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늦게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1호선이었다. 나는 서울역에서 갈아타야 했고, 그러자면 맨 끝에 타는게 가장 편하다. 밤 11시 경의 1호선 전철은 신도림까지는 사람이 별로 없다. 요즘 1호선도 신차로 바뀌는 과정 중에 있는 것 같은데, 내가 탄 차는 조금 낡은 구형차였다. 1호선 특유의 덜컹거림, 희미한 형광등 불빛… 조금은 너저분한 1호선은 약간 을씨년스러웠고, 또 조용했다. 사람들은 띄엄띄엄 앉아 졸고 있었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 역에선가 얼굴이 불콰해진 양복쟁이 아저씨가 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게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정도는 되어 보였던 그 아저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전철벽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는거라. 끝칸이라고 했다. 조종석이라고 해도 되려나. 아무튼 그 벽을 쾅쾅 주먹으로 치는거였다. 이어폰을 꽂고 있는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쾅쾅 두드리길래 '뭐야?' 하고 귀에서 이어폰을 뺐더니 전철 기사를 부르는 것이었다.
조종석(…)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바깥을 쳐다봤나보다. 내가 앉은 쪽에서는 그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 양복쟁이 아저씨가 대뜸 '야, 히터 좀 틀어. 춥잖아' 막 그러는거라. 나는 그 운전 기사를 보진 못했지만, 얼마나 짜증나고 불쾌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나이가 있어도 말이지. 생면부지의 사람을 보고 저리 반말을 하나. 완전 무슨 교복 팔랑거리는 학생도 아니고, 엄연히 그 기사도 사회인이 아니냔 말이죠.
고개를 끄떡였는지, 알겠다고 했는지 문이 닫혔고 - 지하철 한두정거장을 더 갔나 양복쟁이 아저씨는 그 짓을 두어번 반복했다. 아, 이젠 나도 막 짜증이 나는거다. 우선 시끄럽고, 전철이 무슨 사우나야, 전기장판이야. 1호선은 원래 문 열면 찬바람이 자꾸 들어와서 춥긴 하다. 그런데 뭐, 난 잘 모르지만 구형차라서 출력도 약하고 그런 문제가 있겠죠. 또 겨울에 추운걸 어쩌란 말야. 자꾸 왜 반말이야. 나한테 반말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참 싫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가면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댔다. 미안한 말인데, 그 양복쟁이 아저씨 인상은 참 강팍해 보였고, 자애롭고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다 싶었다. 좀 무례한 생각이긴 한데, 내가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광경 중에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무례한 아저씨, 아줌마라서 그러니 그냥 이해해줍쇼(굽신).
자꾸 조종석…아, 운전실(!!!) 문을 쾅쾅 두드리니 그 기사가 바깥으로 나와서 히터가 얼마나 안 나오길래 그러는지 의자를 만져보는거라. 그런데 그 기사가 난 새파랗게 젊은애라서 반말을 틱틱 뱉는 줄 알았더니, 허참. 오히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거다. 머리가 하얗게 센건 아니었지만, 한 오륙전 지나면 은퇴하실 것 같은 분이셨던 것. 그 양복쟁이 아저씨도 내내 반말을 한건 아니었고, 군데군데 존대를 섞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반말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계속 반말을 하더라.
아, 그걸 보고는 평소엔 불의를 보고 아주 잘 참는데, 그날따라 울컥해서는 그 주먹 쾅쾅 아저씨한테 뭐라고 하려던 찰나.
내 옆에 앉은 중년의 아저씨가 나서셨다. 오오, 정의의 미…아니, 그냥 중년! 뭐, 그런데 그 아저씨도 술냄새가 풀풀 풍기던 아저씨였다. 뭐, 이런건 전철에서 종종 보이는 풍경이다.
'야, 조용히 좀 해. 전철 전세 냈어?' - 술냄새 풀풀 아저씨
'야, 춥잖아' - 주먹 쾅쾅 아저씨
'겨울엔 원래 추워' - 술냄새 풀풀 아저씨
'히터 틀어야지 왜 안 틀어' - 주먹 쾅쾅 아저씨
'틀었대잖아' - 술냄새 풀풀 아저씨
'안 나오잖아' - 주먹 쾅쾅 아저씨
'어쩌라고' - 술냄새 풀풀 아저씨
'틀라고' - 주먹 쾅쾅 아저씨
'틀었다고!' - 술냄새 풀풀 아저씨
'안 나오잖아' - 주먹 쾅쾅 아저씨
'틀었대잖아' - 술냄새 풀풀 아저씨
- 여기서 대화는 잠시 무한반복의 기미를 보여서 중간 생략
'춥잖아' - 주먹 쾅쾅 아저씨
'참아' - 술 냄새 풀풀 아저씨
'왜 참아, 난 못 참아' - 주먹 쾅쾅 아저씨
'그럼 사우디에 가, 거긴 더워' - 술 냄새 풀풀 아저씨
'사우디 가봤어?' - 주먹 쾅쾅 아저씨
여기까진 그냥 어린 아이들 싸우는 패턴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급반전된다.
'거기서 살았어' - 술 냄새 풀풀 아저씨
'언제?'- 주먹 쾅쾅 아저씨
'xx 년부터 한 x년 있었지' - 술 냄새 풀풀 아저씨 (연도는 제가 들은지 좀 되어서 기억이 안 나서-_-;)
'사우디 어디에 있었노' - 주먹 쾅쾅 아저씨
이러다가 갑자기 대화는 동창회 내지는 동향 사람 만나 반가워 회포 푸는 자리로… … 밖에 나와 있던 머리 희끗희끗한 기사님은 벙찐 표정. 옆에 앉아 있던 나 역시 벙찐 표정이었다. 아니, 뭐… 뭐가 이래. …;;;; 나야 어차피 처음부터 관찰자일 따름이었지만, 가장 딱한건 전철 운전 기사님이라. 원래 그 상황의 중심이 되었어야 마땅했지만, 이제 모두에게 버려지고, 잊혀진 기사님이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냥 다시 운전실로 들어갔다.
기사님은 운전실 문을 닫기 전에 고개를 길게 빼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날 보더니 씨익 웃는 것이다. 난 막 짜증을 내다가 갑자기 옆에서 사우디가 얼마나 더웠고, 거기서 일하는게 얼마나 힘들었고, 거기 술집이 어쩌고(거기 이슬람 국가 아닌가;) 하는 아저씨들이 너무 어이없어서, 이건 뭐… 웃지도 못하고, 짜증도 못내고 엉거주춤한 마음으로 있었는데… 그 머리 희끗희끗한 기사님이 날 보고 씨익 웃는걸 보니 이상하게 코끝이 시큰해졌었다. 참 이상하지. 짜증과 어이없음을 섞으면 코끝이 시큰해지는가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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