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프랑스 화가 장 브뤼트랑(Henri Jean, Brutrene 1926~1960)의 최후의 작품.
이태리 태생의 장 브뤼트랑은 프랑스로 유학와서, 알베르 베스나르를 처음 만나게 된다.
글린드 알베르 베스나르는 인상파 여류화가로 유명하며 장 브뤼트랑의 부인으로 알려졌다.둘
은 프랑스의 국제적인 미술학교로 이름을 한창 날리던 소마리뜨 에꼴 드 보자르에 입학한다.
소마리뜨 에꼴 드 보자르를 졸업한 뒤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에도 장모의 반대가 심했지만
설득끝에 첫 딸을 얻는다. 파리의 대 극장, 병원 등의 프레스코화를 제작하여, 명성을 얻었고,
이후에도 수채화, 유화, 판화, 파스텔 등 회화의 전 쟝르에 능하였고, 큰 성공을 거둔다.
라만다 화가 협회에서 너무 잔혹한 그림을 그린다는 혹평을 듣게 된다.
고민끝에 1955년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믿기 힘들게도 1958년에는 에꼴 드 보자르의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과
기근으로 일자리를 잃은 장 브뤼트랑은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근근히 가족들을 부양한다.
힘든 생활도 물론이거니와 밥을 살돈이 없을정도로 아주 가난 해졌고, 그
들의 딸은 벙어리였다.
어느날 장 브뤼트랑이 집에 들어와보니 딸아이가 입가에 피를 묻힌채 자신에게 왔고,
놀라서 부엌쪽을 보니 아내가 죽어있었다. 칼에 난자당한채. 그 순간 브뤼트랑은 자신의 유화용 캔버스를 가져와 딸아이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죽은 아내의 앞에서 딸아이를 모델로 한 최후의 그림은 완성된다.딸아이를 깨끗히 목욕시키고, 브뤼트랑은 그림을 근처 농기계창고에 숨긴 뒤 경찰에 신고를 한다. 경찰이 시신을 부검해본 결과, 폐가 없다는 점이 발견되었고. 나아가 창고에서 이상한 작품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브뤼트랑은 용의자로 지목되어 정신이상자로 낙인이 찍히고 구속당한다. 브뤼트랑은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으나 경찰의 목격, 증거 그리고 유족들의 증언에 의해 사형을 당하고 만다.
16년이 흐른 1976년, 경찰은 사건의 진범으로 브뤼트랑의 장모를 긴급 체포하게 된다.
당시 살해당한 아내의 상흔이 일반 부엌칼이 아닌 낫일것이라는 추측에 의해서였다.
경찰은 평소 브뤼트랑이 그린 작품중에는 장모가 항상 낫을 들고 있었다는 근거.
그리고 장모의 집에서 딸의 출생신고서, 딸과 사위에 대한 증오를 남긴 일기,
결정적으로 사람의 폐를 먹이면 벙어리병이 사라진다는 메모를 통해 장모를 추궁하게 된다.
장모는 자백을 하게되지만, 프랑스 현지법에 의해 공소시효가 10년임으로 불가피하게 처벌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대통령은 샤를르 드 골 (Charles Andr Marie Joseph De Gaulle).
대통령은 이 너무도 잔혹한 사건에 대해 대통령 령으로 장모에 무기 징역을 선고한다.
1984년, 이 작품은 프랑스 자선단체 경매시장에 나와 중동재력가에 1400만달러에 낙찰된다.
당시 중동재력가는 루브르 박물관에 위탁보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장 브뤼트랑의 최후작품의 비애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91년, 세계 미술계에 한획을 그은 작품들의 후보에 오른 이 작품은 당시 고흐의 밤의카페테라스, 다빈치의 모나리자, 뭉크의 절규, 루벤스의 유아대학살에 이어 5대 명작으로 선정되었다.
어느 화가의 마지막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