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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타소리를 참 좋아한다.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노래방은 싫어한다.
내 기타반주에 스스로 부르는 노래에 홀로 감탄하는 나는
늘 슬픈 노래를 즐겨 불렀다.
스무살 시절 송창식씨의 포크송에 매료되어 따라해 보고 싶었고,
김세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많이 부러워서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한 달 월급 만원이 되지 않던 철공소 직원은 열심히 돈을 모아 악기점에 들렀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기타 싼거 하나 주세요”악기는 엄청나게
비쌀 거라는 생각에 그렇게 말이 나왔다. 합판으로 된 정말 싼 기타를
4천원에 구매하고 너무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와 손가락이 패이도록 열심히
연습을 했지만, 나는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악보를 볼 줄 몰랐다.
공장 형이 축구공과 바꿔준 넥에 금간 클래식 기타로 기본 계명를 칠 줄 알았고,
가요 악보에 그려진 기타 코드중에서 내가 잡을 수 있는 오픈 코드
대여섯개 단지 그것만 안보고도 손이 따라갈 만큼 연습할 뿐
튜닝이라는 개념도 몰랐다. 계명을 한 번 쓱 쳐보고 뭔가 자연스럽지 않게 들리면
바른 소리라고 느껴 질 때까지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음을 맞추었을뿐.
외울수 있었던 계명이 고향의 봄과 비행기 학교종... 내 기타에 노래를 불러야지 그래서
코드연습을 하면서 처음 도전한 곡이 김세환의 토요일밤에 였다. A, D, E 코드만 있으면 되니까...
더듬더듬 A코드잡고 기~인 머리...다시 더듬더듬 코드 바꾸며 짧은치마...
결국 일주일 걸려서 토요일밤에를 끊기지 않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박자는
내 호흡따라 가는 것이고, 주법도 엉터리지만, 나의 자신감은 차올랐고 한 달 정도 지난 후
열곡 이상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자신감에 거리 진출을 하게 되었다. 골목 평상에 앉아 노래를 하면 동네 친구들이 나와서 함께 부르며 즐거워했다. 기타 음정은 내 목소리에 맞게 조율되어있고, [내 목소리는 특이하게 중성적인 하이톤이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내 음정에 맞춰 노래하기 힘들어했지만, 난 여전히 정튜닝 따위는 알지 못했고,
그건 무려 30년간 내 마음대로 였다.
가끔 방송을 들으며 같은 코드로 맞춰 보려해도 전혀 다른 음정이 나는 것을 이해를 못할 정도로
음악에 무지하면서도 난 노래를 불렀고 다행히도
듣기 싫어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게 지금도 불가사의 하다.
어쨌든 나는 내 노래에 내가 반주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다들 잘한다는 칭찬에 고무되어
엉터리같은 기타를 치며 혼자만의 음악세계에 젖어 어딜가나 기타를 메고 다녔다.
그동안 기타를 두 번 정도 바꿧고 컷어웨이도 가져보고 9현 기타도 삿었다. 역시 싼걸로.....
동네 평상에 앉아 친구들과. 자정이 다가올 때까지 떠들어 대던 즐거운 시절은 슬프게 막을 내렸다.
코드 말고 멜로디도 함께 연주하며 더 잘치는 기타를 배우고 싶어 기타학원을 가려고 마음 먹었던 시점에
공장에서 일하다 프레스에 왼손 중지 반마디를 잘리고 말았던 것.....절망
악보를 보며 제대로 기타를 연주하고 싶었던 소망은 끝나 버렸고 나는 지금도 멜로디 연주를 못한다.
다만 튜닝은 정튜닝을 하고 있다.
손가락이 잘린 후 회복되는 동안 드럼을 배우러 다녔다. 하지만, 이후로도 기타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아서
아문 손가락에 면반창고를 얇게 겹겹이 잘라 붙이고 기타를 쳐봤지만, 몇 년이 지나 결국 맨손으로
코드를 잡을 만큼 감각을 살려냈다 다만 짧아진 손가락 길이만큼 많이 힘들어 졌지만,
그래도 오로지 독학으로 익힌 주법이 정통 주법과 흡사했고, 오픈 코드로만 연주하던 내가
하이코드를 쉽게 연주하게 된 것은 스스로 대견하다.
유투브에 그렇게 많은 기타 강좌가 있는 줄 진작 알았다면 좀 더 배울 수 있었을테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부르는 노래소리가 참 듣기좋다.
남에게 말하기 만망한 이 얘기를 안젤라에게 들려줬더니 자기도 듣기 좋단다. 그러면 된거지.
나중에 삼락공원 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크게 기타치며 노래할 계획이다.
이제 안젤라와 기타에 대한 얘기를 할 시간이다.
13살부터 시작된 철공소 일은 작고 약한 나를 서서히 병들게 했고
23살 무렵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지만, 병원에 갈 수 가 없었다. 너무 가난해서...퇴직금도 없고
손가락 잘린 보상금도 못 받은 나는 일을 그만 두었고, 7시에 눈을 떠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게
너무 힘들어 9시나 열시에 겨우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그래도 힘든 일을 하지 않으니 천천히
회복되는 듯 했고,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약을 준다는 수녀회 병원을 찾아 가기로 했다.
수많은 환자들에게 둘러싸인 수녀님은 소변을 잘 못본다는 나의 얘기를 듣고 그건 비뇨기과 문제라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사실은 신장이 망가지는 중이었는데....
나는 단념하고 돌아서는 중에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수녀님을 우러러 보게 되었고,
저런 착한 사람들이 믿는 종교는 어떤 것일까 생각했다.
때 마침 그 퇴원하는 환자에게 성당 꼭 나가시라며 무언가를 쥐어 주시는 수녀님을 발견하고
나도 성당 가고 싶으니 그거 하나 달라고 했다. 그것은 성당 입교 권유문일 뿐이었지만,
외래에서 온 환자가 그것을 달라고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기꺼이 안내를 해 주셨다.
물론 나는 그때에 천주교는 마리아교라고 일고 있는 종교 무지렁이었다.
집에서 버스로 15분 쯤 걸리는 성당 교리반에 나가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8개월을 교리공부하고 세례를 받게 된다고 했고 이미 두달이 지난 뒤여서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교리강좌를 맡은 수녀님의 질문에 가장 대답을 잘하는 예비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성당에 가면 친구가 없던 나에게 모두 다정하게 대해 주는 중에서도 교리반
내 맞은 편 자리에 앉아있는 윤기나는 머리카락이 어깨에 찰랑거리던 귀여운 아가씨를 볼 때마다
너무나 가슴이 설렜다.
물론 말 한마디 못붙이고 교리반이 마치면 멀리서 그 모습을 아련히 바라보다 혼자 돌아오곤 했는데
나중에 물어 보니 그녀는 내 모습을 보며 아련했었다고 하더라.
하는 일이 없다보니 시간이 많아 거의 매일 성당에 갔다. 교리받던 건물은 구성전이고
새 정전을 짓는 중이라서 젊은 이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시기라서 예비신자이면서도 아주 열심히
성당에 나가 도움될 일을 찾아했는데 청년회원들의 수고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신부님은 청년 휴게실을
마련해 주셨고 거기에서 커피, 차를 팔아 기금 마련도 하고 여러 행사 준비도 했지만, 사실은 놀이터였다.
거기에 기타가 있었고, 슬쩍 한 번 쳐봤는데 사람들이 아주 좋아했다. 조물조물 코드 정도 잡는 친구들은
몇 있었지만, 완곡을 칠 수 있는 친구는 대학생 하나였다. 쓰리핑거 주법과 아르페지오로 연주하며
노오란 목소리로 노래 잘 하던 그 대학생은 훗날 사제가 되셨다. 그래서 나도 집에 있는 기타를
성당으로 가지고 와 성당 휴게실의 베짱이가 되었다. 세례를 받기도 전이었는데 유명해져 버린 것,
게다가 청년회 회지를 만드는데 글만 있고 삽화가 없다는 말에 대뜸 삽화를 그려달라는 말에
원고를 받아들고 여백에 삽화 그리느라 밤새기가 일쑤였다.
술과 유흥을 알지 못해 친구도 없고 혼자서 영화를 보러 가던 외톨이가
어느새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지지를 받는 내가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엄청난 변신을 하고 있었다.
자신감과 열정이 넘치는 성격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고집은 여전해서 누군가
어떤 노래를 불러 보자고 하면 그 가수는 싫다면서 거부하고,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만 불렀던 어이없음.....
그러던 중 교리반을 졸업하고 1983 성탄절에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날 까지도 그녀에겐 한 마디 말도 못해 본 상황....
그녀가 세례명을 안젤라로 정했다는 사실만 마음에 새겼을 뿐...
세례를 받기 며칠 전 교리가 끝나 보기 어려울 줄 알았던 그녀를 성당에서 보게 되었는데
성가연습을 하러 온거란다. 같은 교리반에 수업받던 까시아노라는 친구가 안젤라와 나란히 앉았던
세 아가씨를 꼬드겨서 네모퉁이라는 이름으로 참가 신청을 했고 며칠째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갑자기 절박한 심정이 되면서 왜 내게는 말도 안했냐고 나도 끼워 달라고 말했지만, 이미 4인조로
확정된 네모퉁이라는 이름 때문에 안된다는 말에
‘그럼 내가 모퉁이에 붙은 밥풀이 될게, 네모퉁이와 밥풀하나 어때?’
시큰둥하는 그들에게 ‘난 DRUM이 있어 잘 치지는 못해도 드럼을 치면서
노래한다면 분명히 멋질거야 점수를 잘 받을 거라고....’
drum이라는 말에 아가씨들은 모두 환호하고 떨떠름하던 까시아노도 결국 수용 나는 밥풀떼기가 되어
그녀의 귀퉁이에 붙을 수 있었다.
리듬은 쉬운 고고와 왈츠라서 무난히 맞춰 나갈 수 있었고 우리는 2위로 입상했다. 그 이후 나는
자연스럽게 안젤라와 대화할 거리가 생겼고,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안젤라는 회사원이었고 일 잘하는 선배이자 좋은 언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몸이 아파 하는 일 없이 쉰다는 내 말에 안젤라는 회사를 알려주며 심심하면 놀러 오라고
커피 사주겠다고 했고 인사치레라는 것을 모른 눈치없는 난 여러 번 회사 앞에 찾아가 전화를 했었다.
길커피를 한 잔 씩 마시고 돌아오는 길은 정말 행복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감히 상상도 못했지만,
사랑이 시작되었었나 보다.
커피 한잔은 국수 한그릇이 되고,
그녀와의 대화는 조금씩 더 길어지고 그렇게 서로가 조금씩 가까워 질 무렵 나는 성당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사무장과 사무원이 동시에 그만두게 되어 평소에 청년들의 봉사에 관심이 많았던 성당 총무부장님이
나를 추천하신 것인데 이 또한 불가사의한 일이다.
나의 공식 학력은 국졸, 야학에 1년 다녀 쉬운 영어 단어 겨우 읽을 수 있고 철공소 출신이라 사무직은
무경험이었는데 그 분이 하신 말씀은 ‘너 전화는 받을 수 있지? 전화만 받으면 돼! 그렇게 전화만 받으면 된다면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출근했지만, 교적 서류 정리가 내 주업무였다.
이력서를 냈다면 불가능했을 취업은 이렇게 이루어졌지만,
나는 남다른 노력으로 훌륭히 업무를 소화해냈고 전임자의 서류를 펼쳐놓고 예쁜 글씨를 흉내내며
매일 한시간 이상 글쓰기를 연습해서 예쁜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신부님께 올리는 결제 서류는
타자기로 쳐야했는데 만져 본 적 없는 타자기를 주시며 신부님 하셨던 말씀 ’너 타자 칠줄 아니? 아뇨...
그럼 배워라 그게 다였다. 너 컴퓨터 할 줄 아니? 아뇨.. 그럼 배워라.
답답한 나를 믿고 보아주신 신부님 감사했습니다.
내가 취직을 했다니 자기일 보다 기뻐하면서 출근용 가죽가방을 선물해주었던 안젤라
우리는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었던 걸까?
나는 내 처지를 알기에 안젤라를 좋아한다는 감정까지만 스스로에게 허락한 상태였다.
성당 퇴근 시간이 되면 서둘러 정리를 하고 남포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녀가 근무하는 곳으로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준 그녀와 간단한저녁을 먹고 버스 종점까지 걸어간다.
나란히 앉아서 집까지 가려고....
그녀의 휴일은 일요일, 성당의 휴일은 월요일 우리는 그렇게 4년의 시간을 주로 저녁에 만나 버스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데이트를 했었다.
그녀의 집은 성당 아래 있었고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15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정류장에서 집까지 가는 길이 성당 가는 길목이어서 아는 사람도 자주 만났고 우리는 어느새 모든 사람에게
연인으로 인정되어 버린 듯했다.
그녀의 생일이 되었다.
그녀에게 기억에 남는 선물을 해주고 싶었지만, 여전히 가난한 나는 꽃과 케익과 기타를 들고 그녀를 만났다.
성당 청년들이 대부분 대학생들이어서 그들의 모임에 따라갔다가 낙동강변에 에덴공원 근처에
갈대로 울타리를 엮은 간이 주점 같은 곳을 간 적이 두어번 있었는데 참 인상적이고 좋았었다.
호기롭게 그녀의 손을 잡고 들어갔던 그곳은 이름이 아마 강변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중앙 쯤에 통나무 탁자에 자리를 잡고 어슴프레한 백열등 아래서 탁자에 케익을 내려놓고
손에 꽃다발을 쥐어 준뒤 여전히 내목소리에 맞게만 튜닝된 기타를 튕기며 생일 축하 노래와
몇곡의 노래를 불러 준 것 같다.
이종용의 겨울아이를 불러 주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대학생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KANSAS의 DUSR IN THE WLND를 불렀다는 것이다. 생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뚱 맞은 노래를....
하지만 노래가 끝나자 주변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었다.
“그때 자기가 기타 안쳤으면 결혼 안했다” 라는 말은 이날의 이벤트 였던게 아닐까 혼자 추측해 본다.
겨울에 생일을 맞는 안젤라를 위해 수년간 겨울아이를 불러 주다가 딸들이
쫌 고마해라 하는 바람에 실망해서 몇 년간 그 노래를 혼자 몰래 부르지만,
올 겨울에는 불러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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