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공게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여기가 가장 적합한거 같아서 올립니다.
우선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올해 33살 남자이구요.전남 광주에 삽니다.
풍수에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대학 3학년때부터였네요. 우선 풍수지리 라고 하면 사람들은 미신으로 치부하고 가볍게 보시는데. 풍수지리학은 먼 옛날 우리 조상들 시대부터 내려옵니다.
우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릴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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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풍수는 우리 한국의 고유학문이 아닙니다. 시초는 중국에서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이 풍수라는게 단순히 지리서만 읽는다고 해서 깨우치는게 아닙니다. 복희씨가 지은 주역 이라는것도 어느정도 아셔야 합니다. 풍수는 역사와 함께 흘러왔습니다. 우선 무학대사는 조선왕조 창건에 크게 기여한 풍수학자이자 불교의 선사셨습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왕사로써 한양에 도읍지를 정할때 자리를 잡아준 풍수가이자 선승이었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인연은 이성계가 꿈에서 절에서 서까래 셋을 등에 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는 말을 무학대사에게 합니다. 이에 무학대사는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꿈이라고 해몽을 하여 주고 이때부터 이성계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조선왕조가 개국하고 이태조의 부탁으로 왕사의 자리로 앉게되죠. 본래 무학대사는 고려시대때 설봉산 석왕서 토굴에서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성계가 전날 이상한 꿈을 꿔서 이웃에 사는 노파에게 해몽을 부탁하니 노파가 정중히 사양하며 무학대사를 천거하게 됩니다.
이태조는 한양을 둘러보면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게 어떠한가?" 라고 묻자 무학대사는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여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 합니다." 라고 대답하죠. 이렇게 해서 한양이 새왕조로 선택되게 됩니다.근데 새 수도로 한양이 결정되었지만 주산(主山)을 어디로 할것인가를 두고 정도전과 격론을 벌이게 되는데 정도전은 유교 세력이고 무학은 불교 세력이라 대립과 갈등이 깔려있었죠. 논쟁의 핵심은 이랬습니다.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으로 백악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자고 했으나 정도전은 예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동향은 불가하다고 반대하게 됩니다. 이에 조선왕조는 무학의 의견을 거부하고 정도전의 말을 따라 북악으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무학이 인왕산까지 조선왕조에 넣도록 하자고 제안을 하자 정도전이 인왕산을 성 밖으로 정리해버립니다. 이를 이태조가 의아하게 여기면서 까닭을 묻자
"도성을 성 안으로 넣으면 불교가 성하고 성 밖으로 넣으면 유교가 멸합니다." 라고 답을 하게 되죠. 그러자 이태조는 정도전의 말을 따르도록 명하고 무학은 "이제 스님들은 유생들의 책보따리를 들고 따르게 되었다."면서 "앞으로 조선왕조는 수난의 연속이 될 것이며, 500년을 지탱하지 못할 것" 이란 말을 남기고 운수행각에 나섭니다. 실제로 조선왕조는 수난이 계속 되었고 500년 만에 망하게 되므로써 무학대사의 예언이 적중하게 되죠.
또 하나는 정염 정북창이라는 분 입니다.정북창 이라는분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였습니다. 주역에 능했고, 음약,의약, 풍수등 제반 방술에 모두 정통했었습니다. 이분은 스스로 천옥 이라고 풍수학적으로 하늘이 가둔 감옥에 스스로 들어가셔 갇히신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능력을 써먹을 데가 없었거든요. 그당시 풍수 학자로는 이분과 한분이 더 있었는데 나머지 한분은 나중에 정북창 선생의 마지막 법통을 이어받은 후학이 됩니다. 정북창 선생은 주역을 보다가 어느날 깨어버립니다. 그러다 미래를 예언하게 되고 풍수의 자리를 방향을 잡지 않고도 눈만으로 볼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 당시 시국이 예언이나 도참서 같은것은 모두 미신으로 치부하여 참형에 처하게 되는 무서운 시기여서 정북창은 절대로입밖으로 내지 않았습니다.
북창선생은 결국 천옥에 은거하면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허름한 집에서 책을 한권 씁니다. 이게 바로 "정북창 비보유록" 입니다. 이 책이 나중에 필사본이니 머니 하면서 가짜가 하두 많이 나돌게 되는데 이 책의 내용은 "우리 한국땅에 있는 모든 명산의 명당들을 기재해놓은 책이고 예언을 적어놓은 책이었습니다" 죽기전에 2권을 써서 한권은 임금에게 전해달라고 가까운 절에 사는 친한 스님에게 부탁을 하나 스님은 "이 책을 지금 주상에게 전달했다가는 자네의 목숨이 붙어있을지 장담을 못하네" 라고 합니다. 결국 필사본은 정북창 선생이 가지게 되고 한권은 그 스님에게 전해졌습니다. 정북창 선생은 정본을 주면서 "나중에 인연이 닿거든 능히 그 책을 소화하고 읽을줄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주게나. 그 책은 밖으로 나가면 큰 화를 불러 일으킬걸세" 라고 말을 합니다. 그 스님은 풍수에 대에 까막눈이고 그 책을 봐도 무슨내용인지 모르는지라 (책의 한문은 모두 파자(한문을 쪼개놓은것)으로 이루어졌는지라 전문가가 봐도 이해를 못하게 되어있었습니다.
나중에 조선시대에 국내에 있던 풍수학자 2명중 한분.. 그분에게 전달이 되게 됩니다. 그분은 죽기전에도 정북창 선생님을 못뵙고 돌아가십니다. 왜냐하면 정북창 선생은 그 책을 전달하고 나서 거의 끼니도 거르지 않고 목숨을 걸고 그 책을 집필했는지라 그냥 그 안에서 돌아가시게 되었죠.
그 책을 전달받은 풍수인의 이름은 굳이 거론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분 또한 양반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머리가 똑똑했습니다. 5세에 한문을 모두 때고 사서삼경,노자,공자의 책을 다 읽어낼 정도 였으니까요. 이분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니 ㅎㅎ
아묻튼 현재보다는 옛날에 기인이 많았습니다. 숨겨진 은자들이 많았죠. 다만 그당시 아무리 눈이 트이고 공부를 했다고 해도 써먹을데가 없으니 그저 명당자리 볼려고 조선팔도를 다 메주밟듯이 걸어다녔죠.
명당 자리 하나 때문에 두 양반 명문가가 3대에 걸쳐 피터지게 싸운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는 안동김씨이고 하나는 저도 자세히 기억이 안나네요. 나중에는 임금이 직접 나서서 중재를 했지만서도 결국 시일이 흐른후 싸움은 계속 됩니다.
아고 글이 길어졌네요. 내일은 황희 정승의 명당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 해보록 하겠습니다. ㅎㅎ
반응이 좋다면요;; 아니라면 그냥 여기까지만 ㅠ_ㅠ 해야할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