1915년)은 시운을 타고 2년만에 5만원 (현재 가치 50억원)의 거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18년 전쟁이 끝나자 광물 값은 폭락했고, 이종만은 광산에 투자한 기자재 값을 치르느라 벌었던 5만원을 날립니다.
광산업에 실패한 이종만은 금강산으로 가서 목재상을 시작하는 데, 그해에 폭우가 쏟아져 수해가 나면서, 개천물이 불어나 쌓아놓은 목재를 쓸어가버리면서 또 망합니다 (1918년).
실패에 지쳐버린 이종만은 고향으로 낙향합니다.
고향에 돌아갔던 이종만은 그래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며 다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합니다.
그는 이준열, 허언 등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과 어울려 경성고학당을 설립하고 고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경성고학당은 무산자 교육이라고 해서 가난한 조선 아이들에게 무료/헐값에 교육을 베풀었습니다.낮에는 중등교육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열어 초등교육을 하였습니다. 이종만이 빵공장을 해서 돈을 대기로 하고 이준열이 학교를 맡았습니다. 이종만의 정식 직함은 고학당 운영위원 겸 협회 간사였고, 이준열이 초대 교장 겸 설립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종만의 빵공장은 경영난에 시달려 금방 문을 닫습니다.
이종만은 다시 또 시도를 합니다. 1920년 조선의 농촌을 개혁하겠다며 세운 조선농림회사는 일제의 방해로 문을 닫습니다. 이종만은 이후에 함경남도 영평평야 개척사업, 함경남도 북청의 개간사업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하였고, 함경남도 영흥에서 동창광산을 경영하다가 또 망하고, 1928년 함경남도 신흥에서 다시 광산을 해보다가 또 망합니다.
당시 조선은 금광시대였습니다. 1923년 최창학이 평북에서 노다지 금광을 발견한 데 이어서, 1926년 방응모가 역시 평북에서 금맥을 발견하여 대부호에 오릅니다(방응모는 금광으로 돈을 벌어 1931년 조선일보를 인수합니다). 나도 한번....? 이라는 꿈을 안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광산업에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거듭된 실패로 주머니에 27전밖에 안남은 이종만은 또다시 광업개발회사를 차립니다. 29번째 사업이었습니다. 돈도 별로 없이 돌아다니던 이종만은 1932년 일본인 기다시마가 내놓은 폐광의 권리를 450원 (현재 가치 4500만원)에 사들입니다. 폐광에서 금 나오기만을 꿈꾸며 착암기로 파고 또 파기를 거듭한 결과, 드디어 운이 터졌습니다. 폐광에서 노다지 금맥이 터진 것입니다 (1934년). 1936년 한해에만 40만원(현재 가치 450억원)의 금이 생산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박을 터트린 이종만이 그 금광을 팔아서
대동농촌사를 설립하고,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에도 대학급 기술인력을 양성, 배출합니다 (이 학교는 후에 김일성대학 공학부를 거쳐 김책공업대학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금광이 터진지 4년째되는 1938년 즈음해서는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대동공업전문학교 이렇게 5개 사업체를 갖고 있었지만, 저 중에 돈이 나오는 것은 광산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돈나가는 일들 뿐이라서, 적자를 견디다 못해 1942년 결국 차례 차례 망합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이종만은 다시 또 도전합니다(30번째). 적산기업인 삼척탄광을 불하받아 사업하던 이종만은 미군정 혼란기에 광부들 파업이 일어나고 미군정측 운영대리인을 몰아내자고 요구사항이 나오자 광부들 편을 듭니다. 미군정의 미움을 사고 얼마안가 쫓겨나지요. 1948년 분단이 되자 월북을 합니다. 노동자, 농민과 지주가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게 이종만의 꿈이었으니까요. 북한에서 혹시나 가능할까...? 하고 기대를 하고 간 것이었지요.
2. 이종만의 꿈, 그리고 민족 계몽운동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종만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29번째 시도끝에 1934년 폐광에서 노다지가 터져서 대박이 났지만, 바로 그 돈을 대동농촌사와 학교 설립하는 데 쏟아붓다가 적자를 감당못해서 1942년 망합니다. 이종만의 황금시대는 불과 8년을 가지 못했습니다.
이종만의 일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30전 1승 29패.
그 1승의 기쁨 또한 몇년을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끊없이 도전하며 꿈 꾼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이종만의 말을 빌리자면) "원시상태"의 생활을 하던 고향마을의 가난과 빈곤, 무지가 지긋지긋했었고, 그래서 신학문을 익혔고 20살에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고향에 남아서 빈곤과 무지에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세상의 넒음과 신지식을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 28살에 서당들을 합쳐서 학교를 세웠던 이유도 그것이고, 마을에서 학교가 망하자, 서울로 올라와 민족운동가들을 만나 다시 또 학교(경성고학당)를 세웁니다.
이후 목재상, 농업, 광산업을 전전하며 떠돌던 이 공상가는,
천운으로 금맥이 터지자, 바로 그 돈을 헐어 다시 또 학교를 세웁니다 (대동공업전문학교- 오늘날의 김책 공업대학).
금맥이 본격적으로 터진 게 1936년입니다.
다음해인 1937년 이종만은 자신과 경성고학당을 같이 했던 사회주의자 이준열, 허헌 등과 다시 뭉쳐서 '대동' 사회를 이루겠다고 결의를 맺고 있었습니다. 돈 벌자마자 자기가 하고 싶었던 민족계몽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불과 5년뒤인 1942년 다 망해버렸지만요.
이종만이 한 일들이 그럼 한낱 이상적 사회주의에 물들었던 얼치기의 일장춘몽이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글에서 경성고학당으로 검색해보시면,
경성고학당에서 교육받은 독립운동가들 이름도 튀어 나옵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 정현수 (1909-1952) - 경성고학당에서 교육받고 나와 야학 활동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고향에서 1928년 운봉보통학교(雲峰普通學校)를 마친 뒤 서울에서 경성고학당(京城苦學堂)을 다니던 중 고향의 일가(一家)인 정운태(鄭云台)·정운종(鄭雲宗) 등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하여 1930년 8월 사회주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5세 이상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과 모순을 폭로하기 위해 동년 8월경부터 야학(夜學)을 열었다. 이 때 정현수는 야학의 강사를 맡아 20여 명의 학동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독립운동가 이종률:
경성고학당 교사로 일하면서 광주학생운동 건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제도 반대,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여 궐기하라'는 동맹휴업 격려문을 작성, 인쇄, 반포하여 일제에게 구속됨. 이종률은 이외에도 우리말연구회 사건을 주도하여 투옥당했고, 해방이후에는 민족일보를 창간
산수 이종률 선생을 아십니까
| http://legacy.www.hani.co.kr/…
광주학생운동 역사자료실-경성휘문고보생에 맹휴격려문발송 및 반포사건
무엇보다도 이종만과 도원결의를 맺고 '대동' 운동을 함께한 사람들이 네임드급 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들입니다. 허헌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를 변호하고 다닌 3대 변호사 (이병로, 이인, 허헌)중 한명이었고, 독립운동가와 가난한 노동자들을 무료로 변호해주고 다녔습니다. 1927년 신간회 사건 당시에는 신간회 간부였고, 1943년에는 일제가 전쟁에 지고 있다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국내에 전파하는 '단파방송 밀청사건'으로 잡혀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허헌을 잘 모르는 이유는, 허헌이 사회주의 계열이어서 월북한 독립운동가이기 때문입니다.
경성고학당도 사회주의 계열이어서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김책공업대학교는 북한에 있으니까, 역시 우리가 받은 교육에서는 삭제되어 있습니다.
교육사업에 공헌을 했다 한들, 일제를 찬양 고무한 죄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대동'사업체들도 자기 사업을 한 것이지, 민족을 위해 일한 게 아니지 않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종만과 함께 한강변에서 '대동' 사회를 이룩하자고 도원결의를 한 독립운동가 송강 이준열의 회고록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1937년 초 어스름이 밀려올 때, 얼어붙은 겨울의 한강 강변에서 남호와 송강, 허헌, 이성환, 이훈구, 정현모, 민정기, 이영조, 김용암, 박창식, 문원주, 한장경 등이 도원결의를 맺었다. 서로의 팔뚝을 맞대며 대동을 향한 새 출발을 약속한 것이다. 아름다운 동행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허헌이 대동사업체의 상임감사를 맡고, 농촌운동 지도자였던 이훈구는 대동농촌사의 기획을 맡고, 신간회 간부였던 정현모는 대동사업체의 경리를 맡았으며, 신간회 정치부 간사였던 이관구는 대동출판사의 주필을 맡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신간회는 1927년 물산장려운동을 하던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 등이 좌우합작으로 민족계몽운동을 하다가,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이를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서울에서 민중대회를 조직하다가 일제에 적발되어 구속된 곳입니다.
정현모는 안동출신 우파계열 민족운동가로서 신간회 안동지부 부회장이었습니다.
대동출판사 주필을 맡은 이관구는 1910년대 대한광복회 황해도 책임자였었으며,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을 맡았었고, 1939년 대동출판사 주간이 되어 1941년 3월까지 재임하였습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이관구
| http://encykorea.aks.ac.kr/…
독립운동가 이관구 선생을 아십니까.
| http://www.yonhapnews.co.kr/…
이렇게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민족운동을 펼치던 이종만이 무슨 일제에 아부하여 돈을 벌고 성공했단 말입니까.
이종만이 일제에 2천원을 기부하고 임전보국단에도 가입한 친일행위를 한 것은 사실인 데, 그것은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그 시기에도 민족운동을 저버리고 일제로 확 돌아선 변절도 아니었습니다.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폐교 위기에 처한 숭실전문학교를 인수하려다가 일제에 거부당한 이종만은, 일제에 황군위문금으로 천원을 기부하여 인사치레를 한 다음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합니다.
독립운동가 이관구는 다음해인 1939년 대동출판사 주필로 옵니다. 이종만이 일제에 황군위문금을 낸 그때 변절한 거였다면, 독립운동가 이관구가 대동으로 왜 건너오겠습니까.
1941년 임전보국단이 만들어지자 이종만은 임전보국단에 들어가 친일행위를 하는 데, 이때는 일제가 금 생산 장려정책을 중단하고 금광사업을 조이기 시작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앞서 적었다시피 대동사업체 5개는, 금광으로 번 돈으로 교육계몽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하던 곳이었습니다. 돈줄이 위기에 처하자, 이종만과 총괄전무 이준열, 경리담당 정현모 등은 임전보국단에 가입해 친일 활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불과 2년뒤인 1943년 일제는 금광을 강제로 문닫아버리고, 대동은 망합니다. 대동농촌사는 농민들에게 모든 토지를 나눠준 후 해산하고, 대동출판사는 팔려서 대동공업전문학교 경비로 쓰입니다.
이게 이종만의 친일행각입니다.
민족사관 홈페이지 알자고: 공유경제의 바탕이 된 이종만의 대동사상
우리가 신간회 간부였던 정현모를 독립운동가로서 잘 못 들어본 이유는, 저때 대동사업체 살리겠다고 임전보국단 들어갔기 때문일 겁니다. 송강 이준열이야 3.1 운동에도 참여하고,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집활동도 했었고, 광주학생운동에도 참여했던 네임드 독립운동가이니까, 저 건 가지고 차마 매도를 못하는 듯 하고...
허헌에 대해서 제가 잘 모르는 데, 1941-42년 이종만이 임전보국단 할 적에 허헌이 여전히 대동의 상임감사였다면, 이종만의 변절의혹은 좀 더 엷어지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허헌은 1943년에 단파방송 밀청사건으로 일제에 잡혀가니까요. 허헌이 1943년까지 변절안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1941-1942년에도 이종만과 함께 였다면 이종만이 변절한 거라는 의혹은 좀 더 엷어지겠지요.
'일제 시대에 거부가 될려면 일제에 아부하고 부역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종만도 그런 놈일 겁니다.' 하고 대뜸 지레짐작하고 까면 안됩니다. 그런 놈은 금광으로 대박나자 조선일보 사서 해먹고 있는 방응모가 그런 놈이고, 이종만은 오히려 교육과 농민운동, 노동운동, 물산장려운동의 흐름을 잇는 쪽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도대체 금광업주가 독립운동가들하고 모여서 도원결의를 하고, 민족계몽운동에 돈을 퍼붓다 망한 케이스가 또 누가 있습니까. 다들 자기만 돈 벌어 배불려 잘먹고 잘 살았던 자본가들, 광산업자들이 넘쳐났던 시절인 데, 그 시절에도 특이할 종자다 라고 할 정도로 조선민족을 위해서 기부하고 살았던 이종만을 친일로 몰다니..
이종만이 진짜로 속마음이 민족운동에 있었던 것인지, 금광으로 돈 벌었으니 대충 학교 차려서 이사장 해먹고 싶었던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 고 하실 분이 있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종만이 금광 대박나기 전에 가난하던 시절에 함께 경성고학당을 열었던 송강 이준열의 글로 그 정신을 갈음하겠습니다.
"내가 기미 3.1운동 때부터 검거되기 시작하여 신의주 경찰서와 종로서에 3회, 서대문서 경찰부 2회, 동대문. 중부서 2회 등 60여세까지 생긴 사건 내용은 일일이 쓰지 아니하고자 한다.
...내가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큰 것은 (경성)고학당에서 고학생들을 교양하던 과정이다. 기개가 있고 사상을 배우고 여러 가지 인고, 수련하던 그 모습들이다. 유산자 교육기관에 대항하여 세운 유일의 무산자 교육기관인 (경성)고학당은 광주학생사건으로 하여 8년만에 강제폐교되는 운명을 당하였으나, 고학생들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하였고, 우리들의 숙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희생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는 오직 새로운 역사가 알아주리라.
대한민국의 청년들이여, 씩씩하고 용감하여 후진성으로부터 속히 탈피하여 국제적 고위의 기술과 공업입국으로 완전히 발전하여 낙후가 없이 가위 지식 공력으로 협소한 이 강토에서 평야의 십분지칠이나 되는 산들이 농업단지로 또는 공업단지로 병행 발전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낙원이 하루속히 기성되를 천번 만번 기원할 뿐이다"
내선일체 운운하기 전에,
조선 민족을 위해 평생을 일하고, 평생 벌은 돈을 털어넣은 민족주의자를,
조선민족을 위해 설립한 사업체가 망하게 생기니까 일제에 살려달라고 빌고 임전보국단 글 써준 것을 가지고 물어뜯고 또 뜯고 하는 것은, 너무 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대동운동을 함께 한 총괄전무 이준열은 3.1운동 참여에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집까지 했었던 독립운동가이지만 대동살리겠다고 이종만과 같이 임전보국단쪽으로 넘어갔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남한에 남았고, 아들 이기준이 서울대 총장, 교육부총리까지 역임하니까 이준열은 대충 눈감아주고 자서전까지 내면서 네임드 독립운동가로 떵떵거리고,
월북한 이종만은 만만하니까 친일파라고 까는 겁니까.
다 같이 민족운동한다고 평생을 바친 사람들인 데 일제 압박에 못이겨 잠시 고개를 숙이고 빌빌 거린 일이 있다고 해서 까대고, 하다못해 그것도 누구는 남한에 남았으니 봐주고, 누구는 월북했으니 가차없이 까고.... 너무들 하잖아요.
애시당초 이준열도, 이종만도 민족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고 남부끄러운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워하면 했지.
친일 행위한 이완용이나 박정희, 방응모 같은 놈들이 부끄러운 삶을 산 것이지, 민족을 위했던 이준열이나 이종만은 부끄러운 사람들이 아니에요. 진짜 깜도 아닌 걸 가지고 꼬투리 잡아 까대고... 인간적으로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핑계 없는 무덤 없다' 따위 말을 하며 까대기 전에,
우리들은 이준열이나 이종만 정도로 민족을 위해서 삶을 던지며 살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건 monandol 당신 생각이구요. 돈돈돈. 돈에 얼마나 찌들었으면, 보이는 게 돈입니까.
저번 글에서도 보니까, 이종만이 '거액'을 투척했으니 용서하자는 것이냐 라고 돈 액수에 집착하시던데, 제가 보는 건 돈이 아니라 인생입니다.
저는 일제에 헌금한 게 2천원 vs 민족에 기부한 게 80만원이라며 1:400 비율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데, monandol님 당신은 자꾸 80만원이 거액이라서 그런 것이냐. 돈이 많아야 친일도 면죄부 받는 세상. 이라며 절대 액수를 자꾸 이야기하더라구요. 저와 님이 같은 80만원을 이야기하는 데도, 뭔가 핀트가 다르더군요.
부자이든 거지이든 누구든 인생은 한번 사는 거라서 같고요,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구요, 자신이 모은 부를 퍼센티지로 따지면 누구나 100%입니다
저는 이종만이 거액을 투척했다고 칭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번 가산의 대부분을 털어넣은 것에 칭찬하는 것이고,
몇번이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민족계몽운동과 농민운동, 노동운동을 계속 시도하고 노력한 것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이고,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공동체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해 이윤을 돌린 것을 평가하고, 가난할 때도 부자일때도 한결같았던 것을 평가하는 겁니다.
가난하고 미약할 때는 동네 서당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그보다 낫지만 여전히 가난할 때는 경성고학당을 세우고,
돈을 벌으니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세우고...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언제나 교육계몽을 통해서 조선 민족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실천한 사람이 이종만입니다.
몇백억을 버는 사람이 아니라, 단돈 몇백만원을 버는 가난한 사람일지라 하더라도, 자기가 번돈의 절반이상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에게 돌리는 사람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자기 혼자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와 함께 잘 살기 위해서 자기 시간을 쓰고, 자기 삶을 바치는 사람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방응모 같은 놈은 금광으로 돈 벌어서 먹고 살만 해지니까, 명예욕에서 남아도는 돈에서 일부 떼어다가 뽀찌 뿌리는 게 방응모식 장학재단인 거고,
기본적으로 자기가 가난하면 남에게 나눠주지 않습니다. 내 돈이 남아돌고 썩어나야 뿌리는 겁니다.
이종만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난해도 남에게 나눠주었고, 자기가 부자가 되어도 남과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나눠주다 보니까, 금광이 터져도 거덜난 게 이종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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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펌글에는 나와있지 않음 해방이후 이종만의 삶을 설명해놓은 글
http://blog.hani.co.kr/sydneytaxi/56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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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한 집안이 몰락하는 퇴행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소설이라면 이 책은 3대에 걸쳐 시대를 거스르는 개척적 삶을 살아온 이야기이다. 소설 3대의 무대를 이루고 있는 바로 그 시기에 시작 되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이 책의 이야기는 이종만이라는 한 인간의 동작 보다는 실루엣이 3 대에 걸쳐 드려지고 있다. 책의 형식은 비록 이남순의 자전적 일기 형식이지만 내면을 흐르고 있는 것은 아버지 이종만의 사상과 삶의 잔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구한 말 한 지사형 사업가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전세계로 흩어져 생활하거나 활동하고 있는 그의 손자 손녀들까지 3대가 근대사를 거쳐 세계화되고 있는 한국인의 발자취를 읽을 수 있다. 따라서 20 세기 한반도에 불어 닥친 격랑과 굴곡의 역사를 헤쳐간 한 가족사를 통하여 한국의 현대사를 적나라하게 실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하다.
나로서 가장 관심이 있었던 부분은 이남순이 평양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온 이후에 북미에서 통일운동을 벌이던 70년대 후반의 시기였다. 그러나 통일 운동가로서의 이남순이 의당히 겪었을 고난은 비교적 매우 건조하게 그려졌다.
시절이 어떤 시절이던가? 북한에 대해서는 정부 발표 이외의 어떤 생각을 하는 것조차 금기였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북한 사회를 처음으로 다룬 재미 동포들의 방북기 <분단을 뛰어 넘어>가 처음으로 출판 된 것이 1984년이었다. 그것도 ‘6월 시민 항쟁’ 이듬 해인 1988년에야 서울에서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까지 몇 해 동안 ‘불법 복사물’의 형태로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면서 읽혀야 했었다. 이런 시절에 본국 보다 더 막무가내 보수적인 해외 교민 사회에서 이남순이 통일운동을 했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은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그녀의 강인한 인간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 이남순이 맹렬한 통일 운동가에서 갑자기 추상적, 관념적으로 보일 수 있는 영성 추구로 방향을 바뀌는 과정이 매우 모호하게 설명되고 있다. 실제로는 이남순이 주변에 극렬한 반대와 공격으로 신체적으로 쇠약해서 6개월 간 식물인간 상태로 있다가 회복되는 난 후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하는 일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또 다른 옥의 티라고 할만 한 부분은 이종만의 친일을 다룬 부분이다.
자긍심을 높이 가질 만한 선조를 둔 후손들로서 이종만의 친일 부분은 밝혀야만 하는 문제이기에 자료를 확보하여 그 부분은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과정에서 문인들의 작품과 친일행적을 구분도 할 줄 모르는 초등학생 수준의 글을 보충자료로 첨부한 것은 매우 적절치 못했다고 생각 된다.
나는 오히려 이종만의 친일은 감추어야 될 일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종만은 지사이기 이전에 사업으로 뜻을 이룰 목표를 가진 사업가였기 때문이다. 혹독한 일제강점기의 수탈적 구조 속에서 사업을 하는 사업가로서 친일이 아니면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이종만이 투신한 광산업 자체가 총독부의 지휘감독을 철저히 받을 수밖에 없는 직종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일제 강점 구조 속의 사업가로서 친일인사명단에 등재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정상이 아닐 것이다.
사업가인 그로서는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구더기가 생김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장을 담근 것이다. 이종만이 가지고 있었고 추구하려 했던 ‘사상’과 사업가로서의 친일행적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일은 친일로 그가 남긴 업적은 업적으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라고 생각 한다.
이종만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왜 북을 택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무질서한 해방공간에서 자본주의 좌파로 분류되는 이종만이 추구하는 높은 이상이 부정부패와 혼란한 남쪽 보다 일사천리 쾌도난마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북쪽의 사회체제를 택하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신이 그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했다면 남쪽에서 매판 자본이 아닌 민족 자본가로 성장하여 큰 공헌을 남길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종만의 영웅적인 삶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저자도 긍정 했듯이 그가 선택했던 북이 실패함으로 그의 인생은 29전 30기가 아니라 30전 30패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가치판단에서의 잘못이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이종만 같이 비범하고 출중한 인물이 북으로 가지 않고 남에서 계속 활동을 했더라면 오명을 누린 체 부를 쌓은 이병철이나 정주영 같은 인물들의 반면교사로 시사해줄 바가 많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종만은 한 마디로 타인지향적인 성찰적 삶을 살아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일 기량 높은 작가가 자료집 성격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을 잘게 썰어서 소설화 할 수 있다면 박경리의 대하 소설 토지에 비할 만큼 시대를 관통하는 대작이 될 소재가 충분하다고 본다. 토지 이후 한 가정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통하여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이만한 책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독자들이 이 책에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이남순이 영세중립통일론을 펴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국제법상 중립의 제도를 몰라서가 아니라 이종만으로 내려온 대동사상 속에서 중립화 통일의 사상적·역사적인 맥락을 찾은 탓이다. 그러므로 영세중립통일론은 그녀에게 종교적 열망과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브라질, 캐나다를 거쳐 이민 생활을 하는 동안의 육체적 고생과 성장하는 자녀들과의 갈등, 긴장, 창조적 해결 등의 과정은 700 만에 이르는 해외 동포 역사 속에서 많은 가정이 겪는 예의 모델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본인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한인회가 ‘장한 어머니상’을 수여한 이유처럼 그녀의 자녀 세대가 이룬 성취를 보고 부러워할 사람도 있겠지만 같은 시대 국내에서 살면서 ‘고생을 하더라도 성취할 수 있는 기회’ 조차 가져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크게 감동거리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책의 특이점은 이남순과 그녀의 자녀들이 이룬 성취에도 불구하고 snobbism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어머니와 자녀들이 함께 도반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때로는 타의로, 때로는 자의로 격변하는 세월 속에서 개척적으로 살아온 이남순이라는 한 개인의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을 이루기 위한 투쟁과 혼란 속에서 일제강점, 분단, 전쟁, 이민을 거친 3대에 걸친 또 다른 utopianism을 향한 순례의 이야기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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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종만의 일생을 알게되면서 웬만한 독립운동가들 못지않은 위인적인 삶을 산 사람의 일대기를 보는듯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한국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프레임인 친일파라는 딱지를 씌우는건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는 확신이 들었구요.
게다가 이종만같은 사람조차도 기계적인 분류논리에 의해 친일파 프레임을 씌워버리는건 우리 스스로가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대의의 정당성을 해치게 되는 결과로 작용할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건만은 공론화시켜서 대중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해야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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