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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좌경 대부(左京大夫)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구주(九州)를 쳐서 이기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또 그 공적을 말하였다. 임금이
의홍(義弘)에게 토전(土田)을 하사하고자 하다가,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과 간관(諫官)의 의논으로 그만두었다.
의홍이 청하기를,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또 백제(百濟)의 토전(土田)을 청하였다. 임금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내려 그 가문의 세계를 상고하게 하니, 세대가 멀어서 징험할 수가 없었다. 잠정적으로 백제 시조(始祖) 온조(溫祚) 고씨(高氏)의 후손으로 하여 토전(土田) 3백 결(結)을 주기로 의논하니,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이 도당(都堂)에 글을 보내어 말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지금 왕지(王旨)를 받들어
일본국 육주목
의홍에게 토전을 주는 일은, 봉군(封君)의 작(爵)으로 주고 해마다 봉록(俸祿)을 하사하여 그 공을 포상(褒賞)하는 것만큼 적의(適宜)하지 못합니다. 대개 토전을 하사함의 불가한 것이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토전을 저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한 가지 불가한 것이요, 해마다 조세(租稅)를 실어 보내는 것이 공(貢)을 바치는 것 같으니, 두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들이 장차 해마다 사람을 보내어 친히 조세를 거두게 되면, 우리 백성이 해를 받을 것이니, 세 가지 불가한 것이요, 금(禁)하면 저들이 반드시 노여움을 품을 것이고, 따른다면 우리 백성에게 해가 될 것이니, 네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 사람들은 진실로 믿기가 어려우니, 뒤에 불순함이 있어서 그 토전을 회수하면, 그로 인하여 변흔(邊釁)을 이룰 것이니, 다섯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들이 장차 책하기를, ‘내가 받은 토전을 자손에게 전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빼앗는가?’ 하고, 토전을 되찾는다고 이름하여 와서 우리를 침구(侵寇)하면, 저들은 바르고 우리는 잘못이 되어, 변을 장차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니, 여섯 가지 불가한 것이요, 우리 강토의 토전이 저들의 소유가 되면, 후세에 반드시 자손의 근심이 될 것이니, 일곱 가지 불가한 것입니다. 또 더구나 토전을 주는 것은 약한 나라가 땅을 베어 강한 나라에게 주어 화호(和好)를 구하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의 토전이 저들에게 공(貢)을 바치니, 우리가 저들의 변강(邊疆)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혹 불순한 일이 있으면 회수하기가 진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작명(爵命)으로 주면, 큰 나라가 작은 나라의 경(卿)에게 작명을 주는 것과 같으니, 우리의 위명(威名)이 저들에게 가(加)하여지는 것입니다. 저들이 만일 우리의 번신(藩臣)이 되어 진실로 불순한 일이 있으면, 대의(大義)로 책하고 그 작명(爵名)을 회수하여 봉록(俸祿)을 정지하더라도, 저들이 장차 무슨 말로 우리를 책하겠습니까? 경중(輕重)의 형세와 이해(利害)의 기틀을 환하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하고 의논해서 신문(申聞)하여 시행하소서.”
사사(使司)에서 그 글로써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여러 말을 할 것이 없다.”
하니,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박석명(朴錫命) 등이 상소(上疏)하였다.
“가만히 듣건대,
《춘추(春秋)》에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분변을 삼간 것은, 같은 족류(族類)가 아니면 그 마음이 반드시 달라서
화하(華夏)를 어지럽히는 계제가 싹트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춘추》의 의(義)가 전해지지 못하여,
한(漢)나라에서를 에 머무르게 하고, 사성(賜姓)하여 번신(藩臣)으로 삼았는데, 그 뒤에 ·은 크게
중국의 근심이 되었고,
당(唐)나라에서 융적(戎狄)에게 원병을 구하였는데, 마침내 그 독을 입었고,
송(宋)나라의 가 북쪽으로 순행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도 또한
금(金)나라와 화친한 까닭이었습니다. 역대에서, 융적(戎狄)에 대하여 어거하는 도리를 잃어서 도리어 제압을 당한 것을 소상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 나라 동쪽에 있어서 대대로 변경의 근심이 된 것이
중국의 융적과 같습니다. 지금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적을 토벌한 공이 있고,
백제(百濟) 고씨(高氏)의 후손이라고 칭한다 하여, 전지 3백 결(結)을 주어 채지(采地)를 삼게 하니, 신 등은 생각하건대,
의홍이 적을 토벌한 공이 있으면 전백(錢帛)으로 상주는 것이 가(可)할 것입니다. 산천(山川)과 토전(土田)은 천자(天子)에게 받았으니 사사로이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왜인(倭人)의 사람된 품이 그 마음이 강퍅하고 사나와서, 변사(變詐)가 무상하여 예의로 사귀는 것은 없고, 오직 이(利)만을 생각합니다. 지금
의홍이 이미
육주(六州)의 땅을 차지하였으니, 그 인민의 많음과 갑병(甲兵)의 날카로움이 부족한 것이 없는데,
백제의 후손임을 밝히고자 하고
백제의 땅을 얻기를 원하니, 그 마음가짐을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채지(采地)의 연고로 인하여 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허실(虛實)을 엿보아 불측한 변을 일으키면, 비록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또한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의홍에게 금백(金帛)과 그가 청구한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상주시고, 토전을 주지 마시면, 융적을 어거하고 공을 상주는 도가 적의(適宜)할 것입니다.”
임금이 사사(使司)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영무(趙英茂)·정당 문학(政堂文學) 하윤(河崙)·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조온(趙溫)이 낭사(郞舍)에서 진달한 것만 따르고 나머지는 좇지 않았다. 중추원(中樞院)에서도 역시 서로 득실(得失)을 말하였다. 사사(使司)에서 계문하니, 임금이 또한 좇지 않고 말하기를,
“
의홍이 우리 나라에 향(向)하여 정성을 바쳐 적을 쳐부수었는데, 그 청구하는 바는 오직 이 일뿐이다. 하물며 본래 토지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본가의 계통을 추명(推明)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실속 없는 은혜를 베풀어 실속 있는 보답을 얻는 것이니,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설혹 뒤에 변이 있더라도 시기에 임하여 응변(應變)하면 또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고, 일을 호조(戶曹) 급전사(給田司)에 내리고 말하였다.
“
일본국 육주목(六州牧) 좌경 대부(左京大夫)
의홍은 본래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 고씨(高氏)의 후손인데, 그 선조가 난을 피하여
일본에 건너가서, 대대로 상승(相承)하여 육주목에 이르러 더욱 귀하고 현달하게 되었다. 근년 이래로
대마도(對馬島) 등 삼도(三島)의 완악한 백성들이 흉도(兇徒)를 불러 모아 우리 강토를 침노하여 어지럽히고 인민들을 노략하여, 이웃 나라 사이의 화호(和好)를 저해하였다. 지난번에 대상국(大相國)이 의(義)로써 발병(發兵)하여 몸소 스스로 독전(督戰)해서 그 무리를 섬멸하였으니, 변경의 인민들이 편안하고 조용하게 되어, 생민에게 해독이 없게 하고 두 나라로 하여금 화호를 닦게 하였다. 내가 그 공을 아름답게 여겨 그 공적을 말하기를, ‘참으로 잊지 못하여 〈그 공을〉 갚고자 생각한다.’고 하였다. 너희 호조 급전사(戶曹給田司)에서는 그 선조의 전지가
완산(完山)에 있는 것을 상고하여, 예전대로 절급(折給)하여 채지(采地)를 삼도록 해서 특수한 공훈을 포상하라.”
급전사(給田司)에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에게 이문(移文)하여 답험(踏驗)하게 하고, 그 문적(文籍)을 만들어서 영업전(永業田)에 충당하게 하였다. 사사(使司)에서
의홍의 사자인 중[僧]에게 토전을 준다는 일을 말하니, 중이 대답하기를,
“만일 세계(世系)를 명시(明示)하여 주시면 전지를 주지 않더라도 또한 좋습니다.”
하니,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 등이 또 상언(上言)하였다.
“
일본국 육주목
의홍에게 채지(采地)를 봉(封)해 주어서는 안된다고 소(疏)를 갖추어 아뢰었으나, 분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미치고 어리석은 말로 다시 천총(天聰)을 더럽힙니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일을 하는 데 시초에 도모한다.’ 하였습니다. 대저 다른 사람과 교결(交結)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 시초에 도모하여야 합니다. 처음에 도모하지 않으면, 후회가 뒤따라 이릅니다. 지금
의홍의 적을 토벌한 공으로 특별히
백제의 후손이라 일컫고 토전을 주면, 후세에 쟁란(爭亂)의 단서가 여기에서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한결같이 전일의 계달한 바에 의하여 시초에서 삼가서 만세의 계책을 삼으소서. 만일 신 등이 오활하여 치도(治道)의 사체(事體)에 어둡다 하고 유음(兪音)을 내리지 않는다면, 비록 나중에 뉘우치더라도 그 후회[噬臍]는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교서감 승(校書監丞) 김시용(金時用)이 또한 성씨(姓氏)의 적(籍)과 토전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뜻으로 상언(上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장 B면
【영인본】 1책 151면
【분류】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