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나는 일찌감치 일어나 샤워를 했다.
가방에 여권과 핸드폰 등등을 집어 넣으며 생각 했다.
'이번엔, 꼭 넘어야 해.'
벌써 20만원짜리 시험을 여섯번이나 보았다. 그리고 100점을 넘은 시험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 시험은 억지로 점수를 시간내에 만들고자 예약날짜가 지났는데도 예약을 해야 했기에 시험값이 더욱 비쌋다.
'230 달러 짜리 시험..'
한국에서 등골이 휘어라 일하고 있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죄송하기만 했다.
'그래도 오늘은 느낌이 좋아. 잠도 푹 잤고, 어깨도 가벼워.'
나는 스스로를 위안하며 이번엔 꼭 넘을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날 밤, 나는 하나님께 '이번에 100점을 넘게 해주시면 헌금을 점당 얼마를 낼게요... 교회도 잘 나갈게요. 매일 매일 찬송들을게요..' 하고 기도했다.
그 때문인지 정말 느낌이 좋았다.
밥을 먹고, 준비를 하고, 차에 타며 말했다.
"선생님. 이런말 하면 징크스상 좀 안좋지만... 오늘은 진짜 느낌이 좋아요."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선생님은 "말한대로 될찌어다" 하고 말하셨다.
나는 속으로 아멘. 할렐루야. 하고 말했다.
선생님은 차를 타고 가는동안 계속해서 "이번에 꼭 넘어야 한다. 할수 있지?"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도착해서 차에 내리기 전, 선생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 -나말고 다른 오빠도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이들이 시험을 봅니다. 시험동안 피곤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옵시고, 집중력이 흐트러 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옵시고.."
다같이 아멘 하고 말한뒤 우리는 차에서 나와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제는 너무 많이와 외워버린 시험장을 오늘이 마지막으로 너를 보는 날이야 하고 끊임없이 말하며 엘레베이터를 탔다.
더이상 층수를 보지 않아도 알았다. 3층을 눌렀다.
3층에 도착하니 웬걸, 문이 잠겨있었다.
7시 40분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우리가 7시 20분 정도에 도착해서 그러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바닥에 앉아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단어를 외우는데 뭔가 이상했다. 시계를 보니 7시 45분. 사람도 우리밖에 없었다. 정말로 뭔가 이상했다.
그러던 와중, 일하는 직원이 오고 -하도 봐서 이제는 인사를 한다- 사람도 한명 왔다.
원래 여름방학때 미국에서 보는 토플시험은 사람이 적다. 오늘은 유난히 적구나 싶었다.
직원이 문을 열어주었고 우리는 우리의 이름과 도착한 시간을 적었다.
그리곤 의자에 앉아 적어야 하는 서류를 직원이 가져다 주기를 기다렸다.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 한명은 중년의 백인 여성이었다.
아무리 봐도 미국인 처럼 보여서 희한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성은 핸드백에서 두꺼운 종이뭉치를 꺼내 공부하기 시작했다.
'... 자기나라 말을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네. 도대체 얼마나 잘 보려구.'
나 역시 경쟁심이 들어 단어를 꺼내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8시 5분. 시험장에 들어가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직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곳 시험장이 서비스가 엉망인줄은 알았지만, 이건 좀 심한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핸드폰을 뒤적 거렸다.
뒤적 거리다 보니 대략 8시 15분. 나는 슬슬 불안해졌다.
'혹시, 서머타임?'
나는 다시금 시계를 보았다. 핸드폰 시계는 명확히 8시 16분 이었다.
'진짜 이상하네...'
직원에게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날짜가 보였다.
August 8, 2015
8:18 AM
등골에 땀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초침이 한번 딸깍하고 움직이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일어서다 말고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아니....아닐거야'
다시한번 핸드폰을 껏다가 켰다. 날짜는 변하지 않았다.
8월...8일...
그제야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옆에 중년의 여성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토플 시험 보러 오셨나요?"
중년 여성은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토플 시험에 뭐죠??"
스트라이크였다. 아마 그녀가 토플 시험을 본다면 토플시험에 뭔지 모르지는 않으리라.
나는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오늘... 오늘 무슨 시험 보러 오신 거에요..?"
그 여자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말했다.
"음, 오늘 보는 시험은 되게 여러가지가 있죠. 일단 저는 캘리포니아에서 쓸 수 있는 물리요법 자격증을 위해서 왔는데요. ...무슨일 있나요?"
패닉한 내 표정을 보며 여자는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오늘은 8월 8일이고, 어제가 8월 7일 이었지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리고 시험은 9시 30분에 시작하구요."
나는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고 가방을 싸서 직원을 만나러 갔다.
같이 온 오빠는 의자에 앉아서 코골고 자고 있었다. (도움 안되는 놈!)
직원에게 달려가 나는 "저기요, 제가 토플 시험을 보려구 왔는데요.." 하고 말문을 텄다.
일년동안 우리 엄마보다 많이본 직원은 나를 보며 결정타를 먹였다.
"그리고, 그건 어제였죠."
나는 울기 직전이었다. 나는 혹시 환불이나 일정을 변경할수 있는가를 물었다. 직원은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의사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적으며 아마도 안될것이라 말했다.
"그래도 회사에 전화는 해 보셔요."
나는 예, 예 하고 말했다. 머리가 멍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싶었다.
나처럼 멍청한 년은 없을꺼야. 쉼없이 스스로를 자책했다. 어떻게 하면 이런일이 일어나지?
직원가 대화를 마치고 다시 (오빠를 깨우러) 의자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자 중년 여성이 대화를 시도했다.
"무슨 일 인가요?"
나는 더듬더듬 설명했다.
"제가... 지금까지 항상 토요일에만 시험을 봤거든요. 이번에 처음으로 보는 금요일 시험이었는데, 바보같이... 오늘, 토요일날 와버렸네요."
중년 여성은 어쩌냐는 표정으로 나를 위로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네요, 하면서.
그 있을 수 있는 일이 23만원짜리 라는게 크나큰 문제였다.
나는 엄마한테 죽었다, 하고 생각하며 시험 잘 보기를 바라요 하고 떠났다.
선생님은 전화를 받으시더니 입에서 불을 뿜는 공룡처럼 소리를 질렀다.
나는 사회생활에 찌든 김대리 처럼 전화기를 붙들고 예...예... 죄송합니다.. 예.... 하고 공중에 허리를 굽혔다.
선생님은 화를 다 내시고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차 안에는 세명의 다른 학생들이 있었다.
차문을 열자 마자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졌다.
"아이구.. 수고하셨습니다."
한 남자 학생이 말했다.
옆에서 깊게 쪼개고 있는 언니도 보였다.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찾아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언니의 얼굴에 죽빵을 갈기는 것이였다. )
그것보다 나는 엄마한테 혼날것이 너무 무서웠다.
내년이면 스물인 나이에 엄마가 무서워서 전화를 못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엄마한테 전화를 안했다.
근데 엄마가 자꾸 전화가 와서 미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