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신호등-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미친듯이 살아온 나날. 집으로 차를 몰고 가는 이 길에는 아무도 없다.
빨간 신호등. 멈춰야하나 지나가야 하나. 옛날에는 이런 고민 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없는 새벽에도 신호등 하나하나 멈춰가면서 행복해 했다.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착하게 살면 뭔가 다른 방법으로 보상이라도 받을 것 같은 기대.
난 그렇게 착하게 산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착하게 살지 못하게 만든 것 같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나쁜 놈들이 더 잘사는 세상이다.
일해도 소용없다. 내 1년치 연봉을 부동산 투기로 단 몇개월만에 누워서 번다.
아내와 별거한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일주일마다 얻어 먹는 아내의 밥도 이젠 질렸다.
나는 아내를 증오한다. 아내도 나를 증오한다.
모든 것이 증오로 뒤범벅된 삶이다.
빨간 신호등. 아무도 없다. 그냥 지나가자.
나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룸미러로 바라보는 신호등. 그런데 웬지 쾌감이 느껴진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포승줄의 매듭이 풀리는 기분이다.
"쳇....아무것도 아니군."
몇 백미터를 더 가자 다시 빨간 신호등이 나타났다.
"이런 오늘 x같이 신호에 많이 걸리네."
헉,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걸까? 이런 말 잘 하지 않지 않는가?
나는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오른발은 가속페달을 밟고 있었다.
30km/s....40....50....60.....70.........80......
오늘 너무 기분이 좋다.
이렇게 사는구나.
또 다시 빨간 신호등에 걸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감히 나를 세우려고?
80.....90....100!!!
미치겠다. 너무 좋다. 왜 고민하고 걱정하고 살았을까? 그냥 이렇게 사는거야.
다시 빨간 신호등이 나를 기다렸다.
차 한대가 정지해 있다.
"쳇, 바보같은 놈"
나는 정지해 있는 그 차를 추월하기 위해 차를 급하게 왼쪽으로 꺽었다.
바로 그 때 눈 앞에 분리대가 보였다. 나는 다시 오른쪽으로 차를 급하게 꺽어 살짝 피해 빠져나왔다.
"이야호!!!!!!!!!!!"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쥔 손을 치켜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지금껏 바보처럼 살았구나. 그래 내 가슴 깊은 곳에 감춰진 나의 본성이 살아나는구나.
계기판의 바늘은 계속 100km/h 이상을 가리키고 있다.
시속 80킬로 도로인데 과속 카메라는 연신 무슨 일거리라도 생긴것처럼 플래시를 터트렸다.
"그래.. 찍어라 18놈들아!!! 나도 한번 달려보자"
쭈욱 뻗은 도로...이제 신호등 하나 없다. 계기판의 바늘은 이미 140km/h을 넘고 있었다.
이제 차 한대 보이지 않는다. 너무 너무 적막하다.
소리를 지르고 싶다.
"우아아아아~~~~~~~~~~~~~~~~~~~"
그 때 눈앞에 신호등이 나타났다. 녹색 신호등.....녹색 신호등.....지나가기 싫다.
나는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밟았다.
"끼이이이이~~~~~~~~~~~익"
고막을 찢는듯한 굉음과 함께 차가 멈춰섰다.
나는 핸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때 녹색불이 노란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 한번 더 달려볼까?"
기어를 넣고 페달을 밟으려던 순간, 신호등에 이상한 신호가 떴다.
빨간색의 좌회전......
"뭐야? 색깔이 왜 저래?"
물끄러미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이 놈의 빨간색 좌회전 신호는 바뀔 줄을 몰랐다.
보행신호도 없고, 그냥 빨간색 좌회전. 그런데 나는 거부할수가 없었다.
뭔가에 이끌리듯.
'오.. 멋진데. 오늘 드라이브 한번 신나게 해볼까?'
나는 거칠게 가속패달을 밟아 핸들을 왼쪽으로 돌려 좌회전하였다.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가로등도 없고 어둠 속에서 나홀로 달리고 있다.
나는 속도를 조금 줄여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여기가 어디야?"
몇 분을 달렸을까? 아무도 없다. 사람도, 차도, 표지판도, 가로등도.....
"텅!!!!!"
뭐가 치였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아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헉... 사람이다.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 박부장이다. 내가 일하는 회사의 부장. 나쁜 놈이다.
부하들 공을 가로채고, 사장한테 살살거리는 놈. 딸 같은 여사원들하고 바람 피우면서 온갖 난잡한 짓거리 다하고 다니며
회사에서는 근엄한 척 하는 놈. 피범벅이 된 얼굴로 끙끙대며, 나에게 뭐라 한다.
"이봐...자네..저녁에 나.....약....속 있거든.....서...서..류.... 다 마무리 좀 해 놓고 아침에... 결재 받아..."
죽일 놈. 또 여사원들과 모텔 약속 있겠지. 그리고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구나. 차라리 죽어라.
나는 도로 옆에 있는 머리만한 돌을 치켜들어 박부장에 머리에 힘껏 내리쳤다.
"퍽!!!"
핏덩이가 얼굴에 튀면서 갑작스런 적막이 휩싸였다.
나는 천천히 차에 다시 올라탔다.
정의의 심판이다.
나는 급하게 화장지를 이용해 얼굴 여기저기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차를 몰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르는 소리를 냈지만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아싸 박부장 개새끼를 안보는구나.. 나쁜 새끼...쓰레기같은 새끼.."
내 차의 속도는 미친듯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텅!!!!!!!!!!!!!!"
또 뭐가 치였다. 눈 앞에 뭐가 붕 떠서 날아간 다음 데굴데굴 굴러갔다.
나는 다시 차에서 내려 누구인지 살폈다.
"아니 이자식은???"
나를 중학교 때 괴롭히던 자식...돈 뜯어가고 내가 좋아하는 같은 반 여자애 앞에서 개 흉내를 내게 하던 놈.
참지 못해 싸웠다고 그 부모들한테 개처럼 얻어맞고....아버지 없다고 무시하고.....
이 악마같은 자식이 꼬르륵 입에서 피거품을 물며 나에게 말한다.
"야......저....젓만아....내일.....돈쓸 데가 이...있거든......아...알았...지? 아...안가져 오면 .... 죽는다....."
나는 갑자기 눈이 충혈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쓰레기같은 자식. 너같은 놈이 사회에 나가면 쓰레기만 늘 뿐이다.
저승가서 많이 벌어라.
나는 차에 다시 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아주 천천히 차를 그 녀석 앞으로 몰았다.
그리고 왼쪽 바퀴를 그 녀석 머리에 맞추고, 천천히 아주 아주 천천히 차를 전진시켰다.
내 차의 왼쪽 바퀴가 그 녀석 머리위에 서서히 올라섰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물컹하는 느낌이 차에 전해 졌다.
난 정말 이 도로가 맘에 든다. 다 죽여버리자.
저 앞에 누가 서 있다. 군복을 입고 있다.
이런 군대 있을 때 내 고참 아닌가? 새벽마다 불러내 조인트 까고, 나를 개처럼 부리던 놈. 저 자식한테 근무지에서
맞은 것만 해도 내 평생 맞을 거의 반이 넘을 것이다. 정신병자 같은 놈. 화장실 들어가서 30초도 안되었는데 빨리 안 나온다고
문 열고 들어가 두들겨 패는 놈. 식당에서 밥 안차려 놓았다고 식판을 얼굴에 엎는 놈.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는 놈.
내 차가 달려가고 있는 것을 알기나 하는걸까?
삐딱하게 선 자세로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담배 하나 입에 물고 나를 쳐다본다.
그 찢어버리고 싶은 주둥아리에서 더러운 웃음을 지으며
니가 살아있다는 것은 세상의 치욕이다.
어차피 제대해서 널 길거리에서 만나면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그냥....오늘 죽어라.
나는 가속 페달을 있는 힘껏 밟았다.
"부아아~~~~~~~~~~~~앙!!"
그 자식 얼굴이 시속 100킬로가 넘게 다가온다. 내 입가에 작은 미소가 들어섰다.
"굳 바이."
"퍽!!!!!!"
핏물이 전면 차유리에 범벅이 되었다.
나는 조용히 와이퍼를 작동시켜 핏물을 닦아냈다. 핏물로 그려진 두 개의 부채가 내 앞유리를 장식한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다시 전진 기어를 넣고 차를 몰았다.
원래 나의 모습이다. 잔인한 나의 모습. 왜 감추고 살았을까?
얼마를 달렸을까? 몇 시간을 달린 것 같다.
정말 몇 시간을 달린 것 같다. 아무도 없다. 정말 아무도 없다.
또 다시 몇시간 처음으로 표지판이 나타났다.
'전방 1km.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
"뭐? 뭐가 길이 없어. 그냥 내가 길을 내마."
나는 오히려 가속페달을 더 힘껏 밟았다.
이젠 왕복 2차선도 1차선으로 좁아졌다.
저 앞에 누가 서 있다.
여자다. 익숙한 몸매, 익숙한 얼굴. 내 아내다.
내가 너를 왜 싫어했을까? 나는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빠이고 싶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가 돈벌어오는 기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가족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온몸이 으스러지는 열병에 걸려도 나는 회사로 출근해야 했다.
그러는 내 앞에서 돈만을 외치는 너를 보면 정말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다.
나의 두 뺨에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른다.
"잘 가...."
"끼이이이이이~~익"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듯 합니다."
눈을 뜨고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걸까?
경찰복을 입고 있는 한 남자가 아내에게 말한다.
"조금만 더 달렸으면 그대로 강으로 추락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에 정신을 차리고 브레이크를 밟은 것 같습니다.
혈액 검사 결과 음주는 아니고 졸음운전 같습니다."
그 경찰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아내에게 전해준다.
"이것을 손에 쥐고 있던데요. 가족 사진인가 보네요."
경찰은 뒤돌아 문을 열고 나선다.
아내가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린다.
아내는 정말로 내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당신이라는 인간으로 보험금 타내기도 힘들군. 얼마나 약을 더 처먹어야 죽지?
이제 좀 더 자주 만나 식사를 해야겠군."
왜 마지막에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을까?
한쪽 뺨에 작은 물줄기가 느껴진다.
이제 이 붕대를 풀고 일어나면 어쩌면 다시 빨간색 좌회전 신호등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당신의 약물이 만든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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