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은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이메일을 쓰고 있었다.
헤어진지 꼬박 10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헤어지자고 말 한 사람은 자신이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미안하다는 말,
용서해 달라는 말,
단지 그 말이 듣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헤어진 후로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자존심이 강한 미영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가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굳은 맘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은 것이다.
이메일 주소 창에 남자친구의 주소를 입력한 후,
그녀는 어떤 내용을 써야 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사과를 하는 게 좋을까? 아냐, 내가 왜 사과를 해. 용서해 준다고 하는 게 좋겠지? 아냐, 이건 너
무 호소력이 없어. 음. 음....’
고민에 빠진 미영은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생머리의 일부를 연신 손으로 꼬고 있었다.
무작정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만이었으나,
이것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이건 아냐.......이것도 아냐.....아 이것도....”
계속해서 썼다가 지웠다를 반복하던 미영에게 순간,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대체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지? 따지고 보면 다 그 자식이 잘못한 거잖아. 지금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를 판에 감히 다른 여자를 만나?’
그 순간,
[죽어]
미영은 무의식적으로 ‘죽어’라는 글자를 치고 있었다.
“어? 이러면 안 되지. 깜짝이야...”
의도하지 않게 손이 움직인 터라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백스페이스를 연타한다.
그리고 또 다시 한참동안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러던 중,
미영이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자신의 양 손으로 양 뺨을 한 번 철썩 때린다.
“그래! 유미영! 오늘 딱 한 번만 자존심 버리자. 정말 내 생애 마지막이다. 알았지 미영아!”
미영은 무조건 굽히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일단 마음이 정해지자 미영은 거침 없이 타자를 쳐 내려갔다.
보기 민망한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나.는.아.직.도.널.사.랑.....그런데 이 나쁜 새끼가 어떻게 다른 여자를.. 망할 새끼...”
한창 글을 쓰다가 또 다시 나쁜 생각이 떠오른다.
깜짝 놀라 또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미영.
미영은 그렇게 울컥하는 마음을 여러 번 가라앉히며,
다양한 애정표현으로 범벅 된 이메일을 가까스로 완성해간다.
‘이 정도면 되겠지. 이렇게 정성을 들였는데도 안 돌아오면 진짜 나쁜 새끼다.’
A4용지로 5장은 거뜬할 길이의 장문이었다.
문장의 끝마다 갖가지 이모티콘이 들어 있었는데,
특히 하트가 가장 많았다.
그녀는 마우스 휠로 스크롤을 올렸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며 자신의 글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음... 보고 싶은 형석이에게. 아 아냐. 투 형석. 아 이것도 아냐. 음음...”
마지막으로 제목만 적으면 메일은 완성이었다.
이것도 미영에게는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여러 문구를 놓고 걱정하던 미영은 결국,
‘사랑하는 형석에게’로 타협을 보고 제목을 입력했다.
문장 양 옆으로 하트를 두 개씩 박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영은 한 번 더 글을 확인해볼까 했지만,
왠지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까 두려워,
눈 딱 감고 ‘메일 보내기’를 클릭했다.
[발송 중.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제 남자친구가 읽는 일만 남았다.
미영은 어쩌면 남자친구가 벌써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일이 오면 핸드폰으로 문자가 오게끔 설정할 정도로,
꼼꼼하게 메일을 체크하는 남자친구의 버릇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영은 초조한 마음으로 ‘보낸메일함’을 클릭하고 방금 보낸 메일을 열었다.
다시 봐도 정성이 느껴지는 이메일이라고 생각하며 첫 줄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용서해줘 제발(づ_T) 난 너 없이는 못 사는 거 알잖니(づ_T)]
[너와 헤어지고 나의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ㅠ.ㅠ)]
[사랑한다구~♡ 너도 사랑한다고 말해 줄 거지?(~.^)]
“아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미치겠네...”
쓸 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온통 낯 뜨거운 말 뿐이었다.
미영은 후회하지 말자고 되뇌이며 꾹 참고 읽어 내려간다.
그런데 미영이 갑자기 한 문장에서 멈칫한다.
[나는 아직도 널 사랑해♡ 죽어. 너도 아직 날 사랑하잖아 그렇지?(*^^)/]
“어? 이거 뭐야 언제 이런 말이 들어간 거야!”
미영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죽어’라는 말을 문장에 섞어 버린 것이다.
‘메일을 취소해야 돼... 제발 읽지 않았기를... 제발...’
부랴부랴 수신 확인을 클릭하는 미영.
[ 받은날짜 : 2008. 8. 18 (20:47) ]
한 발 늦었다.
이미 남자친구는 미영의 메일을 연 것이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내가 대체 그 말을 왜 쓴 걸까. 혹시 아까 조금 나쁜 생각이 들었을 때, 그 때 무의식적으로 쓴 건가?
미치겠네 정말!’
단어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미영은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그가 다른 문장들을 보면서,
이런 오타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미영은 애꿎은 입술만 계속 이빨로 깨물며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이 마우스 왼 쪽 버튼을 연신 두드리고 있다.
남자친구의 답장을 바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받은메일함’을 계속 해서 클릭하는 것이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지치지 않고 클릭하던 미영의 손가락이 멈췄다.
드디어 남자친구의 답장이 온 것이다.
[ RE: ♥♡사랑하는 형석에게♡♥ (21:10:43) 2.1k ]
보낸 제목 그대로 답장을 보내왔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적은 용량.
대체 몇 마디나 적혀 있는 걸까.
미영은 긴장 되는 마음에 쉽사리 답장을 클릭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분명히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쓰여 있을 거야.’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클릭한다.
-딸칵
[보낸이: “김형석” (hyungsuk80)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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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간결했다.
‘죽어’.
그는 미영이 실수로 쓴 그 단어 하나만 사용해서 답장을 보낸 것이다.
미영은 슬픔과 충격에 휩싸여 한 동안 그 간결한 메일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고작 이런 답장을 받으려고 난, 이렇게 고생해서 메일을 썼단 말인가.
나쁜 새끼. 정말 나쁜 새끼.’
한 편으로는,
꼼꼼한 남자친구의 성격상 그런 실수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는데도,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메일을 보낸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답장 덕분에,
더 이상 남자친구에게 미련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느낀 미영이었다.
‘그래 이제 나 혼자 가슴앓이 하지 말고 깨끗이 포기하자. 형석이는 더 이상 나한테 마음이 없는 게 분명
해.’
열 받지만 한 편으로는 고마운 메일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 동안,
‘죽어’라는 한 단어가 전부인 메일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미영은 밤새도록 뒤척이며 뒤늦게 잠이든 탓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적어도 7시에 일어나야 준비를 하고 9시까지 출근을 할 수 있었는데,
무려 한 시간이나 늦게 일어난 것이다.
그녀는 밤 새 울기라도 했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정신없이 화장실을 향해 달려간다.
가벼운 세수와 가글로 초고속 세면을 마치고,
부스스한 머리를 빗질만으로 진정시킨 채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잊은 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던 미영은 문득 켜져 있는 컴퓨터를 발견한다.
“어? 내가 어제 컴퓨터를 켜 놓고 잤던가?”
슬쩍 마우스를 움직여보니,
까만 대기화면이 원래대로 전환된다.
‘죽어’라고 적혀있는 남자친구의 답장도 그대로 열어 놓은 상태였다.
“어 이상하네. 어제 분명히 컴퓨터를 끈 기억이 나는데.”
미영은 늦었지만,
이왕 컴퓨터가 켜진 김에 받은 메일이 혹시 있나 들어가 보았다.
“어? 형석이?”
남자친구에게서 두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 RE: ♥♡사랑하는 형석에게♡♥ (04:29:27) 2.1k ]
[ RE: ♥♡사랑하는 형석에게♡♥ (06:11:52) 2.1k ]
제목은 어제와 똑같았다.
그리고 내용은,
-딸칵
[죽어]
-딸칵
[죽어]
똑같았다.
출근길.
미영은 만원 버스 안에서 용케 자리에 앉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미영은 그 어느 날보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두통의 원인은 단연코 남자친구였다.
‘내가 미친년이지. 그런 오타는 왜 써 가지고.’
자책에 이어지는 가슴앓이.
‘그래도 그 나쁜 새끼. 차라리 무시를 하던가. 똑같은 메일을 세 번이나 보내서 나를 엿 먹여? 나쁜 새끼.’
그리고 이어지는 원망.
이미 30분은 지각 해 버린 출근길이라 미영의 마음은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거기다 오늘 조회는 악독하기로 소문난 악녀 양과장이 맡는 날이 아닌가.
미영에게는 정말 최악의 아침이었다.
버스는 세종 사거리를 지나, 시청역 4번 출구 앞에서 세워졌다.
그리고 마치 팝콘이 터지듯 버스에서 사람이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미영 또한 밀려나오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미영이 사람들을 밀치며 달리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회사 엘리베이터 앞까지 2분 만에 도착했다.
물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볼썽사납게 헥헥 거리긴 했지만.
“어, 미영씨. 어디 급한 일 있나 봐?”
귀에 익은 목소리.
미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확인한다.
비싸 보이는 고급 정장, 살짝 배가 나왔지만 위엄 있는 풍채.
“아, 아!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는 미영이 근무하는 회사의 사장이었다.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가를 찌푸린 걸로 보아 결코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그래, 혹시 지금 출근 한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에 그런 거면...적어도 40분은 늦은 건데 말이
야, 그렇지?”
사장이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얘기한다.
딱 봐도 억 소리가 날만한 고급시계였다.
“아, 저기, 그게, 음.”
미영이 몇 번 입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떨 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한다.
-땡
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미영이 살짝 고개를 들어, 사장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낸다.
“저, 사장님 엘리베이터 왔는데요...”
미영을 빤히 쳐다보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사장이 ‘쯧’하고 혀를 한 번 찬다.
“아, 나는 1층에 볼 일이 좀 있어. 그리고 양과장한테 이따 오후에 잠깐 내 방에 들르라고 하세요. 참나
사원관리를 이 모양으로 하나.”
“예.. 알겠습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는 미영.
힘없는 손으로 9층 버튼을 누르고, 모서리에 기댄 채 핸드폰을 꺼낸다.
그리고 액정을 보는 순간 미영의 눈이 갑자기 커진다.
[읽지 않은 문자 53개가 있습니다.]
53개.
미영이 하루 평균 받는 문자양은 50개는 커녕 30개도 될까 말까였다.
그런데 잠깐 오전 사이에 받은 이 엄청난 문자의 개수는 무엇이란 말인가.
평소 같았으면 기대하는 마음으로 문자를 확인했겠지만,
오늘은 불안함이 앞섰다.
미영이 그런 마음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 (싸이월드) 쪽지(New)
통화 : 연결하기 ]
“응? 이게 뭐야.”
미영이 관리하는 미니홈피의 메시지 알림 도우미 문자였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미영이 확인버튼을 계속해서 눌렀다.
[ (싸이월드) 쪽지(New)
통화 : 연결하기 ]
[ (싸이월드) 쪽지(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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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이월드) 쪽지(New)
통화 : 연결하기 ]
미영은 엘리베이터가 열린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문자 메시지에 몰입하고 있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적어도 지금 확인 중인 34번째 까지는 그랬다.
“유미영씨!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정신없이 문자를 확인하는 미영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열려진 엘리베이터 문 앞에 팔짱을 끼고 표독스럽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양과장이 보였다.
점심시간.
미영은 오전 내내 양과장의 눈치를 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먹고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한 쪽 손에는 300원짜리 싸구려 종이컵 커피가 들려 있었다.
미영은 아침에 확인한 메시지의 정체가 궁금했다.
똑같은 내용의 메시지.
점심시간에 확인해 보니 32개가 더 와 있었다.
익숙한 윈도우 로그인 화면에 엔터를 누르고, 곧 장 익스플로러 아이콘을 클릭한다.
그리고 주소창에 자신의 미니홈피 주소를 입력한 후 팝업 창이 뜨길 기다린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종이컵 끝 부분을 연신 이빨로 물어뜯고 있었다.
화면이 출력 되자, 미영이 '받은 쪽지 함'을 클릭한다.
-딸칵
[이름 내용 날짜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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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안 읽은 쪽지는 8페이지에 달했고, 한 페이지 당 10개의 쪽지가 있었다.
미영은 굳이 내용을 클릭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멍 한 모습으로 다음 페이지를 클릭했다.
-딸칵
[이름 내용 날짜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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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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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했지만 잠시 흠칫하던 미영이 이번엔 마지막 페이지를 클릭했다.
-딸칵
[이름 내용 날짜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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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황지연 7,8월 클럽음악 추천 당첨자 08.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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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은 그저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볼 뿐이었다.
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건지가 궁금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남자친구에 대한 정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 상태로 조금 시간이 지나자 마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극도의 불쾌함, 그리고 모멸감.
어느새 얼굴까지 시뻘게진 미영이 자신의 핸드폰 슬라이드를 거칠게 밀어 올렸다.
그리고 1번 버튼을 길게 누른다.
[연결 중 : 우리여보♥]
아직도 단축키 1번에 저장 되어 있는 남자친구의 번호였다.
-뚜우.... 뚜우.... 뚜우....
언제나 연결 음이 세 번 이상 넘기 전에 받던 남자친구였다. 그런데,
-뚜우.... 뚜우.... 뚜우.... 뚜우... 고객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십니다. 잠시 후 소리샘에 연결됩니다.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두 번을, 세 번을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미영이 힐끗 시계를 확인해 본다.
12시 58분.
점심시간이 2분 남았다.
시간을 확인한 미영이 재빨리 마우스를 클릭한다.
클릭한 곳은 쪽지의 ‘답장쓰기’였다.
[보낸이 : 유미영 받는이 : 김형석
이 나쁜 새끼야. 내가 실수 하나 했다고 그
렇게 꼬투리를 잡니? 이제 진짜 끝이야. 다
신 너한테 연락 안 할 거니까, 너도 이제 이
딴 유치한 짓 그만해. 평생 얼굴 볼 일 없었
으면 좋겠다.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보내기 │ 취소 ]
글은 1분도 안 돼 썼지만, '보내기'를 클릭하지 못 하는 미영이었다.
지우고 좋은 말로 다시 쓸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곧 있으면 양과장이 들어올 것이고, 이런 사소한 걸로 또 꼬투리를 잡을 게 뻔했다.
‘나쁜 새끼. 이제 끝이다 김형석. 잘 살아라!’
눈을 질끈 감은 미영이 오른 손 검지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딸칵
[쪽지가 발송 되었습니다.]
‘이걸로 끝이야. 그 놈도 생각이 있으면 더 이상은 나한테 그러지 못 하겠지.’
그리고 미영은 울기 시작했다.
퇴근시간.
미영이 부리나케 퇴근 준비를 하고 있다.
간단히 책상을 정리하고, 숄더백을 어깨에 걸치는 순간,
“미영씨. 잠깐.”
양과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되도록이면 퉁퉁 부운 자신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살짝만 고개를 돌려 양과장을 쳐다보았다.
“..네?”
“잠깐 나 좀 보고 가.”
자리에 앉은 채 두툼한 서류 뭉치를 책상에 두 번 탁탁 두드리며,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 양과장.
미영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온다.
......
“미영씨 요즘 왜 그래?”
“아.. 죄송해요. 제가 오늘 늦잠을 자는 바람에.”
“오늘 뿐이 아니잖아. 요 근래 계속 업무 상태도 안 좋고, 무기력하고, 대체 왜 그러냐고.”
“저기 ... 그건... ”
“소문 들어보니까,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뭐 어쨌다는 것 같은데, 그것 때문이야?”
“아니.. 뭐 그것도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그게..”
“유미영씨!”
“네, 네?”
“당신 어린애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도 구분 못 해? 내가 당신 때문에 사장님한테 욕을 들어 먹어야
겠냐고!”
“아.. 저.. 죄송합니다.”
“아까는 왜 또 질질 짠 거야? 가뜩이나 요즘 분위기 안 좋은데, 자꾸 이런식으로 나올거야?”
“아..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미영씨, 자꾸 내 눈 밖에 나는데, 조심해. 미영씨 한 사람 짐 챙기게 하는 거, 식은 죽 먹기니까.”
“...... 예, 알겠습니다.”
......
집에 돌아오는 미영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예전 같으면 남자친구에게 전화해 양과장 욕이라도 실컷 했으련만,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러기는커녕 남자친구 욕을 누군가에게 해야 할 판이었으니.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의 오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원망의 화살은 이내 자신에게 꽂히고 만다.
복잡한 마음은 표정으로 나타났고,
그런 미영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힐끗 쳐다보곤 했다.
미영에게는 그것조차도 스트레스였다.
......
미영의 상태는 버스 안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다행히 만원 버스 안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 표정이 미영과 비슷했기 때문에,
쓸데없는 시선에 시달리진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 틈새에 꽉 끼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큰 스트레스였다.
거기에 의도적인지, 실수인지 자신의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건드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미영은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참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
-이번 역은 푸른지오 아파트 앞입니다. 다음 역은 당산역 삼선 아파트 앞입니다.
어느새 어둠이 자욱한 저녁 7시.
아파트 앞에서 분리수거에 한창인 경비아저씨와 가볍게 목례를 주고받고,
미영은 자신의 아파트 동으로 걸음을 옮긴다.
중간 중간 아는 이웃들이 미영에게 인사를 해 오면,
미영은 그 때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엘리베이터앞에 도달한 미영이 '일단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버튼을 누른다.
-땡, 끼이익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자신의 집이 있는 13층 쪽으로 엘리베이터를 움직인다.
올라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미영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일단 목욕이 너무 하고 싶었다.
-땡, 끼이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와~ 1309호 언니다!! 언니 이제 집에 와?”
미영의 반 토막 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꼬마아이가,
미영을 보자마자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어. 지민이구나. 어디 놀러가니?”
미영 또한 이 아이가 1307호에 사는 9살짜리 꼬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미영을 1309호 언니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가끔씩 혼자 사는 미영의 집에 놀러와 컴퓨터 게임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다.
“응, 지민이 잠깐 4층에서 유리랑 놀기로 했어. 아 맞다. 근데 언니 있잖아~”
“응? 언니한테 할 말 있니?”
“응응. 오늘 언니네 집 문 앞에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었어.”
지민의 말에 미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스티커? 전단지 말이니? 너희 집엔 없는데 우리 집만 잔뜩 붙여놨니?”
지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응. 내가 잘 보진 않았는데, 아무튼 되게 많았어!”
“그래 지민아. 내가 보고 혼내줘야겠구나.”
미영이 지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지민이 해맑게 웃는 표정으로 미영을 한 번 바라보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후다닥 들어간다.
“언니, 그럼 나 갈께. 빠이 빠이~.”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까지 미영은 지민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집 쪽으로 몸을 움직이던 미영이 불현듯 두통이 사라진 걸 깨달았다.
‘지민이 덕분인가? 나중에 초콜렛이라도 사줘야지. 후후’
미영의 집은 좌측 복도 끝에서 두 번째로, 복도 중앙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위치였다.
미영은 잠시 복도 중앙에서 자신의 집 쪽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걸음을 다시 떼기 시작한다.
언뜻 봐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개수의 종이 쪼가리가 현관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진짜 오늘은 별 게 다 사람을 괴롭히네. 어떤 가게인진 모르겠지만 죽었다 너넨.’
가게 전단지 정도로 판단한 미영이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그런데 다가가면 갈수록 붙어 있는 종이가 일반 전단지와는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그것들이 손바닥 크기의 포스트잇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뭔가 이상함을 느낀 미영이 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
현관 앞에 도달한 미영이 잠시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에서 나는 떨림이 미영의 흥분상태를 반증하고 있었다.
바로 문이 문제였다.
아니, 문 앞에 붙어있는 종이들이 문제였다.
[죽어]
분홍색 포스트잇 종이에는 단지 이 두 글자만이 투박한 손 글씨로 쓰여 있었다.
[죽어][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죽어]
[죽어][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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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종이들이, 문손잡이 윗부분부터 미영의 머리가 닿을만한 곳까지 불규칙적으로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심지어는 초인종 버튼에 까지도.
개수는 적어도 200장 이상은 되어 보였다.
"......"
미영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내 극도의 흥분상태가 찾아온다.
“김형석, 이 개새끼!”
미영이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거친 말을 내뱉는다.
-찌익 찌익
그리고는 거칠게 포스트잇 종이들을 때내기 시작했다.
개수는 많았지만 포스트잇의 손쉽게 뜯어지는 특성상 얼마 가지 않아 종이를 다 뜯어낼 수 있었다.
미영은 잠시 쭈그려 앉아 뜯어낸 종이들을 한 데 뭉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양이 많았는지 뭉친 덩어리의 크기가 거의 농구공만큼 컸다.
“나쁜 새끼.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이게 무슨 망신이야.”
종이 덩이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다급하게 현관 손잡이에 열쇠를 꼽는다.
-철컥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다시 한 번 좌우를 살핀다.
그리고 복도에 자신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닫았다.
-철컥
“......”
문을 잠근 후, 미영은 잠시 문에 기댄 채 멍 하니 서 있었다.
도무지 형석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가깝지도 않은 자신의 집까지 찾아와 굳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 오타가 정말 사무치게 상처가 되기라도 한 걸까?
미영은 이제 형석의 행동에 무서움마저 느껴졌다.
“나한테...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거야!!”
소리를 지르며 종이 덩어리를 방 안으로 던지는 미영.
그리고는 거칠게 신발을 벗어 던지고 거실로 들어간다.
두통은 거의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씩씩 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미영이 식탁 앞에서 걸음을 멈춘 후 의자를 빼, 앉는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들어 아까처럼 1번 버튼을 꾹 누른다.
-고객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됩니..
“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핸드폰을 던져 버리는 미영.
몹시 상기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그러면서 미영이 다가간 곳은 컴퓨터 앞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목욕도 지금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컴퓨터를 켜야 한다는 생각 뿐.
미영이 거칠게 전원버튼을 누르고 화면이 넘어가기도 전에 엔터 버튼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배경화면이 전송 되자, 미영은 자신의 메일로 접속을 시도했다.
[받은 메일함 : (8459)
유미영님, 메일 정리가 필요합니다.]
미영이 입술을 꽈악 깨물기 시작했다.
-딸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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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했었다.
그렇지만 미영의 화가 머리끝까지 도달하는 데는 충분했다.
“김형석!!!!! 너 이 개새끼야!!!”
모니터에 대고 욕설을 내 뱉는 미영.
미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애꿎은 키보드만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미영의 눈에 익숙한 아이콘이 들어온다.
그리고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마우스로 그 아이콘을 더블 클릭한다.
[네이트 온 :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다름 아닌 메신저 프로그램이었다.
미영은 혹시라도 모르는 기대감으로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현재 대화 상대 목록
지윤희(한슘만 뙁이 꿔지롸 쉬죠우)
김영민([영민] 그래도 계속 가라)
박세진(객체지향선형대수)
김미례(‘커피’ 休)
이인애(킹빨라, 쩜뻥끼, 리보쌈, 우롹~)
이혜정(논문,, 논문..)
송성호(서울역에서 영화 촬영하는 강혜정 봤다!!)
김형석(고달픈 내 인생ㅡㅡ;)
양미정([미정] 파이팅!)
이기범(모든 것은 ‘있음’과 동시에 ‘없음’이다)
이류학(피카츄 전기세 내는 소리하고 있네)]
접속 되어 있는 친구 목록을 확인 하던 미영의 눈에 무언가가 확 꽂혔다.
......
[ 김형석 (고달픈 내 인생ㅡㅡ;)]
......
출처 : 웃긴대학 공포게시판 '건방진똥덩어리'님 作 '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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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바꿈
잿빛강탈자 - OU_WK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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