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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보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도 들어본 적 있을 거야. 실수로 저온저장고에 갇힌 사람이 간밤에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실수에서 비롯된 불행에 대해 비극이네 희극이네 떠들어대지만 그 내막을 아는 사람한테는 그만한 우스갯소리도 없어. 그가 저체온증에 시달리며 죽어가던 그날 밤 저장고의 냉방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거든. 저장고 안이 바깥의 기온과 같은 상온이었다는 건데, 그럼에도 그는 죽었고 사인은 분명한 동사로 밝혀졌어. 그렇다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대답이 나올 새도 없이 남자는 말을 이어 나갔다.
“바로 생각이야. 저온저장고라는 장소의 일반적인 성격에 압도당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거지. 불안과 공포에 매몰되어 이성을 잃어버린 그는 기온의 변화가 없음에도 공기가 차갑다고 믿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때부터 그의 체온이 떨어지기 시작했어. 그렇게 그의 호흡은 점차 가빠졌고 몇 시간을 추위에 떨다 끝내 심장이 멎어버린 거야. 단지 춥다고 믿었던 그 생각 때문에 말이야.”
질문이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또 한 가지 사례를 말해줄게. 최면에 대한 이야기야. 이 또한 생각의 힘을 이용하는 요법인데, 여러 실험 사례 중에 그 위력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경우가 있어. 실험자가 피실험자의 손등에 동전을 올려놓고 불에 달군 동전이라고 최면을 걸면 실험이 끝났을 때 피실험자의 손등엔 빨갛게 익은 동전 모양의 자국이 남게 돼. 하지만 실험에 사용된 동전은 어떠한 열처리도 하지 않은 평범한 동전이야. 이 경우도 피실험자가 주입된 정보를 통해 뜨겁다고 생각한 것이 실제 감각으로 연결되어 화상을 입게 되는 거지.”
반응은 역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는 자신이 제시한 사례들에 스스로 만족하는 듯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차츰 그의 논지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오지? 생각, 생각의 힘이 중요하다는 말이야. 좀 더 공식화해서 표현하자면, 모든 감각 또는 감정은 사고에서 기인해. 기쁨과 슬픔, 미안함과 고마움, 편안함과 불편함 같은 것들을 봐. 그것들은 원인으로서의 매개체로 여겨지기 쉽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고를 원인으로 하는 결과라는 걸 알 수 있어. 생각, 즉 사고가 우릴 움직이고 느끼게 만드는 거지. 그리고 사고 체계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형성되는 거야. 조건반사라고나 할까? 그런 개념인 거지.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지능적인 집단생활을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사고고 관념이니까. 인간 이외의 동물이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본 적 있어?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하고 어떤 상황에 대해서 편안해하거나 불편해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어. 간혹 그런 듯이 보이는 동물이 있다 해도 그건 인간의 해석일 뿐이고 그들이 인간의 것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 아무튼, 그러한 사고 체계들은 인간이 서로와 이룬 사회 속에서 맺은 약속이야. 이는 개개인이 갖는 사회성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도 있어. 사회성이 발달한 사람은 감정 표현에 능숙한 반면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미숙하고 수동적이잖아. 이유가 뭐겠어. 사회적 약속으로써의 사고 체계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의 차이가 그와 같이 드러나는 거야.”
말이 길어지자 남자는 조금 눈치를 살피며 가볍게 목을 풀었다.
“조건반사라는 표현도 그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어. 우리가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을 때 우리는 미안해하지?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때는 고마워하고. 이런 감정들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적이라 여기지만 실상 이런 감정들은 명백히 기계적으로 발생해. 어떤 상황에 어떤 감정으로 반응해야 하는지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고민하지 않아. 학습을 통해 체득한 사고 체계가 있고, 그에 따라 주어진 상황에 맞는 감정을 이끌어내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니까. 투입-산출 메커니즘과 비슷하지? 어려울 것 없어. 감정의 표출이란 결국 그렇게 단순한 원리로 작동하는 거야.”
“그럼 내가 느끼는 불쾌함도 단순한 조건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오랜 시간 침묵하던 여자가 회의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그 역시도 학습의 결과물이니까. 다르게 표현하면 은연중에 이루어진 세뇌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지. 표현이 좀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나름대로 근거가 있어.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감정으로 반응하도록 교육받잖아. 그러한 교육이 우리를 사회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것이 모든 면에서 바람직하다고는 볼 수 없어. 책임질 수 있는 한 우리에겐 스스로의 의지로 상황에 대처하고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할 자유가 있어.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우리가 다들 배운 것과 다른 감정으로 반응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중요한 인지 능력이 결여된 사람으로 취급해버리지. 사고의 다양성을 묵살해버린 채 우리의 성향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고 무리에서 배제함으로써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반응하는 것을 막는 거야. 그리고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의와 도덕, 상식 등에 따른 심판이라 포장하지. 어때?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압제와 박해가 연상되지 않아? 마찬가지야. 결국 네가 지금 보이는 반응도 알게 모르게 이루어진 세뇌의 결과물인 거야. 그것도 아주 악질 세뇌. 추운 냉동고와 뜨거운 동전처럼 해가 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잘못된 정보의 주입인 거지. 네가 판단력을 상실한 채 앵무새처럼 거부 의사밖에 내비치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고.”
“……그럴싸하네. 그래서, 본론으로 돌아가면?”
“음…… 감정은 사고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는 얘기지. 그것도 종속 관계. 사고로 인해 야기된 감정들이니까 사고에 의해 지배된다는 거야.”
“사고가 감정보다 우위에 있다?”
“그래.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본질적인 얘기는 그게 아니야. 지금까지 설명한 것들은 앞으로의 얘기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전제에 지나지 않아.”
“복잡하네. 그럼 네가 하고 싶은 본질적인 얘기라는 게 뭔데?”
여자는 무료한 듯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차근차근 알기 쉽게 설명할 테니 들어봐. 나는 다시 조건반사라는 특성에 의미를 부여할 거야. 조건반사적이라는 말은 결국 훈련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훈련을 통해 기존의 사고 체계를 바꿀 수 있고 감정도 새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지.”
“호오, 그래서?”
“일단 들어봐.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진 감정들은 생활 곳곳에서 우리를 조종하고 있어. 이를 테면 죄책감.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은 도덕률의 세뇌를 통해 만들어진 감정이야. 한편 자부심 같은 것도 자랑스러운 일을 규정하여 동기를 부여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감정이지. 물론 이 감정들이 우리를 어떻게 이끌고 내모는가 하는 건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건 이 감정들이 인위적으로 형성된 사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거야. 내가 제시한 이론의 실제 사례라고나 할까.”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설명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내 감정도 질 나쁜 세뇌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넌 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네가 말하는 요지는 그거잖아. 이미 답은 나왔고 더 나올 얘기라 해봐야 빤한데 얼마나 더 설명을 질질 끌어야 돼?”
여자는 조금은 언짢은 말투로 비웃듯이 남자한테 물었다.
“가만히 좀 들어봐. 거의 다 왔어. 결론이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설명하려고 이러는 거잖아. ……알았어, 알았어. 바로 결론으로 들어갈게. 아무래도 다른 얘기를 더 하는 건 의미가 없어 보이니까. 빤한 얘기겠지만 네 감정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건 우리 관계에 있어서 결코 좋은 게 아니야. 난 너의 사고 체계가 정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해야 해.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면 접어두고 긍정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거잖아. 더욱이 이것은 훈련을 통해 가능해. 얼마나 멋진 일이야?”
“아, 그래?”
여자의 표정엔 이미 신경질적인 오묘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남자도 내심 위기임을 느꼈는지 설명은 더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우린 확신을 가질 때가 됐어. 몇 년을 이렇게 만나왔잖아. 어쩌면 늦은 걸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라도 난 네가 지금껏 가져온 의구심을 풀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내가 지금껏 한 말을 알아들었다면 너의 부정적인 시각이 진작 누그러졌어야 돼. 그러는 게 맞아. 우린 남이 아니잖아. 서로만큼 서로를 잘 아는 사람이 없어. 이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마지막 벽을 허물기 위해서라도 난 네가 생각을 가다듬고 그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아주었으면 해.”
짤막한 정적이 흘렀다. 여자는 굳은 듯 미묘한 표정으로 희박한 공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건반사적인 거야. 훈련이 가능하다고. 오랜 세월 세뇌된 탓에 당장은 내 얘기가 완벽하게 와 닿지 않을 수 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좋게 생각하자면 좋게 느끼지 못할 것도 없어. 너무 딱딱하게만 생각하지 말아줘. 우리 사이니까 그럴 수 있는 거야. 노력하면 되는 거야.”
남자는 조바심을 숨기지 못했다. 호흡은 불규칙해지고 자신감으로 전개되던 논지가 감정에 매달리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알 듯 말 듯한 여자의 표정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진짜 부탁할게. 나 혼자 좋자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제발 이해해줘. 네가 조금만 마음을 열면 정말 신세계가 열릴 거야. 단언할 수 있어. 만족시킬 자신 있다고. 제발. 딱 한 번만 받아줘. 눈 딱 감고 한 번만 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부탁해. 이 정도로 설명했으니까 더 말이 없으면 이해하고 받아들인 걸로 알게.”
붕괴의 조짐 끝에는 가소로운 최후통첩만이 남았다. 통보하듯 말을 마치고 남자는 여자에게 밀접했다. 가쁜 호흡과 함께 굵직한 팔뚝이 가냘픈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허리의 살갗이 맞닿자 마침내 여자의 표정에 확신이 섰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상기된 얼굴로 배 위에서 낑낑거리는 남자를 밀어내며 여자가 말했다.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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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