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정치적으로 살펴보면 경성이 소속된 경기도 도지사와 경성부윤은 항상 일본인 만 임명되었습니다. 일제시기 13개 도지사들 중 조선인 몫은 5자리였는데 주로 전남, 전북, 충남,충북, 강원도, 황해도 같은 비교적 뒤떨어지고 낙후된 지역에 조선인도지사가 임명 되었죠. 경기도나 경성은 식민통치기관이 모여있고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므로 경성부윤과 경기도지사는 항상 일본인만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경기도평의회나 경성부회(오늘날 서울시의회)의 의원이 되려거나 선거의 투표권을 얻기위해선 연간 부세나 도세를 5원(오늘날 50만원)이상 납부해야 하는데 이또한 일본인들이 월등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유권자의 대부분이 일본인이었습니다. 조선인 선거자는 소수의 인텔리계층이나 총독부 관리, 작위를 가진 조선귀족, 조선인 지주들이었죠. 실제 1931년 경성부회선거를 살펴보면 40만 경성부민중에 유권자수 23000명중 조선인유권자는 8000명으로 약 35%를 차지했습니다. 또한 경성부회의원 정원 48명중 조선인은 18명(38%) 일본인은 30명(62%)로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답니다.
또한 조선에서 공무원이 되려면 보통문관시험이나 고등문관시험 기타 총독부 순사채용시험 간수채용시험등에 합격해야 했습니다. 식민지기 공무원은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고원, 용인으로 나뉘는데 정식 공무원이라 불리는 것은 칙임관과 주임관 판임관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상위직급인 주임관과 칙임관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판임관을 거쳐야 했는데 이 판임관이 되려면 보통문관시험을 치뤄야 했습니다. 하지만 보통문관시험의 과목에는 일본어, 작문, 산술, 일본지리, 일본사, 민법, 형법, 행정법등 8개의 필수과목과 경제학, 영어,민사법, 형사법등의 선택과목등이 있었는데 모두 중학교졸업 이상의 난이도와 일본어로 그리고 일본역사와 일본지리등의 지식을 요구했으므로 조선인 응시자들에겐 매우 불리했습니다. 또한 조선에는 통치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아동의 보통학교 취학률이 매우 저조했고 중학교나 고등보통학교 등은 조선에 손을 꼽을정도로 적어 그다지 고학력자도 많지않았습니다.
조선인들은 일본내지에서 상당한 학력을 가지고 건너온 일본인 응시자들과 경쟁해야 했습니다. 그자체로도 한국인과 일본인의 삶은 달랐고 상대적으로 한국인이 차별받았죠. 1920년대 매년 보통시험이 시행되었으나 조선인과 일본인 합격자수 비율은 대략 1대 4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각부서 최고직급의 주임관과 칙임관이 되려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야 했는데 고등문관시험은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만 치뤘으므로 조선인들은 왠만한 학력과 경제력을 갖추지않으면 합격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관리에 임용된 후만 살펴보더라도, 한예로 조선총독부 체신국(오늘날 우정사업본부)에는 왠만한 상위직급은 모두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체신국 고위직급이 되려면 체신관리양성소에 들어가야 했는데 체신관리양성소는 오직 일본에만 있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일본까지 건너가서 공부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임금면에서도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 공무원과 조선인 공무원의 봉급은 달랐습니다. 일본인공무원들은 조선인공무원들이 받던 기본급에 플러스해서 약 60%~ 100%의 봉급을 더 받았습니다. 이것을 가봉이라 부르는데 일종의 특별지역근무수당이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봤을때 당시조선은 내지에 비해 크게 수준이 뒤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일본에 비해 풍토도 다르고 생활도 힘들었으므로 급료를 조선인에 비해 더 줬답니다. 조선은행이나 식산은행 같은 공기업과 일반 일본계회사들도 이와 비슷하게 급료를 줬답니다. 1910년대 당시 조선인 판임관 9급이 월 12원을 받은 반면 일본인은 30원, 조선인 판임관 1급이 50원을 받으면 일본인 판임관1급은 90원을 받았답니다.
그리고 경성에 있던 조선총독부를 살펴보면 총독과 정무총감은 일본인이었고 그밑의 각 국장들(오늘날 부 장관)은 모두 일본인들이었고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임명되었던 사람은 1920년대 이진호 1940년대 엄창섭으로 모두 힘이약한 총독부 학무국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차관급인 총독부 각 과장들도 모두 일본인들뿐 조선인들이 유일하게 과장으로 임명되었던 것은 학무국 사회과장이나 사회교육과장 뿐이었습니다.
경성의 지역적 공간을 살펴보면 경성 남쪽은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여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모두 정이라고 이름지어졌습니다. 이를테면 본정, 황금정, 명치정, 미창정, 관훈정 같은 것이죠. 반면 조선인들은 종로와 동대문을 중심으로한 경성북쪽에 거주했는데 이들 지역은 동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동과 같은 행정구역이었죠. 그러나 일본인의 정지역에는 경성부에서 각 도로를 아스팔트포장도 하고 가로등도 밝게 설치했던 반면 조선인들이 거주했던 종로지역은 기본적인 도로포장이나 하수도조차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가로등도 물론이고요. 단지 중심거리인 태평통(오늘날 세종로)만 체면치레로 가로등과 포장이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총독부가 남산에서 북쪽인 경복궁으로 옮겨가면서부터 북쪽 조선인 거주지역도 차츰 정비되기 시작했으나 남쪽의 일본인 거주지역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습니다.
상업상으로도 살펴보면 일본인들이 압도적인 자본을 가지고 있었는지라 각종 은행과 상점, 백화점, 금융회사들은 모두 명치정과 황금정같은 일본인 거주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행이 자리잡고 있는 명치정과 황금정은 식산은행, 동일은행, 제일은행, 일본생명, 치요다생명, 경성증권, 대원증권, 명치증권등의 금융회사들이 줄지어 늘어섰을뿐아니라 미나카이백화점, 미쓰코시백화점, 조지야백화점, 히라다백화점등 일본인 백화점들도 남쪽에 줄지어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교통으로 살펴봐도 당시 경성은 일본계자본인 경성전기주식회사가 독점적으로 경성에 전기를 공급하고 전차를 운영했는데 주요 전차노선은 모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남쪽지역 도로를 통과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시내전차요금은 5전이었는데 시내와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용산지역은 시내구간요금만 받았던 반면 조선인들이 대다수 거주하는 동대문이나 성북, 왕십리등은 용산보다 훨씬 가까웠음에도 시외구간요금으로 2배더 요금을 징수했습니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경성제국대학또한 예과입학시험을 모두 일본어로 출제했을 뿐아니라 과목들도 일본사나 일본어등 일본인들에게 월등히 유리했습니다. 덕분에 입학자들도 대다수가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식민지시기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았는지 잘 알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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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돌아 다니다 발견 하여 올립니다.
그 시절 조선인에 대한 차별정책이 얼마나 심했는지 조선사람들이 출세 할 수 있는 길은 모조리 막은 듯한 느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