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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3부 시작합니다.
오랜만이네요.... 하루이틀 미루고 미루다 보니 보니 약 6개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참고로 과거의
1부 링크는
2부링크는
입니다.
매번 적는 얘기지만, 이 글의 내용은 "대부분 그러하다" 는 것입니다.
100% 모든 사례에 100% 확실한 내용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므로, 그냥 재미로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오류 지적질은 모두 환영하며, 잘못된 내용이 발견되면 다음 편에 적어놓도록 하겠습니다.
손자병법의 36계 줄행량
작전상 후퇴, 도망치는 걸 보고 흔히들 36계 줄행량이라 하죠. 이 전략을 "손자병법”에 나온 36계 줄행량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사실 손자병법에는 없는 말입니다. 후퇴 개념은 적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36계 줄행량이라고 딱 끄집어 적혀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36계란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원래 중국에 병법과 관련된 36개의 한자 성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중 마지막 36번째의 한자성어가 “주위상계(走爲上計), 도망치는 것도 뛰어난 전략이다” 인데, 이게 36계 줄행량의 기원입니다.
참고로 삼국지나 기타 매체에서 종종 나오는 전략 관련 사자성어인, 차도살인(借刀殺人), 성동격서(聲東擊西), 원교근공(遠交近攻), 가도멸괵(假途滅?), 반객위주(反客爲主), 반간계(反間計), 미인계(美人計), 연환계(蓮環計) 등도 이 36계에 나와있는 말입니다.
삼국지에서 유비에게 뇌물을 요구했던 관리 독우
유비가 지방 현령이였을 때, 뇌물달라고 때쓰다가 장비에게 억수로 맞은 관리죠. 처음 삼국지를 읽으시는 분들은 오해할 수도 있는 내용인데, 여기서의 독우는 사람 이름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관직 명칭입니다.
좀 더 추가해서, 당시 중국은 뇌물이 그렇게까지 죄악시된건 아니였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뇌물수수가 현재처럼 안 좋은 이미지로 정착된 건 최근입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삼국지를 쓴 저자 나관중이 쓴 또 하나의 소설인 수호지에서는 주인공 파티 급의 한 사람인 대종 역시 뇌물을 요구했던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성경에도.... "은밀히 안기는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고 몰래 바치는 뇌물은 거센 분노를 사그라뜨린다(잠언 21장 14절)" 라고 적혀 있네요
물론 인식과는 상관없이 현재든 과거든 뇌물이 사회를 좀먹는 암적 존재인 건 분명합니다.
닌자의 수리검
나루토란 만화의 영향 때문에 닌자의 수리검이 위 그림에 나온 것처럼 묵직하게 생겼다 생각할 수 있는데…
원래는 이렇게 가벼운 형태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국내에서는 표창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
이런 형태도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별모양의 경우는 파괴력이 약해 독을 묻혀 사용했다고 합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봐면 나루토에 나오는 무식한 수리검은 멋은 있을지 몰라도 워낙 크고 무거우니 닌자에게 맞는 암기는 아니겠죠. 나루토에 나오는 수리검은 사실
"쿠나이" 라고 해서 일본 목수들이 쓰는 공구라고 합니다. 단, 닌자들도 경우에 따라 이 공구를 무기로 쓰긴 했습니다. 물론 이게 성능이 좋아서 썼다기보단, 목수가 쓰는 공구다 보니 누군가에게 들켜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휴대한 겁니다. 하지만 나루토처럼 닥치고 이런 수리검만 쓴 건 아닙니다.
양녕대군은 총명했던 동생 충녕대군(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망나니짓을 했다.
……라면 얼마나 훈훈하고 좋았겠냐면….. 양녕은 실제로 망나니 맞습니다.
충녕을 위했다고 볼 수 없는 확실한 증거는, 조선왕조실록에 양녕이 충녕에게 각종 비난을 했다는 기록이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이 왕이 된 이후에도 양녕은 온갖 사고를 쳐서 세종대왕을 끝까지 머리아프게 했습니다. 정말로 세종이 왕이 되길 바랬다면 해서는 안 될 행동이였겠죠.
다만 가능성은 낮지만, 능력이 뛰어난 충녕이 훗날 자신을 죽일지도 몰라, 똑똑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온갖 사고를 쳤다는 카더라가 있긴 합니다. 실제로 자기 아버지부터 했던 게 형제들 죽이는 짓이였고...
나폴레옹은 추위 때문에 러시아 원정에 실패했다.
러시아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시베리아 한복판이고, 실제로 나폴레옹도 “추위 때문에 졌다”라고 한지라 많은 프랑스군이 싸우지도 못하고 동사로 죽은 걸로 오해할 수 있는데, 추위가 주요 원인은 아니였습니다.
주요 원인은 나폴레옹의 무리한 원정에 따른 보급 실패였습니다.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가는데, 보급 관리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해 결국 물자 부족으로 수많은 병사들을 잃고, 결국 퇴각한거죠. 추위도 물론 악영향을 끼치긴 했겠지만, 나폴레옹이 퇴각을 결정하고 돌아가는 막바지에서나 추위로 인한 피해가 심해진 것 뿐입니다. 확실히 퇴각 후반기에는 정말 추워 동사자가 속출했지만, 적어도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공격할 때는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았습니다.
월별로 말씀드리자면, 나폴레옹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한게 9월이였고, 10월쯤에 후퇴를 시작하다가 12월경에 완전히 러시아 국경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후퇴를 시작할 당시 10월의 모스크바 날씨는 올해 기준으로 모스크바 날씨를 검색해본 결과....
0도~12도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군요.. 한국군 혹한기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죠..
단, 프랑스군이 여름옷 차림으로 원정을 갔던 건 고려해야겠습니다.
또한, 러시아군의 청야전술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청야전술이란, 고구려가 수,당과 싸운 것처럼 물자는 최대한 뒤로 빼놓고 최대한 병력을 보존하며 후퇴하는 전술입니다. 허나 고구려의 경우는 의도적인 작전 하에 실천한 것이고, 러시아의 경우는 도저히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맞닥뜨리면 그냥 도망치고, 도망치는 김에 근처에 있는 자국 마을들도 약탈하고 다니다가…. 애초의 작전은 아니였는데, 싸우다 보니 결과적으로 청야전술처럼 되어 버린 겁니다. 물론 당연히 러시아군이라고 청야전술같은 걸 아예 모를 리는 없고, 부분적으로는 이런 요소를 충분히 사용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본격적인 청야전술로 나갔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겁니다. 단 러시아군도 마냥 도망칠 수는 없으니 어느정도 교전을 벌이긴 했었습니다.
단두대는 기요틴 박사가 발명했으며, 기요틴 박사도 단두대로 죽었다.
개뻥. 이건 그래도 요즘은 오해가 많이 풀린 얘기이긴 합니다. 기요틴 박사는 단두대를 발명하지도 않았으며, 단두대로 죽지도 않았습니다. 기요틴 박사가 귀족이긴 했지만 혁명 지지파였기에 무사히 잘 살다가 자연사했습니다. 단, 기요틴 박사가 단두대 사용을 주장하기는 했고, 이 때문에 기요틴이란 이름이 붙은 거라고 합니다.
다만 단두대 첫 시연 당시에는 칼날이 반월형이였는데, 루이 16세가 이걸 보고 “반월형 칼날이면 중간에 목뼈가 걸려 쉽게 안 잘려, 경사진 칼날로 바꾸면 더 쉽고 편리하게 목이 잘릴 거야” 라고 개량을 제안해서 경사진 칼날로 바뀌었고, 훗날 루이 16세 역시 자신이 제안한 기울어진 칼날로 쉽고 편리하게 목이 잘렸습니다. 어쩌면 이 내용이 와전되었을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루이 16세에게 단두대를 선보인 사람도 기요틴 박사이긴 합니다.
여럿이 같이 떠먹는 찌개문화
요즘은 좀 변화되었지만, 90년대만 하더라도 찌개 하나에 여러 사람이 숟가락으로 떠먹곤 하였죠. 좀 비위생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한 찌개를 같이 떠먹는 걸 한국의 “전통문화”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찌개나 국은 각자의 그릇으로 먹었습니다. 그릇뿐만 아니라 밥상까지도 개인플레이할 정도였죠. 그런데 일제 강점기다, 6.25 전쟁이다 살기 힘들어져서 재료의 낭비를 조금이라도 막으려고 찌개그릇, 그리고 밥상을 공유하게 된 것이고 그게 문화로 정착된 겁니다.
사실 우리가 “전통적”이라고 생각하는 문화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조선시대 말엽,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문화입니다. 저번 글에 적은 거긴 하지만 이를테면 한옥의 경우 단층이 일반적인 이미지이지만,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복층한옥도 많았습니다.
체감 연도격차
명백한 오해는 아닌데….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과거의 시간 흐름을 실제보다 훨씬 짧게 보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적습니다.
단적인 예로,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쿠푸 왕과 클레오파트라 여왕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들 아실 거고, 쿠푸 왕은 제일 큰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입니다. 보통의 인식으로는 둘다 비슷한 고대시대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쿠푸는 기원전 2500년경 사람이고,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50년경 사람, 즉 2500년 가량의 차이가 납니다.
다시말해 쿠푸와 클레오파트라는 그냥 비슷한 이집트시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 이들의 시간격차는 클레오파트라가 죽고 난 후 여러분이 이 글을 보기까지의 세월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겁니다. 즉, 이집트의 파라오에서 또다른 파라오로 넘어간 세월이 한반도 고구려에서 통일신라, 통일신라에서 고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간 시간보다도 더 오래되었다는 거죠. (물론 이집트의 파라오가 단일왕조라는 건 아닙니다)
굳이 기원전으로 넘어가지 않고 조선 시대의 경우만 한정해봐도 비슷합니다.
조선 태조의 경우 1392년에 제위했고, 숙종의 경우 1720년에 사망했습니다. 태조 제위 연도와 숙종 사망 연도의 격차는 약 300년이며, 숙종 사망 이후 현재까지의 연도격차 역시 약 300년입니다.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숙종이나, 숙종 시절 한 백성이 생각하는 태조나, 비슷한 격차의 옛날 이라는 겁니다.
물론 역사학적 관점에서 최근으로 갈수록 역사의 “농도”는 더 짙어지긴 합니다만, 절대적인 시간 자체는 똑같습니다. 역사의 시간 개념에 대해서 오차를 좀 바로잡기 위해 적어봤습니다.
그리고 저번 2편에서 잘못 적은 내용에 대해 수정해봅니다.
갤리선의 노잡이들 처우는 과거에는 좋았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안 좋아졌다고 적었는데,
경우에 따라선 과거가 더 안 좋은 경우가 있었으며, 세월이 흘러도 괜찮은 수준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실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노동력이다보니... 딱히 경우를 한정하는 어렵겠네요...
출처 | 각종 위키, 머릿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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