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쟁이들을 피해 도망다니던 엄마는 그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집에 전화를 해서 안부를 알려주곤 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가을날, 엄마로부터 전화를 못 받은 지 한 달이나 지났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문득 '엄마가 자살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엄마 안 보고 싶냐고 물어봤다. 걔는 뜬금없이 '김치라면 맨날 끓여 먹는게 좋다'고 대답했다. 나는 무서워 죽겠는데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걔가 원망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를 못 본 지 반 년 가까이 된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애가 그런 대답을 했으면 마음 아플만큼 어른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난 그때 걔의 그 여유 있어보이는 모습에 배신감 같은 느꼈다. 그래서 '너는 엄마 보고 싶지도 않냐'면서 등을 한 대 때렸었다. 사실 세 대 때렸었다.
동생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엄마가 없어진 뒤로 걔가 우는 건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울어도 "엄마아"하며 콧물 한 방울 흘리며 울었다.
당황스럽기도했고 미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이 어린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건가 생각이 들어 맘이 엄청 아팠다. 엄마가 어디 갔는지도 모른 채, 반 년 넘게 엄말 못 본 꼬맹이가 엄마를 찾으며 길바닥에서 울고 있는 게 슬펐고, 그게 나 때문이라는 건 말도 못하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소매로 걔 눈이랑 코를 훔치면서 집에 가자고 했다. 그날은 친구네서 김을 얻어와서 동생을 줬었다. 그래도 걔는 김치라면만 먹었다. 사실 밥도 없는데 무슨 김이냐. 나도 김치라면만 먹었다.
벌써 그로부터 13년이 지났다. 얼마 전 어머니로부터 걔가 내년 5월엔 시집 갈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다. 뜬금없이 '김치라면 맛이 어땠더라?' 궁금해졌다. 기억나지 않았다. 동생도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