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이 나는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 당신 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책게에 최승자 시인의 시가 없는 듯하여 올려 봅니다.
시인의 삶도 그렇고 초반기의 시도 그렇고 허무가 짙은 작품들이 많은것 같아요.
전 처음 최승자 시인 시들 봤을 때 정말 너무 충격받아서 일부러 책장 깊숙히 숨겨두고 안 보기도 했었습니다.
80년대 90대엔 라디오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셨다고 들었는데 읽다보면 엄청 끈끈한 검은물속에 온 몸이 잠겨서
그대로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이...
근데 머릿속에서 계속 끝구절이 떠나질 않더라고요.
-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와아... 어떻게 사람이 이런 문장을 쓸까요?
* 너에게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 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근데 또 이런 작품도 있어요.
처음 읽었을 때 도서관이었는데 누가 나한테 고백한 것처럼 얼굴 벌게져갖고 가슴 벌렁벌렁 혼자 막 손부채질하고..
- 쉽게 흐르는 게 마음이지만 너한테만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와아... 지금 다시 읽어도 막 떨려..
* 외로움의 폭력
내 뒤에서 누군가 슬픔의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하고 있다.
요즈음의 꿈은 예감으로 젖어 있다.
무서운 원색의 화면
그 배경에 내리는 비
그 배후에 내리는 비
죽음으로도 끌 수 없는
고독의 핏물은 흘러내려
언제나 내골수 사이에서 출렁인다.
물러서라!
나의 외로움은 장전되어 있다.
하하, 그러나 필경은 아무도
오지 않을 길목에서
녹슨 내 외로움의 총구는
끝끝내 나의 뇌리를 겨누고 있다.
항상 혼자있으면 이게 외로운건지 당연한지 무덤덤하게 살게 될 때, 그런 때
- 나의 외로움은 장전되어 있다.
*** 사실 충격적인 (?) 시들이 더 많습니다.
몇 년 전엔가 봤던 시인의 인터뷰 중에 ' 이제는 의식적으로 시를 쓴다. 이제는 그럴 때도 되었다. ' 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시인의 지난 궤적들을 알게 되면서 더 고개를 끄덕이던 말이었는데, 최근에 내신 시집 역시 엄청 충격적(??) 입니다. 저는 그랬어요.
암튼 이 충격을 책게 여러분들도 느껴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 아.. 끄,,, 끝내기가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