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랑짱짜장짱짱짱!
본디 저 종은 딸랑딸랑이여야 하건만..
나: 어서오..
아재: 어 담배
나: .. 어떤담배 드..
아재: 에쎄
이때 본능이 귓가에 속삭였다
'이 사람은 미륵이야'
그래, 내 마음을 읽고 있는게 분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미륵이 아니였다
에세는 종류만 십여가지라는 것이
나의 부덕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였다.
나: 어떤 에쎄요?
처음으로 말을 끝맺었다는 환희에 젖어
HD 고음질 상투스가 달팽이관을 울리는듯 하였다.
허나 아재는 말이 없었다.
궁금해 돌아보니 아재는 퇴계이황 쎈세이를 한땀한땀 세고 있었다.
'아, 이 사람의 Order는 이미 끝났구나.'
지금, 때 아닌 새벽 편의점에서 숨막히는 두뇌전이 펼쳐져 버렸다.
자기 꼬리나 깨물고 빙빙 돌면서 놀던 나의 뉴런들이
놀이를 멈추고 인접한 다른 뉴런의 뺨을 격렬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에세는 에세체인지 1미리와 스페셜골드 1미리, 에세 원, 에세 프라임, 그 외 잡 순으로 많이 나간다.
대개 이 넷중 하나를 입양하므로 확률은 25퍼다.
아재에게 무사히 원하는 담배를 주기에는 너무 낮은 확률이다.
나는 확률을 줄여보기로 했다.
나: 1미리요?
위에 열거한 담배중에선 프라임만이 1미리가 아니다.
나의 이 질문으로 확률은 33퍼까지 오를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단박에 이 불가사의를 해결할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보던 유튜브를 마저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희망이란놈은 유리구슬 같아서
조그만 충격에도 산산조각 나고 만다.
아재: 스뻬샬골드
....
스페셜 골드는 3미리와 1미리 두가지로 나눠져 있다.
왜 이 아재는 한번에 요구사항을 말하지 못하는가!
이쯤 되니 나란놈은 전생에 분명 큰 죄를 지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난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을때
시장에서 사탕이나 훔쳐다 먹던 못된 아이였을것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확률이 50퍼로 높아졌다는 것.
나에겐 더이상 질문할 정신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낫이너프마나가 내 머리위에 떠있겠지.
나는 반반의 확률에 이 심리전을 끝낼 도박을 걸기로 했다.
'칼라가 나를 돌봐주길.'
1미리와 3미리중 곱절은 잘나가는 1미리를 조심스레 집어 포스기로 찍었다.
아재는 곱게 접힌 퇴계이황 쎈세이를 내밀다 말고 날 쳐다봤다.
좋지않은 예감이 들었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아재: 이거말고 저 누런거
분명해졌다.
'나는 이 자를 이길 수 없다.'
이 자는 분명 오목 준프로 이상의 두뇌를 갖고 있다.
그의 뇌속에서 어떤 폭풍의 스톰이 요동치는지
나같은 시정잡배 무지렁이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것이다.
저 접어서 준 퇴계이황x5을 보아라!
일일이 한땀한땀 펴서 세놓고
다시 손수 접어서 내밀다니.
혹시 이 행위에 무언가 중대한 의미가 있진 않을까
덜컥 겁이나서 손이 떨려왔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다.
끝이 보인다.
이제 에세 스페셜골드 3미리를 그에게 입양시키기만 한다면
평화롭고 고요하던 내 세상에 잔잔한 파동으로만 남을것이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래,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조심스레 꺼냈던 1미리를 도로 집어넣고,
심호흡을 하며 3미리를 꺼내 들었다.
'고지가 눈앞이야.'
바코드리더기를 들고 침착하게 바코드를 찍는다.
'다왔어, 다왔다고. 조금만 힘내자.'
퇴계이황 쎈세이를 건네받아 다섯장임을 확인했고
포스기를 두드려 계산을 끝마쳤다.
'후, 바로 눈앞이야. 여유를 갖자. 조급해 하지 말자.'
나는 끝났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프틸아민, 니켈, 벤젠 외 기타 유해물질의 짬뽕들을 건네주었다.
이때 이미 내 뉴런들은 퉁퉁 부어오른 뺨을 부여잡고 다시 자기의 꼬리를 찾고있었다.
설산의 고지 바로 밑 중턱에 앉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성취감을 아는가.
감히 비할 수 없겠지만 마음은 이미 에베레스트 고지 바로 밑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말했듯이, 희망은 유리구슬이다.
고지의 바로 밑이라 하여도 정상에 오른것은 아니였다.
아재: 현금영수증
나는 고지를 눈앞에 두고 산 입구까지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방심한 나머지 깜박한 것이다.
이 사람의 범상치 않은 두뇌는
한번에 요구사항을 말하지 않는다는것.
나: ...
완전히 넋이 나가 간신히 현금영수증을 떼어주고 나니
아재는 두뇌싸움에서 자신이 압승했다는 걸 입증하듯이
승자의 오만한 시선으로 나를 한차례 주시한 뒤
품위있는 걸음걸이로 문을 나갔다.
종은 여전히 요란하게 울었다.
아재는 떠났지만, 아재에게 할퀴어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했다.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며 저려왔다.
이 편의점의 수문장으로 일해온지 어언 반년이 넘었지만,
이런 뼈아픈 패배감은 처음이였다.
나의 하늘 밖, 천외천의 경지가 보였기에
다음에 아재가 다시 온다 하여도
나는 그의 발끝에도 닿지 못하리라는 것을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달은 찬란히 빛났고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왔지만
갈기갈기 찢겨진 내 대뇌피질과
그 안의 구피질을 감싸주진 못했다.
패배감에 젖어서
비닐 크롤라이드, 비소, 카드뮴,
그 외 기타 유해물질들을 태우기에
더 없이 좋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