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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현대인들은 ‘우울’을 피하기 힘들다. 우울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살펴보면 흥미롭다. 너무나도 많은 선택지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고, 대부분의 선택지들은 TV속의 광고처럼 휙 지나가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머무는 것 보다는, 빠르게 사라져가는 허무함이 가득하지 않는가. 이 허무함에 대해 철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부산물이라고 여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허무함은 문제적이다. 삶에 대한 허무함. 일찍이 ‘니체’는 이러한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매우 경계했다. 그리고 200년 후, 니체가 스스로 고민했던 질문들은 보편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 극단적인 ‘허무함’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질문을 각자가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허무는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바로 ‘상실’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을 마주하는 현대인에게 ‘허무’는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상실을 마주할 때, 자신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상실을 겪은 직후의 ‘나’, 상실을 견뎌가는 ‘나’, 상실을 견디고 난 후의 ‘나’. 첫 번째의 ‘나’는 언제나 미련을 한 가득 안고 있다. 언제나 마침표 대신 “그랬었다면 좋았을 텐데..”의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히 채운다. 두 번째의 ‘나’는 “그랬었다.”식의 체념에 가까운 생각들을 떠올린다. 세 번째의 ‘나’는 다시 문제적 상황으로 돌아간다. 바로 여기 세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비로소 문제 상황을 처음으로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즉, 세 번째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무언가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멜랑콜리’한, 소설의 분위기는 우리를 마ㅑㄴㅇ 어둠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이 시작은 누군가에게는 ‘구원’일 수도, ‘애도’일 수도, ‘동정’, ‘연민’ 혹은 ‘사랑’일 것이다. 무엇이라고 표현하든, 언제나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자신에 의해 ‘최종적’으로 이루어진다. 성경에서 죄를 대속하는 예수처럼, 우리의 ‘죄’를 대속해줄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모두 각자의 ‘고통’이 최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각자의 고통 안에 휩싸여 있는 한,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는 절망뿐인 현실 밖에 없는 것일까. 니체는 이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대해 해답을 찾은 바가 있다. 그에 대한 비슷한 묘사라고 느낀 부분도 이 책의 구절에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명실]-109페이지 부분이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수평선을 만드는 것은 그 불빛들이었다. 그게 없었다면 다만 어둠일 뿐인 공간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것. 그녀는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이다. 니체는 삶의 허무함에 대해,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주장한다. 이 때의 무한한 긍정이란, 현실 회피성 발언이 아니다. “비록~일지라도 나는 그러길 원했다.”라는 다짐. 비록 유한한 인간의 삶일 지라도 어차피 지는 꽃이 온 몸을 다해 피어내듯이 나의 삶도 피어내겠다. 라는 의지이다. 물론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제시되었다고 해서 모두에게 공감받기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철학 논쟁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중요한 것은 ‘삶’이라는 가능성을 믿으라는 것이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 여행이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선택한 부인처럼 말이다. 어쩌면 수동적인 것은 남편이 아니었을까. 남편과 더불어 [상류엔 맹금류]에서 나오는 제희의 가족과 제희의 친구처럼 거대한 죄책감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남아있는 삶을 채찍질하며 살아간 것은 ‘부도덕’한 것은 아닌가? 하지만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애증’의 관계가 우리의 ‘가족’이고 우리의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바로 우리의 ‘삶’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죄책감’을 ‘책임감’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에의 의지이다. 책의 아주 첫 페이지에는 “사람들은 자꾸 ‘아무도 아닌’을 ‘아무것도 아닌’읽는다.” 라는 구절이 있다. 왜 일까. ‘아무것도 아닌’이란 존재의 허무함, 상실은 자신을 채찍질하며 죄책감을 양산하고 있다. 상실은 그렇게 우울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렇다면, [웃는 남자]의 주인공처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가둔 방 안을 ‘걸어 나가’게 될 때 우리는 정녕 삶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정형돈의 말처럼 “5000만 명에게 5000만 가지의 성공이 있다”면 5000만 가지의 실패와 상실과 극복의 과정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삶과 정의와 선과 악과 고통과 환희와 우울과 절망과 실패와 좌절 등등은 과연 서로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질문. 1
삶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신만의 정의, 실현의 불/가능성 등)
질문. 2
타인의 상실 앞에 마주 선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실 건가요.
질문. 3
[웃는 남자]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심판자가 되어 스스로를 단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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