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발해 시대 옆나라 당나라에서 동방기독교가 흥하고있는데 신라나 발해에서
아무련 영향이 없을순없다고 생각들긴합니다.
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전래
불국사에서 십자가가 나온 까닭은…
흔히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200년쯤으로 잡는다. 그것은 카톨릭이 처음 들어온
때부터이고, 다수파인 개신교로 말하면 겨우 100년 남짓하다. 이웃 중국의 1300여
년이나, 일본의 약 400년에 비하면 짧은 역사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
한때 파도처럼 밀려온 기독교의 동방전파, 즉 동전(東傳) 물결이 한반도의
문턱에서 막혀버렸던 것일까 ? 아니면 비켜간 것일까 ? 이때까지 의혹만이
부풀려져왔을 뿐, 별로 밝혀진 바는 없다.
7∼8세기 성모상등 경주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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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경교(景敎)라고 불리운 이 고대 동방기독교는 635년 당 태종 때 처음 중국에
들어오는데, 그 특유의 매력 때문에 일시에 정식 공허(公許)를 얻어 250년간 몇
만명의 신도를 포섭할 정도로 흥성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기독교 동전의 제1차
파고이다. 그러나 경교는 ‘회창법란’(845)과 ‘황소의 난’(878) 등 일련의
배타적 소요에 휘말려 중국 본토에서는 거의 멸적되고 잔존세력이 몽골과 한반도의
인접지역인 만주 등 변방지역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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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근거는 우선, 관련유물이다. 가장 유력한 증거 유물로 꼽히는 것이 1965년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출토된 돌십자가와 역시 경주에서 발굴된 2점의 철제 십자문장식과 성모 소상이다. 이 4점의 유물은 모두 7~8세기 통일신라 시대의유물들이다. 돌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적이어서 십자가의 5형 중초기 십자가형인 그리스형에 속한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부착용장식품으로, 그리고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마리아상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유물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널리 유행하던유물이 다수를 차지하나, 간혹 유행하지 않았던 증여품이나 소장품이 포함되어있기도 한다. 따라서 몇 점의 유물을 특정 시대의 어떤 사회상 증거물로 삼는 데는신중해야 한다. 이럴 경우에는 다른 방증적인 유물이나 기록을 첨가하여 증거를보완해야 한다.당태종때 종국에 첫 전파 고대 기독교의 한반도 초전을 시사하는 증거로는 이상의 유물말고도 몇 가지 관련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7세기 말의 고승 혜통(慧通)에 관한 글이있는데, 그 속에 그가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다’라는기사가 나온다. 여기서의 ‘외도’란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뜻하는데, 당시새롭게 접한 다른 종교란 경교일 가능성이 높다. 혜통은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들어가 밀교의 조사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의 천거로 고종 딸의 병을 주술로치유해준 덕분에 고종과 가까웠다고 전한다. 그런데 고종은 경교를 정식으로받아들인 태종에 이어 당에서 경교를 중흥시킨 장본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주에 경교사를 짓도록할 정도로 경교에 경도된 군왕이었다. 이러한 고종과친분관계를 맺고있는 혜통으로서는 당에 공전된 경교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그 내막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외도’란 곧 이 경교를지칭하는 것이며, 그러한 외도를 ‘서울에서 멀리했다’는 것은 경교가 신라 안에이미 들어와 있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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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는 정말 한국에 들어왔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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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전파된 경교가 우리나라에까지 전파되었을까? 이 점을 언급하는 문헌 기록은 없으나 경교의 신라시대(羅代) 전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제기되어 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고든(E A Gorden)이었다.
당나라에 경교가 활발하게 전파될 당시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초기였는데 통일신라는 친당(親唐)정책을 쓰면서 당의 문물제도를 수입하고 있었고, 신라인들이 당에 유학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해상 무역이 일본이나 중국의 범위를 넘어 서역까지 확대되었던 점, 그리고 한국불교 문화 속에 나타난 경교의 유입 영향을 근거로 당에서 유행하던 경교가 신라에까지 전래되었다고 믿었다. 이런 확신에서 고든 여사는 중국서 발견된 비와 동일한 모조비를 1906년 5월에 금강산 장안사 근처에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경교의 나대 전래의 가능성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고고학적 흔적이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이 석제(石製)십자가(Stone cross, 24.5×24×9㎝)와 2점의 십자문장식(十字文裝飾·Cross-baseddesign, 5.8×5.6㎝, 2.4×3.2㎝), 그리고 마리아소상(塑像·Statue of virginMary, 7.2×3.8×2.8㎝)으로 추정되는 고고학적 자료였다.
이런 기독교적 흔적들이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경주에서 발견된 것은 신비롭기만 하다.
7∼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이 4점의 유물은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석제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적이어서 그리스형 십자가로 불리는데 중국에서 발견된 형태와 동일하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부착용 장식품으로 추정되고,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 마리아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양선은 석제 십자가의 발견을 통해서도 경교의 나대 전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재일 교회사학자였던 오윤태는 경교의 나대 전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확신하였고, 자신의 ‘한국기독교사, 경교사편’(혜선문화사, 1974)을 통해 이 점을 논증하였다.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면 적어도 8세기에 경교는 한국에 소개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는 적어도 1200년 전 한반도에 자리를 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세계와 사통팔달한 발해
[한겨레] 어울림문화 꽃피운
다섯갈래 국제교류망발해는 동방의 강대국답게 튼튼한 국가체제에 기반하여 5대 교통로를 통해 세계와 사통팔달함으로써 주권국가로서의 국제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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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가지 신기한 것은 불교와 고대 동방기독교간의 융합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의
발견이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동경용원부(현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발해의 서변에 자리한 우순(撫順) 지역에서도 수백점의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신라의 경주에서도 석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7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와 약 250년 동안 성행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가 9세기 전반 탄압을 받고 축출될 때,
발해 땅에 파급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경교는 불교와 습합하는 방법으로
전파를 시도하였으니, 그 맥락에서 보면 발해에서 두 종교간의 융합관계는 이해가
될 것이다. 배타가 아닌 어울림의 문화를 꽃피운 발해인들의 슬기가 돋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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