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가 비전문가다 보니 내용이 좀 어설프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냥 이야깃거리 정도로만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왕소군 이야기. 어디서 한번씩 들어 보셨지요?
흉노족이 한나라 국경을 번번히 침략하자,
황제는 후궁들 중 가장 못생긴 여자를 골라 가짜 공주로 만들어 흉노족 수장에게 시집을 보내 화친하려고 했답니다.
이때 다른 후궁들이 화가들에게 뇌물을 주어 실물보다 더 예쁜 초상화를 포샵질그리게 하는 동안
정작 황궁의 최고 미녀 왕소군은 아무 뇌물도 주지 않아 못생긴 얼굴로 그려렸고, 결국 가짜 공주 후보로 뽑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소군이 떠날 때가 되어서야 실물을 직접 본 황제가 뒤늦게 후회했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는 전설.
물론 이것은 후대에 이르러 문학으로 각색된 이야기라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중국 역사에서는 이처럼 필요에 따라 가짜 공주를 만들어 주변국과의 혼인 외교에 이용하는 사례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슷한 사례가 조선에도 한 번 있었습니다.
효종의 '급조된' 공주, 의순공주 이야기입니다.
1. 청나라 섭정왕의 새장가
효종 1년, 청나라에서 난감한 내용의 칙서 하나가 날아옵니다.
청나라로 공주 한 명을 시집보내 달라는 '구혼 칙서'.
이것 하나가 즉위한 지 1년도 안 된 새 임금 효종과 로열패밀리, 그리고 조정을 패닉으로 몰아넣습니다.
선왕, 그러니까 인조 대로 잠깐 되돌아가 봅시다.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많이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청나라에 참패하고 왕이 직접 치욕적인 항복 의식까지 치렀던 이 사건은 조선에겐 단순한 패전 정도가 아니였죠.
병자호란은 조선 사람들에게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남겼고,
또 항복 조약이라는 족쇄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명나라하고는 놀지 말고, 청을 황제국으로 모시며, 세자와 왕자를 인질로 보내는 등......
이 항복 조약 때문에 효종이 왕자 시절 형님(故 소현세자)과 함께 청으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서러운데 이번에는 딸이나 조카들 중 하나를 내놓으랍디다.
항복 조약 중에 양국의 관계 증진을 위해 조선 왕실과 사대부가 딸들을 청나라 황실과 관리들에게 시집보내라는 내용도 있었거든요.
그렇다고는 해도 그 이전까지는 진짜로 공주를 청나라에 보내야 할 줄은 몰랐는데,
이때 청나라 구왕(도르곤)이 아내를 여의고 새장가를 들기 위해 조선에 문의를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왕은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구왕 도르곤은 누르하치의 (많고 많은) 아들 중 한 명으로, 당시 청나라 황제 순치제의 삼촌이었습니다.
사실 그냥 황제의 삼촌 정도가 아니고, 어린 조카를 황위에 올린 장본인이자 섭정왕이었던 실권자였죠.
이미 그는 실질적으론 황제나 다름없는 거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선이 그의 요구를 거부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효종의 공주들 중에는 숙명공주(11세)와 숙휘공주(9세), 두 명의 공주가 결혼적령기와 가까운 편이였죠.
(보통 공주들이 결혼하는 나이는 대략 12~14세 정도)
아무리 황제나 다름없는 양반이라 해도 당시 구왕은 마흔에 가까운 나이였는데
솔직히 어느 딸 가진 아빠가 그런 나이 많은 홀애비에게 애긔를 시집보내고 싶겠습니까?
게다가 청나라 볼모생활에 학을 뗀 효종이 청나라 오랑캐에게 딸을 준다? 하늘이 뒤집어져도 그렇게는 못 할 겁니다;;;
그때 사은사 나업이 청나라 사신들을 상대로 순발력을 발휘하니,
'아직 시집 안 간 공주님은 이제 2살밖에 안 되었는디요? 철컹철컹?' 이렇게 뻥을 대국적으로 칩니다.
일단 그래서 급한 불은 껐는데, 청나라 측에선 '그럼 왕족이나 대감집 여식들 중에서 참한 처자 하나 뽑아서 보내셈ㅇㅇ'이라고 답변했죠.
그렇게 딸 가진 아빠들의 치열한 눈치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2. 눈치게임의 끝
그리하여 그날 이후부터, 종친과 대신들 중 자기 딸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혼 적령기의 딸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애를 여기 숨기고 저기 숨기느라 바빴죠.
적당한 후보자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효종은 아주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이 피말리는 상황은 어느 열사의 출현으로 끝이 납니다.
종친 중에서 금림군 이개윤이란 자가 딸을 내놓겠다고 자원한 것입니다.
금림군은 성종의 고손자로, 효종하고는 가계도 상 그렇게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대략 할아버지뻘 되는 먼 친척이었죠.
그래도 어찌 되었건 임금 입장에선 곤란한 일에 선뜻 나서 준 그가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 효종은 이개윤의 품계를 높여주고 그 아들들에게 벼슬을 내려주는 한편,
이 까마득한 친척의 딸에게 공주 작호를 내리면서 자기 양녀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끄트머리 종친가의 16살 소녀 이애숙은 하루아침에 '의순공주(義順公主, '옳은 뜻을 따른다'는 의미로 효종이 직접 지어줌)'가 됩니다.프린세스메이커?
청나라 사신단도 의순공주를 보고 만족해하면서 간택절차를 진행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정의 눈치게임이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결정이 번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때 딸 가진 대신과 종친들이 애들을 번갯불에 콩 구워먹을 속도로 많이들 시집을 보냈습니다.
한 쪽에서는 자기 딸을 내놓겠다고 의리있게 나서는데, 다른 쪽에서는 자기 딸 내놓기 싫다고 무더기로 결혼을 시키고 있으니 괘씸하겠죠.
빡친 효종, '세자 장가보내려면 금혼령 내려야 하는데 아는 사람끼리 몰래 혼약하고 딸들 시집보내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며 화를 냅니다.
근데 그러면서 그날 세자랑 같이 숙명공주와 숙휘공주의 부마간택령까지 발표하는, 아수라백작 쌍싸다구 왕복할 이중성을 보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족 - 때문에 일찍 시집 간 숙명공주는 부마한테는 별 관심이 없고 주구장창 고양이만 끼고 놀았다 카더라)
3. 가짜 공주의 비극
의순공주가 시집가던 날, 도성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눈물을 흘리고 비통해하며 그녀의 신행길을 배웅했습니다.
병자호란 직후 반청감정이 극에 달했던 시대, 하지만 그렇다고 청의 횡포에 저항할 힘은 없었던 무력한 시대.
어쩌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위기를 제 몸 바쳐서 끝낸 가짜 공주는 사람들에겐 정말 고맙고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공주님이 청나라로 가던 길에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면서 자결했다더라'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하지만 사실 의순공주는 조선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단 조금은 더 행복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좀 다행이죠?
여러 기록을 보면 의순공주는 상당한 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 이개윤이 자기 딸이 정말 예쁘다고 말하고 다녔.....던 건 아빠의 콩깍지일지도 모른다고 쳐도,
청나라 사신단이 간택 때 의숙공주를 보고 구왕에게 새신붓감이 예쁘다며 미리 연락해줬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 이야기 듣고 신이 난 구왕이 요동까지 새색시를 마중나왔다가 한 눈에 반해서는 하얀 송골매 같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합니다.
그래서 결혼 생활 내내 의숙공주를 엄청 소중히 대해줬다고 합니다. (대신 조선에서 같이 온 시녀들이 못생겼다고 불평한 건 비밀)
한편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긴 했지만, 말도 다르고 사람도 다른 타지 생활은 의숙공주에겐 너무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남편 구왕이었고, 그녀도 그에게 차차 마음을 엽니다.
나이도 자신보다 훨씬 많고 원수나 다름 없는 청나라 사람이긴 했지만, 결국엔 의순공주도 구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말년까지도 먼저 세상을 떠난 구왕을 많이 그리워해서, 무당을 불러 남편의 혼을 부르게 했다는 야사가 남아 있거든요.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구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사고로 사망했는데, 이게 의순공주가 시집온 지 겨우 7개월 만의 일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기구한 팔자는 보통 청상과부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섭정왕 구왕이 죽은 지 한 달 후, 그의 추종자들이 정권 재장악을 시도하다가 발각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동안 숨죽이고 지냈던 구왕의 정적들에겐 좋은 먹잇감이었죠.
그들은 조정에 남아있던 구왕의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 구왕에게도 '생전에 황위를 찬탈하려고 했다'는 죄목을 씌웠습니다.
결국 구왕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모든 작위를 박탈당하자, 의순공주도 대역죄인의 처로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대역죄인을 처벌하고 나면 그의 여인은 공신들이 나눠 가지게 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의순공주는 백양왕의 아들 '보로'라는 자에게 넘겨지게 됩니다.
원치 않게 재가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된 이후엔 청나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있진 않습니다.
뭐 그나마 제후국 공주 출신이고 하니 보로란 자가 아주 막 대하지는 않았으려니 하지만..... 문제는 이 보로 또한 1년만에 사망합니다.
그렇게 의순공주는 이역만리 타국에 혈육도, 돌봐주는 이도 하나 없이 완전히 혼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신단을 통해 알음알음 딸의 소식을 듣던 금림군은 아주 억장이 무너졌을 겁니다.
결국 그는 딸을 다시 조선으로 데리고 오기로 결심합니다.
금림군은 사신을 자처하여 봉명사신 신분으로 청나라로 넘어간 다음, 황제에게 직접 의순공주를 되돌려달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순치제는 그녀가 이미 외교적 가치를 상실한 지 오래고, 가만 보니 처지가 좀 불쌍한 것 같기도 해서 별 고민 없이 허락합니다.
의순공주를 돌려보내기에 앞서 황제는 조선 쪽으로 '의순공주가 미망인이 되어 사저에 지내며 부모 형제와 떨어져 지낸 지도 오래라 측은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아비인 이개윤이 딸을 보고자 (짐에게) 주청했으니 돌려보낸다. 그러니까 잘 받아서 돌봐줘라'는 내용의 칙서를 보냅니다.
그리하여 의순공주는 청으로 시집간 지 6년만에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
을까요?
사실은 그냥 돌아오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때 이미 그녀는 돌아오지 말아야 할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4. 환향공주의 최후
영조 때 지어진 역사책 '연려실기술'에서는 의순공주의 귀국길 풍경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행진이 이개윤과 함께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글로 아뢰어 그 딸을 데리고 돌아오니, 당시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하였다.'
6년 전 눈물로 의순공주를 배웅했던 사람들이 이번엔 침을 뱉고 욕하면서 그녀를 맞이했다니, 이건 또 무슨 우디르급 태세 전환임?
많이들 알고 계시겠지만 그 시절은 이미 환향녀 문제로 여기저기 잡음이 많았던 때입니다.
조선의 유교 사회는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힌 (가능성이 있는) 여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들이 좋다고 청나라로 간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병자호란 때의 여성 포로들, 그러니까 환향녀들은 고향의 제 가정으로 돌아가도 내쳐지기 일쑤였고,
결국 갈 데 없는 그녀들은 끝은 (사회로부터 강요받은, 사실상 일종의 명예살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자결이었습니다.
이것이 큰 사회 문제가 되자 인조는 각 지방마다 '회절강(절개를 회복하는 강)'을 정해 여인들에게 그 곳에서 몸을 씻는 퍼포먼스(?)를 행하게 하고,
이 의식을 거친 환향녀들은 가정에서 무조건 받아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향녀와 관련된 이혼 소송은 끊이질 않았죠.
애초에 실질적인 구제 정책도 아닌, 저런 눈가리고 아웅식 쇼로 이 심각한 문제가 해결될 리도 없었겠지만....
사람들 눈엔 의순공주도 환향녀와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자진해서 오랑캐에게 시집가고, 게다가 청나라 현지에서 한 번 재가까지 했다가 돌아온 아주 최저급 환향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던 공주님은 이미 6년 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죽었습니다.
돌아온 건 사대부가의 명예를 지키지 못한 한 명의 부덕한 여자일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정에서도 외교적 가치를 상실한 채 돌아온 의순공주와 그의 가족들을 더이상 보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세간에는 이미 금림군이 청나라에서 들어오는 비단에 눈이 멀어 딸을 팔았다가 다시 데려왔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대신들은 사신의 임무는 소홀히 하면서, 왕과 조정의 허락 없이 멋대로 황제에게 '다이렉트 상소'를 꽂아 제 딸만 챙겨왔다며 금림군을 탄핵했습니다.
결국 의순공주가 돌아온 것으로 인해 아버지 금림군을 포함한 사신단은 모두 삭탈관직을 당하고 맙니다.
이때 그녀도 공주 신분을 도로 빼앗깁니다.
이후 의순공주'였던' 이애숙은 효종이 조금씩 보내주는 쌀(앞서 황제가 칙서를 보내 그녀를 받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효종은 호조에 명을 내려 매달 금림군의 딸에게 쌀을 지급하라고 명했다)을 가지고 혼자 조용히 살아갑니다.
환향녀라며 그 누구도 사랑해주는 이 없고, 자신 때문에 더불어 망가져 가는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말입니다.
결국 그녀는 고향에서의 냉대가 너무 차가웠는지 더 버티지 못하고 겨우 28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의순공주의 삶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고,
대신 '오랑캐에게 팔려가듯 시집가던 길에 족두리만 남기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한 공주님이 있었다'는, 사실과 다른 전설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의순공주의 묘는 후대에 '족두리 산소'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이 무덤은 지금도 의정부시 천보산 기슭에 쓸쓸하게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숨을 쉬던 순간 의순공주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청나라로 시집간 것,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후회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혹시 두 결정을 모두 후회하며 숨을 거두었을까요?
어쩌면 끝까지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고 그저 홀가분하게 이승을 떠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건 이미 죽은 공주만이 알고 있겠지요.
의순공주와 수많은 환향녀들 이외에도,
우리는 역사 이곳 저곳에서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많은 인생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계속 경계할 수 있다면 역사는 가장 지혜로운 학문이 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이들의 한이 좀 더 가벼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덧)
병자호란의 '환향녀'와 저속한 여자를 일컫는 비속어 '화냥년'이 혼용이 되어 쓰인 시대가 있긴 했지만,
화냥년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화낭질'이란 말은 병자호란 이전의 기록에서도 발견됩니다.
즉 대중에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화냥년의 어원이 환향녀는 아닐 수도 있다는 뜻.
다만 제목에서는 주인공에 대한 당시 조선의 여론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더 세게, 환향녀 대신 화냥년이란 말을 썼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