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photo.media.daum.net/photogallery/entertain/enter_1/view.html?photoid=2789&newsid=20081014160617441&cp=ladykh 이박사, 8년 만에 모습 드러내다
이박사(54)를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알 만한 기획사 소속 가수도 아니요, 방송에 자주 나오는 연예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위 '업소' 전단지에서도 이박사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모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따르면 서울 월곡동 근처에서 종종 자전거 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는데, 이 단서만으로 무작정 그곳을 찾아가 수소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를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철지난 그의 앨범 속에 적힌 연락처들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난관에 부딪쳤다. 이박사의 앨범을 구하기조차 쉽지 않았던 것. 그의 앨범은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레어 아이템'이었다. 대형 레코드점에 가서야 그의 가장 최근 「이박사 하이웨이 랩 댄싱좦이란 앨범의 CD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실제 이박사와 조우한 듯 반가웠다. 음반사와 녹음실을 수소문한 끝에 그를 알고 있다는 제작사 대표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근황을 물으니 여전히 지방 공연을 다니며 음악을 하고 있을 거란다. 살짝 힘이 풀렸다. 기자는 내심 좀 더 드라마틱한 상황이 전개되길 기대했던 모양이다. 처음보다는 조금 김이 빠진 채 이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라구? 난 웬만한 곳 아니면 인터뷰 안 해. 지금까지 다 거절했어. 「레이디경향」? 그래 거긴 고품격이니까 오랜만에 하지 뭐. 나 8년 만에 인터뷰하는 거니까 잘 써줘야 돼."
이박사는 기자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로 일관했다. 통성명을 한 후에는 마치 자식을 부르듯 '쬎쬎야!'라고 불렀다. 그러나 털끝만큼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이박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못할 말 없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자신을 굽히면서까지 세상과 타협하는 법이 없다.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좋아 좋아!'를 외치며 방랑자처럼 팔도를 누비는 그가 '기자님'이라고 불렀다면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를 만난 곳은 연습실이 있다는 월곡동 밤나무골 시장 근처였다. 멀리서도 노란 머리와 선글라스 차림의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주름이 많이 늘었다는 것 빼고는 변함없는 모습이다. 찾기 힘들었다는 말로 인사를 하니 그는 그간의 노력이 부끄러워질 만큼 명쾌한 해답을 찾아줬다.
"내가 찾기 힘들었다고? 아, 가수협회에 전화해서 연락처 달라고 하면 주는데 뭘!"
"요즘은 개인정보 유출에 민감해서 잘 알려주지 않아요. 이박사님!"
"행사 맡기려고 한다고 하면 바로 알려주는데….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건데 안 알려주겠어?"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느냐며 고개를 저었지만 내심 써봄직한 방법이지 싶다. 이박사는 음악을 팔아 시대에 편승하지 않는다. 그는 돈이 되는 밤무대 업소보다는 사람들과 피부로 교감할 수 있는 지역 행사를 좋아했다. 밤업소보다는 누군가의 팔순잔치에서 그를 볼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나는 라이브 자체를 좋아해. 그 재미로 계속 음악하고 앨범 작업을 하고 있잖아. 일주일에 서너 곳 정도 나를 잊지 않고 불러주는 데가 있어. 그럼 기꺼이 공연을 해주지."
과거의 영광스러운 활약에 비하면 좀 초라한 근황이다. 이박사는 촬영 내내 메들리를 선사했다. 그의 노래에는 중독성과 묘한 끌림이 있다. 그의 디스코 메들리만큼 세대를 허물고 남녀노소에게 어필하는 노래가 또 있을까. 적극적인 홍보를 하고 TV 출연을 한다면 전처럼 큰 무대에 설 수도 있을 법하건만….
"나는 PR 같은 거 낯 뜨거워서 못해. 요즘은 인터넷에 홈페이지 같은 걸 만들어서 관리한다던데 그런 것도 몰라. 억지로 방송국 가서 애쓰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냥 내 음악이 듣고 싶은 사람은 나를 수소문해서 찾아오면 되잖아."
브라운관이란 틀에 맞춰져 인위적으로 꾸미는 것도 싫다.
"방송국 가면 '코디'들이 와서 찍어 바르고 하잖아. 그것도 마음에 안 들더라구. 나이 먹으면 얼굴에 주름 있는 거야 당연한 거지."
음악은 이박사의 인생, 그 자체다. 열 가지가 넘는 직업을 전전하다가 비로소 그를 정착하게 만든 것이 음악이었다.
->이후는 링크기사로
통성명을 한 후에는 마치 자식을 부르듯 '쬎쬎야!'라고 불렀다.
통성명을 한 후에는 마치 자식을 부르듯 '쬎쬎야!'라고 불렀다.
통성명을 한 후에는 마치 자식을 부르듯 '쬎쬎야!'라고 불렀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