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조선군에 대하여
일본의 조선군 주둔은 청-일전쟁 이후부터 시작해서 러-일전쟁을 거치며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일본은 을미사변의 선후처리를 위해 서울에 왔던 고무라 주타로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 사이에서
(고무라-베베르 각서)를 교환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일본의 전신선 설치와 거류민보호를 위한 명분으로
일본군은 조선주둔을 러시아로부터 양해 받는 데 성공했다.
또한 양국은 1896년 6월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에서 양국은 동 수의 한국 주둔군을 주둔할 권리와 필요할시
한국으로 출병할 권리를 상호간에 비밀리에 인정했다. 다만, 일본은 동수 원칙에 따라 이전에 비해
절반으로줄어들어 4개 중대의 병력과 200여명의 헌병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1915년까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1년에서 2년씩 교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런 러-일간의 교섭을 1904년 2월 6일 중단하고, 대(對)러 개전을 내부적으로 결정지었다.
이어 2월 9일에 인천만 앞에서일본함대가 러시아함대를 기습-격파시킴으로써 전쟁에 돌입하였다.
(다만 선전포고는 2월 10일)
이런 와중 2월 8일에 일본군 23여단장 기코시 소장이 이끄는 보병 4개 대대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파견대가 결성되었고 인천에 상륙, 서울에 입성하였다. 또한 2월 5일에 일본에 동원령이 발포되어
일본군 주력 사단들이 한국에 속속 상륙하였다. 러일 양국의 개전에 대외중립을 선언했던
한국정부의 의견은 무시되었고, 일본군의 무력점령에 저항하지 못하고
2월 23일 한일의정서에 조인할 수밖에 없었다. 한일의정서 4조에는
일제의 필요에 의해 무제한적 군사적 점령이 가능하며 대한제국 정부는 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충분한 편의를 제공할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전 국토가 일본의 군사적 침략에 노출되었다.
조선(주차)군은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조선군은 한국주차군으로 명명되었는데, 1904년 3월 20일 일제는 도쿄에서
한국주차군의 편성을 완결 짓고 한국주차군 사령부를 편성 4월 3일에 서울에 파견하였다
한국주차군은 한일의정서에 의거하여 한국에서 무제한적인 점령과 협조를
얻어내었다. 한국주차군은 한국에서의 치안을 유지하고, 작전군의 배후에서 제반 설비를 경비하며
병참을 담당하며 확대점령지의 수비를 위한 부대로 군사령부를 휘하 보병 6개 대대 반, 병참사령부,
임시군용철도감부, 주차전신대, 주차헌병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초기에는 대동강 이남을
관할하였으나, 1904년 6월 전역이 확대됨에 따라 한국전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1904년 7월 주차군 사령관은 한일의정서에 의거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키며
대한의 황실을 보위하기 위하다는 구실로 함경도에 군정을 시행하였고
서울과 그 부근에 군사경찰제 시행을 포고하면서 서울의 치안권이 일제에게 사실상 피탈되었다
군정의 확대, 치안권의 확보로 말미암은 헌병대가 속속 편성되어 배치가 시작되었다.
또한 전신선과 철도의 보호를 위해 지역 곳곳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주차군 휘하 헌병대, 임시군용철도감부, 주차전신대 등이 경찰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은 1905년 1월 6일, 주차군 사령관이 한국정부에 서울과 그 부근의 치안권을 주차군이 집행할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동시에 군율을 한국인에게 적용하겠다는 것을 고시함으로써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여기에 1905년 1월 한국주차군 예하에 압록강군이 임시로 편성되어 조선-만주 접경지대까지
관할하게 되었으나, 러일전쟁의 확전으로 주전선이 만주 일대로 이동하자
압록강군은 4월에 만주군총사령부 예하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이와 같이 러일전쟁기의 한국주차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이 후방지원이라는 명분하에
한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일본군은 식량을 가능한 한 현지에서 징발하여
충당하고자 했기 때문에, 한국주차군은 물자와 인력, 우마 등을 한국인들에게서 강제로 징발하여
많은 부담을 주었다. 강제적으로 체결한 한일의정서에 포괄적으로 명기한 조항에 의거한다고는 하나,
주권국인 한국을 완전히 무시하기 시작하였고 무제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한국주차군의 방식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한국주차군은 2개 사단 혹은 1개 사단을 지속적으로 교대함과 동시에
임시 파견대의 규모로 교대로 주둔하는 형태로 계속 유지되었다. 초기에는 함흥에 본부를 두는
13사단과 평양에 사령부를 둔 15사단을 주차시켜 러시아를 견제하고 남부에는 보병 30여단을
배치하였다. 또한 예하에 야전병기창, 군용 목재창, 제 1-2 한국주차병원,
진해만 요새 사령부, 영흥만 요새 사령부, 한국 주차헌병대가 속해있었다.
이후 한국에 초대통감으로 부임한 이토는 한국내에서 숫적으로 지속적으로 늘어나 권한이 강해지는
헌병대를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헌병대가 한반도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군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는 일본 고문(顧問)경찰을 필두로 하는 민간경찰력을 확충하여
치안을 유지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통감 재임기간 동안 이토는 대한제국 내부 소속인 경무서(도 단위) 산하에 경무분서 등
조직을 확대하능 등 조직을 확충하였다. 반면에 한국주차군 예하 헌병대는
1906년 10월 29일 한국주차헌병대 대신 제 14헌병대로 개칭, 축소되었다.
또한 2개 사단을 주둔시키던 것을 군비절감으로 15사단을 복귀시키고 13사단만을 주둔시킨다.
13사단은 사단 사령부와 1개 연대를 제외한 병력을 서울 이북에 배치했으며,
남아있던 헌병대 284명도 전주, 분산, 청주, 인천에 있던 59명을 제외한 병력이 서울과 서울이북에 배치되었다.
한국주차군은 군비절감 때문에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지만 한반도 북부에는 여전히 많은 수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러일전쟁 후에도 러시아가 가장 위협이 되는 가상적국 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 말기 1945년 1월까지 한국주차군과 조선군의 방침은 대러, 대소 작전이었으며
1월 이후에는 주로 대미전을 대비한 배치로 변경된다.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고 8월 1일자로 대한제국의 군대 약 8,700여명의 해산이 결정되자
일제는 한국인의 반발을 예상하고 조약 체결 당일 날 보병 제 12여단을 편성하여 추가로 조선으로 파병하였다.
파견된 12여단은 주로 부산, 서울, 평양간의 철도 인근에 배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산군인 일부가
참여한 의병항쟁의 급격한 확대를 저지하는 것에는 실패하였다.
이에 한국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백작, 조선 제 2대총독)는 의병투쟁을 최대한 단기간내에
억누르고자 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주차군 내에 9월 26일 임시파견기병대가 편성되어
서울 이남에 배치하였고 12월경에는 병력을 분산배치하여 한국 곳곳으로 한국주차군을 파견하였다.
또한 헌병대가 개편, 축소된지 1년만인 1907년 10월 제 14헌병대를 다시 한국주차헌병대로 개칭하고
병력을 대폭 증강시켜, 1908년에는 헌병분견소가 460여 개소, 파분견소에 파견된
헌병은 총 2,074명으로 증가하였다
(일본 헌병, 1935년, 출처 : 위키피디아)
그러나 의병전쟁이 지속적으로 격화됨에 따라, 통감부는 1908년 본국에
병력을 추가 파견할 것을 요청하고, 헌병보조원제도를 채택하며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중심으로
헌병, 경찰, 군대 등 지휘권을 통일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 중구난방으로 의병과 전투를 벌이던 것이 정리되어
주차군사령부와 헌병대가 주로 전투를 담당하고 경찰은 정보수집과 지방치안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다.
한국주차군은 한국인을 대거 참여시키는 헌병보조원제도와 더불어 언론보도를 강력히 통제하기 시작했고
이전에는 강경한 탄압 일변도의 작전에서 의병포로를 처형하지 않고 도로공사에 투입하는 등의 귀순정책을
적극 실시하고 현상금을 거는 등 유화전략도 병행하기 시작하였다.
헌병보조원 제도로 충원된 병력과 의병의 피해 증가, 언론 통제, 유화책, 경찰의 치안유지활동 적극적 참여
등으로 강원도, 경상북도의 북부지역, 경기도, 황해도 일대의 의병투쟁의 열기가 식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지방의 의병활동은 1908년 하반기에 들어서도 활발했다. 호남지방에서
의병투쟁이 지속될 수 있었던 원인은, 한국주차군은 북부, 중부지방에 집중되어 호남에 주둔하는
병력이 적었고 (또한 경부선 일대에 많은 병력이 주둔했기 때문) 적은 병력이 주둔했기
때문에 한국주차군은 호남지역에서는 장기작전보다는 단기작전과
시위적 행동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남의병이 통치기관의 통제가 약한 곳을 주로 공격하여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점, 대부분의 호남의병이 자신의 출신지역을 중심으로 확고한 지지기반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주차군은 1907년 12월 남부수비관구를 제도화하여 1909년 5월 4일 남부지방에 주둔할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를 편성하였다. 사령부 산하에 2개 연대를 편성하였다.
이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가 호남지역에서 ‘남한대토벌작전’을 시행하였다. 남한대토벌이 이전에 비해
성공적이었던 것은 이전에 비해 장기적, 대규모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주차군은 대규모 병력을
일시에 동원하여 호남의병을 다른 지방의 의병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
호남의병을 토끼몰이 하듯 몰아 격파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또한 한국주차군사령부의 방침대로
강력한 탄압 이외에도 귀순정책을 행함으로써 작전 말기에는 전사한 의병보다 항복한 의병의 숫자가
12배가량(전사 57명, 항복 708명) 많게 되었다. 이로써 국내에서의 의병전쟁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다만 아직 호남 이외에서 소규모, 산발적인 의병투쟁은 벌어지고 있었다.
이후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한국’이 ‘조선’으로 바뀌어 조선주차군사령부가 되었지만 편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순환 주둔하던 1개 사단 규모의 조선주차사령부와 임시파견대가 주둔하던 것에서
1915년 12월 이후 일본군 19사단과 20사단이 조선에 상주하여 주둔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른바 ‘조선군’의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이들은 일제 하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물리력으로 조선민중을
압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주차군(조선군)은 지휘권이 두 갈래였다. 군령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육군대신의 지휘를 받았지만,
조선 통치와 관련되는 부분에 한해서는 조선총독의 지휘를 받는 조직이었다.
따라서 조선총독은 조선주차군에 대해 출동명령권을 보유했으며 필요에 따라서 조선주차군을 만주 등지로
파견할 수 있었다. 이는 대만의 방어에 주력했던 일본의 다른 식민지 주둔군인 대만군과는
확연히 다른 위상으로, 조선주차군은 일본의 생명선인 조선을 방어하기 위한 필요가 있다면
대륙침략의 선봉부대격이 되는 핵심적인 최전방 부대가 되었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에도, 의병 잔존세력은 황해도, 강원도 남부,
경상북도 북부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주차군은 일대에서 집중적인 탄압작전을 실시함으로써
의병의 잔존세력이 붕괴되어 국내에서의 의병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주차군은 의병전쟁이 종결됨에 따라, 조선주차군을 치안유지 명목으로 분산 배치하던 것을
집중 배치로 전환하였고 예하 헌병대의 파견소와 출장소를 대폭 증가시켜 일상적인 치안유지 업무를
군대에서 헌병경찰에게 완전히 이양하였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2개 상주 사단을 주둔시킨 이유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에 주둔하며 만주침략, 대러 방어전 등의 임무를 맡아야 할 조선주차군의 예하 사단이 2년마다 교체된다면
임무에 완벽히 준비하기 어려울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주차군에 상주 2개 사단이 주둔하게 되었다.
(대만군과 비교되는 것이 대만군은 1935년 기준, 대만수비대사령부 예하 2개 연대,독립 산포 1개대대,
고사포 1개 연대, 요새사령부 등으로 구성되어 조선군에 비해그 숫자가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18년에는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조선군사령부로 변경되었고 19, 20사단 이외에도 임시한국파견대,
헌병대, 진해만 요새사령부, 영흥만중포병대대, 영흥만요새사령부, 조선육군군악대, 조선육군창고,
조선군사병원, 조선군사감옥 등의 조직이 갖추어졌다.
조선군사령부의 주요구성원인 헌병은 헌병장교가 사실상 경찰계급에 준하는 복무를 하도록 조치하는 등
사실상의 경찰조직으로 운용되었다. 1918년까지 헌병은 약 8천명이었던 것에 반해 경찰은 약 6천명이었다.
다만 일제 중앙정부는 재정압박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헌병대를 축소하고 경찰 중심으로 편제를 바꾸라는
요구를 했지만,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는 현재의 편제와 인원을 유지하겠다며 이를 거부하여
헌병경찰제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정부는 일본에서 6개 대대 의 육군병력과 400명의 헌병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군과 헌병의 배치가 비교적 취약했던 곳에 추가적으로 배치하고 이전에 집중 배치했던
조선군을 분산 배치하였다. 이 시기 보병 79연대 소속의 부대가 4월 15일에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일으키는 등,
조선군사령부는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물리력으로작용하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에서의 통치방침을 조선특별통치주의에서 비롯된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점진적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한 문화통치로 변경하였다.
(내지연장주의는 1895년 대만을 획득한 일본이 처음으로 얻은 식민지를 어떻게 통치하느냐에 대한 논의 중,
외무차관이었던 하라 다카시의 정책안이었다. 다만, 하라 다카시의 주장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는 대만에서 내지연장주의 대신 식민지적인 통치를 확정지었다.
내지연장주의는 식민지를 본국의 연장으로 보아 같은 법령과 정책을 시행하는 정책이나,
일제는 점진적 내지연장주의를 주장해, 식민지를 동화시키고,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선군사령부에도 변화가 생겼다. 관제가 개정됨에 따라, 조선총독은 조선군사령부에 대한
출동명령권이 아닌 출동요청권을 보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한,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로 전환되면서
일상적인 치안업무 등에 직접 관여하던 헌병의 역할은 군사경찰로 국한되었다. 이로써 경술국치 이전부터
시행되던, 헌병경찰은 대부분의 조선 땅에서는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일제는 헌병경찰의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1면 1주재소 방침을 세우고 부족한 경찰은 8,000여명의 헌병 및 헌병보조원으로 보충하였다.
또한 헌병은 여전히 도지사 혹은 경찰서장 등의 요청이 있을시, 치안업무에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강력한 물리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보통경찰로 전환이 이루어짐에 따라,
조선군사령부예하의 조선헌병대의 규모는 축소되어, 5개 헌병대본부, 600여명 정도로 축소되었다.
조선군의 편제에도 변화가 생겨, 분산배치되었던 부대를 집중배치 함과
동시에 19사단 예하에 국경수비대 3개 부대, 20사단 예하에 2개 부대를 편성하여 국경수비 업무를 헌병대에서
조선군사령부 예하 상주사단이 이어받았다. (배치표에 의하면 국경수비대는 약 2,000여명)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와 분리되고 헌벙경찰제도가 축소되자,
조선군사령부는 일제의 조선통치에 관여하기보다는, 제국주의적 침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운용되었다.
이것은 1920년과 1931년에 명확히 나타난다.
1920년대 초반 만주 일대, 특히 간도에서 항일열기가 고조됨에 따라
조선군사령부는 이런 움직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특히 1920년 8월 15일, ‘경성회의’에서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확정지으면서 공격을 결정하였다. 다만, 이시기 일본 외무성이 전면에서
봉천군벌과 외교교섭을 벌이고 있었고 봉천군벌 또한, 일제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독립군의 감시와 해산 등
일본 측의 요구를 들어 주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군사령부의 무력개입의 명분이 없었다.
이에 조선군은 적백내전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일본군 파견대가 제안한 마적을 이용한
치안교란과 그것을 빌미삼아 치안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개입한다는 계획을 받아들여,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훈춘사건을 빌미로 조선군은 19사단 소속 보병 37여단을 파견하여 간도 일대의 조선인을 학살하고
조선인의 가옥과 자산을 불태우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193력1년에는 조선군사령부는 관동군과 연대하여 독립비행중대를 봉천에
파견하여 만주침략을 보조하거나, 봉천과 길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세력을 제압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특히 관동군 점령지역이 확대되어 점령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세력의 저항이 계속되자 하얼빈 근방의
북만주에 조선군 19사단에서 38여단을 편성하여 1931년 12월부터 1932년 10월까지
항일무장세을 탄압하였다. 또한 동만주 일대에서도 항일유격대가 활동하면서, 조선 북부의 치안에도 악영향을
끼치자 조선군은 1932년 4월 19사단에서 간도임시파견대를 편성하여 동만주일대에 주둔시켰다.
두시기의 결정적인 차이는 조선군이 1920년대에는 외무성의 지시를 받아들이면서도 외교노선 아래에서
공작을 꾸미거나, 조선총독부와 긴밀이 협력하여 방침을 결정지었으나 2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군사령부
또한 다른 일본군처럼 외무성 등, 중앙정부의 방침을 직접적으로 거부하는 등 폭주상태에 돌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20년대에는 대륙침략을 위한 전진기지였던 조선군사령부가 1930년대에는 관동군의 강화되자
조선군은 전진기지 역할에서 안정된 후방기지로서 관동군을 지원, 보조하는 역할로 변경되어 위상이
변하게 되었다.
이어 1937년 7월 일제가 중국본토를 침략,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때, 조선군 20사단과 조선군사령부
예하 1개 육군 비행중대가 동원되어중국 본토 천진 일대에 투입되었다.
중국 본토에서 전선이 형성됨에 따라, 일제 치하 식민지 조선도 전쟁에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군사령부도 이런 흐름 속에서 조직이 확대되었다.
진해만, 영흥만 요새사령부에 이어 나진에 요새사령부가 신설되었고,
제 2 비행사단 사령부와 예하 비행부대가 증설되었다.
이런 편성에서의 변화이외에도 조선군은 문화통치 이후, 조선 통치에 관여하지 않던 것에서
일상적으로 관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조선군사령부는 1937년 11월에 국방사상보급부를 설치하여
조선인들에게 시국인식과 국방사상을 보급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1938년 1월 보도반이 신설되고
소장이 책임자로 부임함에 따라 조선군사령부는 조선민중에 군민일치를 강요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이어 조선군의 주도하에 1938년 7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에 조선군사령부 보도반 등 장교들이 실무자로 대거 참여하여
일제의 대중동원운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물자동원과 인력 동원을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 사령부 편성지침에 국가총동원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는 규정을 명시하였고 물자동원을 계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39년 11월 설치된
조선총독부 기획부의 책임자(장성급) 및 과장 이하 직원들도 조선군사령부에 속해 있는
육해군 장교로 충원하여 식민지 조선에서의 동원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군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군의 각 사단의 편제가 4개 연대 체제에서 3개 연대로 개편되었고 이후 남은 보병 74, 77연대와
기타 병력으로 1943년 5월 평양에서 30사단이 편성되었다.
3개사단체제가 됨에 따라, 작전지역도 변경되었는데 19사단은 함경북도, 30사단은 평안도,
황해도 함경남도를 담당하고 20사단이 이외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어 전황이 변화함에 따라, 조선군사령부 예하 사단이 남방전선으로 이동하였다.
1942년 후반 들어 남방전선이 확대되고 병력수요가 폭증하자 20사단이 뉴기니 방면으로,
30사단은 1944년 5월 필피핀 민다나오 섬으로,
1944년 2월에 신설된 조선군 예하 49사단은 6월에 버마전선으로
19사단은 11월에 필리핀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전황이 급속도로 악화됨에 따라, 조선군의 임무가 관동군을 보조하고, 소련군을 견제하는 것에서
대미결전체제로 바뀌었는데, 특히 1945년 들어 한반도 연안의 감시태세와 제주도 방어문제가
조선군사령부의가장 중요한 현안이 되었다.
어쨌든 1944년 후반이후 일본 본토가 전장이 되면서 일본 대본영은 1945년 1월 20일오키나와를 제외한
황토, 즉 제국본토를 중심으로 본토결전에 본격적으로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런 방침이 정해지자 1945년 2월 27일 조선군은 조선군관구사령부와 제 17방면군으로 분리되었다.
이중 조선군관구사령부가 물자 및 인력 동원, 방어, 교육, 병참을 주된 임무로 하는 부대들로 구성된 반면에
제 17방면군은 대미결전에 임하는 전투부대였다.
이후 조선군관구사령부는 막판 총동원을 위해 중앙, 지방, 지구 연락위원회를 조직하고 말단 행정단위까지
조직을 확대하여 인력과 물자를 최대한동원하고자 하였다. 또한 17방면군은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세 차례에 걸쳐 호남지방과 제주도를 중심으로 전력, 시설을 보강하여 본토결전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동원되기 시작했다.
다만, 조선군사령부는 전황이 악화되기 이전, 전쟁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1932년부터 조선인 징병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고 1935년부터는 지원병제 실시에 대해 건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1938년 2월 23일, 칙령 제 95호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었다.
같은 해 12월 400명이 모집된 이후 1943년까지 16,830명이 지원병으로 복무하였다.
또한 조선군은 조선총독부에 지속적인 교육의 쇄신을 촉구하였다.
그들은 징병인원의 확대를 위해 1938년 4월부터 보통학교를 확충하고 관립사범학교를 증설하여
1960년을 목표로 보통학교 졸업생을 징병적령자의 78%까지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며
조선총독부에 요구하였다.
조선군의 교육에 대한 필요성 제기는 1938년 4월부터 제3차 조선교육령이 반포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군사적 목표를 가지고 황국신민을 육성하겠다는 취지에서 이전까지 국민을 강조한 것에 비해
황국신민이 교육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1942년 10월 조선총독부가 <조선청년특별연성령>을 발표함으로써
17세 이상 21세 미만의 조선인 남자를 대상으로 일본어 교육과 정신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한 것과
동년 12월에는 1946년부터 의무교육제를 실시하게다고 발표한 것으로 더욱 명확해졌다.
이런 와중에 1945년 본격적인 징병제가 시작되었다. 1944년 1차 징병검사자 23만여 명 가운데
현역병에 입대한 사람은 육해군 합쳐 5만 5천여 명에불괴했으며 나머지는 보충병 판정을 받았다.
이어 1945년 징병검사 대상자도 22만여 명에 달했다. 이외에도 근무대와 자활요원, 농경근무요원제도가
운영되었다. 근무대는 각종 군사시설을 경비하고, 진지구축과 화물수송, 비행장, 항만, 도로 등을
건설하는 조직이었고 자활요원과 농경근무요원은 농경지를 개척하고 고구마를 주로 생산하여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이와같이1945년 징병 조선인의 대부분이 현역병이라기보다는
노동자로 징용되는 편이었다.
(또한 포로감시원제도도 운영되었다)
용산기지에 관한 간략한 이야기
경성의 부도심이라고 할 수 있었던 용산은 나남(청진의 일부), 진해의 경우처럼
일본이 건설한 군사도시로 출발했다. 개항 이후 용산의 가치에주목한 이방인은 뮐렌도르프였지만,
용산에 대한 본격적인 탐욕을 드러낸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현장을 답사한
육군장교의 제안을 받아들여 1883년 용산을 개시장으로 하고 일본인 거류민들을 정착시켰다.
이후 용산이 급속히 팽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일본군 군사기지가 위치하게 된 후부터이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군용철도를 서둘리 완성하고자 대러 선전포고 약 2주일 후인
2월 21일 육군임시철도감부를 조직하여 지금의 용산역 동쪽 광장에 3,940평에 달하는 규모의 건물을 만들어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6개 대대병력을 투입하여 건물을 완성시킨 일제는 한일의정서에 의거하여
용산역 일대를 군사철도 운영의 중심지로 삼았고 용산에 군사기지를 확보하였다.
이후 1945년까지 용산역은 일제의 군수물자, 인력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일제는 용산 일대의 300만 평을 수용하여 대규모 군사기지를 구축할계획을 세웠다.
당시 용산에는 가옥이 1,176호 등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일제는 반발을 억누르고 헌병을 동원하여
평당 30전을 보상가로 책정하고 1906년 4월부터 기지 건설을 강행하였다.
한국주차군은 1906년 5월 11일 사령부 예하 경리부에 임시건축과를 개설하고 용산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또한 용산출장소를 개설하여 용산의 군사기지 건설 준비를 진행시켰다.
이후 한국 주차군은 1909년 10월 1일까지 군사령부, 사단 사령부, 보병연대 1개, 기병 1개 중대,
야전포병 1개 중대, 군사병원, 창고, 병기창, 군사감옥, 군악대를 용산기지에 주둔시킬 건축물을 완성시켰다.
다만 일본군 사단편제에 속해있던 공병부대도 용산기지에 배치되었어야 했으나
주차공병대는 중대 규모에 불과해서 별도의 병영을 가지지 않고 보병연대용의 병영을 빌려 주둔하였다.
한국주차군이 다른 연대에 배속하여 지방에 주둔시키지 않고 공병 중대를 용산기지에 배치한 것은
유사시 서울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한국인들의 대일본 봉기 때 한국인들이 이용할 성벽이나 방어시설을
폭파할 필요 때문이었다.
1920년대 조선군사령부로 개편된 이후에는 용산에 조선군사령부와 20사단 사령부가 주둔 했다.
이후 용산기지에 사단의 편제에 맞는 산하부대가 편성되었다. 기병중대와 야포병중대가 연대규모로 확대되었고
공병 중대도 대대규모로 편성되었다.
1921년 당시 20사단 중 보병 39여단 산하의 78연대, 보병 40여단 산하의 79연대, 공병 20대대, 기병 29연대,
야포병 26연대가 용산기지에 주둔하게 되었다. 늘어난 편제로 용산에 주둔하는 장교가 늘어나자
일종의 장교클럽인 해행사가 설치되었고 일본군을 위한 신사가 세워졌다.
이후 태평양 전쟁 시기, 용산기지에는 보충대가 급격히 증가하여 늘어나는
병력수요를 감당하고자 했다. 또한 전투부대는 대미결전과 대소결전을 위해
한반도 북부와 해안가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용산에는 신설 320사단, 박격포 30대대, 고사포 152대대,
12공병대 사령부, 조선포로수용소, 경성육군 구금소, 육상근무부대, 특설육상동무대 등 비전투 부대나
신설부대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 특히 보충대는 조선인 청년들에게 1,2 주간 단기 군사훈련을 시킨 후
전투병이 아닌 노무자로 활용하기 위한 조직이었으며 용산기지에서 가장 많은 보충병이 배출되었다.
이후 전황이 피폐해짐에 따라 병참부, 장갑열차부대, 특설경비 공병대,
각 부대의 사령부, 연료부, 화물창 등 다양한 조직이 용산에 위치했다.
이후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과 제 17방면군사령관은 진주한 미군에
정식으로 항복하였다. 미군은 9월 10까지 서울을 떠나 이남으로 이동하도록 일본군에 지시하였고,
17방면군사령부는 9일 오후에 용산을 떠나 대전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의 용산기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