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이 감행한 도박이란 부견에게 한통의 서찰을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랬다.
"그대의 군대가 깊이 들어왔는데 강 근처에 진영을 세우니, 이는 곧 지구전의 계책인지라 속전속결이 아닌 듯하다. 만약 그쪽에서 진채를 옮겨 조금 물러나주면 우리의 병사가 건널 수 있게 되니, 그때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즉, 질질 끌지말고 한판 제대로 붙어보자는 도발이었다. 쪽수도 딸리는 쪽에서 대놓고 얼른 싸우자고 덤벼드들며 속을 긁으니 부견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배알이 뒤틀릴 수밖에.
그러나 부견은 이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부견의 속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그렇게 조건을 맞추어 줘도 자신 있어서 였을까? 전쟁에서 적을 믿는 것 만큼 바보같은 짓은 없다. 그리고 부견은 그런 짓을 할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오히려 동진의 이와같은 요구를 역이용하고자 했던 계산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저번 글에서 언급했듯, 강을 건너는 동안에 있어서 그 병력은 진영이 흐트러진다던지, 물에 몸을 담고 있기에 무방비 상태가 되고 싸우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불리하다. 헌데 동진군이 고맙게도 제발로 강에 뛰어들겠다고 자청해왔으니 부견의 입장에서 어찌 기쁘지 않았을까. 즉, 동진군이 도하하는 사이, 공격을 감행하여 끝장을 보려했던 것이다.
근데 사석이 이 기본적인 계책을 깨닫지 못했을까? 아무리 초반의 승리로 고무되었다고 해도 어느 바보가 강을 건너 전면전을 펼치려 했을까. 앞서 말했듯, 사석은 운명을 건 도발을 감행했다고 했다. 앞 이야기를 읽어본 분이라면 주서와의 내통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제 그 내통을 써먹을 때가 온 것이었다.
어쨌거나 부견은 계약대로 병력을 비수부근에서 뒤로 물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후퇴와 함께 동진군의 도하도 시작되었다. 추측이지만, 동진군의 도하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을 것이다. 승세를 타고 돌격하는 군대에게 강 하나 쯤 건너는 것은 일도 아니다. 게다가 당시 동진군의 주력은 기병이었다고 하니 그 속도가 어땠겠는가.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사석-주서의 내통계책이 작렬하게 된다.
"秦兵敗矣!"
"아군이 패했다!"
전진군의 후방에서 이와같은 외침이 퍼져나갔다. 주서의 선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주서는 말을타고 대열을 뛰어다니며 이 말을 외치고 다녔다. 그 효과는 대단했다. 그 말을 먼저 접한 후방의 병력이 먼저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후방에서는 앞에서의 전황을 잘 모르기 마련이다. 헌데 갑자기 아군이 패했다는 얘기가 퍼지기 시작하니 소문에 금방 휩쓸렸을 것이다. 사람의 공포심이란게 참 대단한게, 이 말은 후방에서 앞쪽 대열의 선봉에까지 삽시간에 퍼져 이제는 전진군 전체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마침 바로 앞에서 돌격해오는 동진의 기병도 공포 분위기 조성에 한 몫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비수대전도 - 사석, 사현이 전진의 백만대군을 물리치다>
참으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진군이 우왕좌왕 공포에 질려 무기도 팽개치고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와중에 서로 밟혀 죽은 이가 헤아릴 수도 없었다 한다. 뿐만인가. 바로 그때를 노려 동진의 기마대가 패주하는 전진군을 덮쳤다. 자고로 고대전에 있어서 기병의 위력은 대단하다. 일개 보병은 그냥 순삭당하기 마련이다. 동진군이 달아나는 전진군을 '학살'하며 쫓는 사이, 각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전진군도 본대가 박살나는 꼴을 보고는 덩달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황제가 친히 나와있는 전선이 그모양 그꼴로 당하고 있으니 하물며 다른 교전 중인 전선들은 어떻겠는가. 사기가 급저하되며 역시 도망가기에 바빴다. 총대장 부융이 병사들을 진정시키며 후퇴를 막아보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부융도 동진군의 창에 꿰여 죽고 말았다.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전진군
이를 쫓는 동진군
부견은 어땠을까. 그도 장수들은 물론 병사들이 갑자기 왜 달아나는지도 모른채 수하장수들에 이끌려 도주하기에 바빴다. 천방지축 달아나던 중 등에 화살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고 하니 위아래가 모두 참혹한 꼴을 당한 것이다.
뭣빠지게 달아나는 부견
이 전투를 비수대전이라 하며, 중국의 3대 대전에 속한다(관도대전, 적벽대전, 비수대전). 살아서 장안으로 생환한 전진군은 모용수가 통솔하는 3만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한판싸움으로 전진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독립하는 세력들이 속출한다. 국력이 크게 쇠했다기보단 이 싸움을 계기로 우습게 보인 것이다. 결국 이래저래 영토가 찢겨나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에 관련되어 사안의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보겠다.
동산보첩도: 사안이 바둑을 두고 있고 멀리서 파발마가 달려오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전투가 끝났을 무렵, 사안은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때 승전을 알리는 파발마가 날듯이 뛰어와 사안에게 서찰을 건넸다. 이를 받아든 사안은 천천히 서찰을 읽어내려가더니 아무일도 없다는 듯 탁자에 놓았다.
"무슨 내용입니까?"
손님이 묻자 사안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어린 아이들이 적을 물리친 모양입니다."
마치 어린 손자가 문 밖에서 뛰어노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바둑돌을 내려놓는 손길은 떨리고 있었다.
"악수(惡手)로군요."
손님이 웃었다.
"이런 소식에 동요하다니, 이 늙은이가 주책입니다."
애써 태연을 가장했지만, 문지방에 신발이 부딪혀 굽이 부러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흥분해 있던 사안이었다.
여튼, 이 전투로 전진은 분열되기 시작하고 동진은 한차례의 국난을 넘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