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은 소련이 북조선을 도운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한국의 최초의 해군함 백두함에 대한 kbs프로에서의 증언중
부산을 공격하려는 북조선의 배에 "소련군이 가득했다"는
우리해군 최초의 전투함 승무원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 증언은 1. 밤에 2. 적의 배에 무장한 장병들이 북조선군인지 소련군인지?
어떻게 확인하는가?라는 의심이 간다.
1. 소련이 김일성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미국을 도운 것?
유엔 안보리에는 상임이사국 5개국이 거부권이 있다. (당시는 미, 영, 불, 소의 4개국)
진정 소련이 북한을 도우려했다면, 1950년 6월 27일의 유엔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회의장을 빠져나갔다/불참하였지.
왜?
소련은 49년 베를린봉쇄로 틀어진
유럽에서의 미국의 견제를 회피하기위해
6월 27일의 유엔안보리회의에 불참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소련이나 미국이나 같은 백인부류에 지나지않는다는 사실과유고의 티토처럼 소련의 말을 안듣는 북한에 대한 방관이다.
그러므로 소련이 김일성을 도왔다는 것은 전혀 사실무근.
오히려 소련은 미국을 도왔다.
해서 서울을 3일만에 점령한 북한군은 개전초기의 화급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유엔에서의 소련배신에 충격을 받아 서울에서 진격을 3일이나 지체한 것으로 보인다.
엠비씨 ㅡ이제는 말할 수 있다-추후 일자확인요망
2. 미국의 농간
1월 12일 "미국의 방위선에서 남한이 제외된 "애치슨라인에 따른 전쟁유도의 과정은
결국 '미국이 유엔을 통해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미 90년 제 1차 페르시아전쟁에서 확인된 것처럼
(2003. 3. 22. 추적 60분.
미국의 국방부 부대변인이 "미국은 쿠웨이트를 지킬 의무가 없다"며
후세인의 쿠웨이트침공을 꼬시는 미국. 참조)
그래서 개전이후 열린 유엔안보리에서의 소련의 거부권불행사가
조명을 받아야 한다.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바는 당시 중국의 유엔회원국지위문제로 소련이 불참한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구체적 설명을 하고 있는 <그림자 정부. 정치편>에서는
"회의가 개최되자 소련대표가 자리를 나갔다"이다.
그리고 설사 중국 문제때문이라 하더라도
그런 중차대한 문제에 참여하여 거부권행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것 아닌가?
당시 미국은 49년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자
수소폭탄을 만들어 세계유일강국의 지위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원폭의 피해를 목도한 과학자들이 수폭의 개발에 반대하였다.<과학, 종교, 윤리의 대화 50-51쪽>
그래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를 학수고대하였고.
전쟁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또한 맥아더의 주일 미군은 6월 11일부터 비상대기상태였다.
<the origins of korean war 1947-1950> 미번역본
3. 과연 미국이 김일성의 남침을 몰랐슬까?
박헌영의 여비서는 미국공작원 엘리스 현이다.
몽양일대기인 <혈농어수>참조
해서 이태의 <남부군>에서 언급된 바,
"북한 간첩들이 남파시 사전에 비밀이 많이 새어나갔다"
미국이 사전에 몰랐다는 것은 세계최강국인 미국의 존재를 고려하면 말이 안되는 것이다.
또한 박명림의 책에서처럼 한국전이 단지 김일성의 의욕때문이라는 식이면
김일성이 약먹어서 그런 미국과 싸워 이길려고 전쟁을 도발하였단 말도 안되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소련의 거부권을 믿었던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배신당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탈린으로 하여금 거부권행사를 막은 미국은
한민족을 희생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꾀하였다.
또한 아리기 <장기 20세기>증
"마샬플랜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서유럽을 미국 이미지에 따라 재형성하기 시작하였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세계무역과 생산 팽창의 '이륙'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 말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달러 부족 때문에, 유럽에서 미국의 기반을 강화한다는 그 목표 자체는 심각하게 방해받았다,......
유럽 통합과 세계경제 팽창을 위해서는 마셜플랜이나 다른 원조 계획에 연관된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으로 세계 유동성은 재순환시켜야 했다. 결국 이런 더욱 포괄적 재순환을 실현시킨 것은 세계역사상 평화시에 가장 대대적으로 무장을 추진하려 한 노력이었다. 그 입안자인 국무부 장관 애치슨과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폴 니츠는 이런 노력이 있어야만 마셜플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498쪽
"이런 새로운 정책 노선이 1950년 초 국가안전보장위원회에 제안되었고, 4월에 트루먼 대통령은 그 입장을 보여 주는 보고서(nsc-68)을 검토하여 원칙적으로 승인하였다, ....
반공주의라는 명목을 내걸더라도,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의회에서 어떻게 그런 돈을 타낼 수 잇는가는 행정부에게 적지 않은 고민거리였다. 무언가 국제적인 긴급사태가 필요했고, 1949년 11월부터 애치슨 장관은 조만간 1950년에 아시아 주변지역에서 그런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는데, 그 지역은 한국, 베트남, 타이완 중 하나 또는 그 셋 모두였다, 대통령이 nsc-68을 검토한 두 달 후 위기가 발발했다. 애치슨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었다.'"-499쪽
"한국전쟁 중, 그리고 그 후의 대대적인 재무장이 전후 세계경제의 유동성 문제를 영구히 해결해 주었다, 외국 정부에 대한 군사원조와 해외에서 미국의 군사비 직접 지출- 둘 다 1950년에서 1958년 사이와 또다시 1964년에서 1973년 사이에 꾸쭌히 늘었다-이 세계 경제 팽창에 필요한 모든 유동성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매우 관대한 세계 중앙은행으로 작동하는 미국 정부와 더불어 세계무역과 생산은 전례없는 속도로 팽창했다."-500쪽
이러한 미국의 육이오 전쟁에 대한 사전 인지의 증거는
"NEO는 미 국무장관 또는 국방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미국 대통령이 발령하며, 1950년 한국전쟁을 처음으로 지난 60년간 전세계에서 총 14차례 가동됐다. 앞서 지난 1994년,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기 직전까지 한반도 위기가 고조됐던 1차 북핵위기때도 NEO 발령 직전까지 갔던 적이 있다."
[출처] : 뷰스앤뉴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69857 미국이 6월 22일경 자국민을 한국에서 철수시켰던 것은 한국전의 발발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남한에 대하여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이미 건국이후부터 미군이 남한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마당에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와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주한미군사령관은 대한민국 국방군을 계속하여 조직, 훈련, 무장할 것을 동의하며...
대한민국 국방군에 대한 전면적인 작전상의 통제를 행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여전히 군 작전통제권은 미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비평. 1998년 봄.> 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