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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망망대해에 표류한 지 15일째.
조성환과 엄도준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나눠 먹는 중이다. 구명보트에 남은 유일한 음식. 알루미늄 캔 속의 끈적끈적한 국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신다. 운 좋게 구조된다 하더라도,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니.
가만히 앉아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두 남자.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려면 말도 아껴야 한다.
꼬르륵
.
.
.
꼬르륵, 꼬르륵...
.
.
.
꾸륵, 꾸르르륵...
구명보트 밖으로 팔을 늘어뜨린 엄도준. 뜨거운 태양에 벌겋게 익은 손을 물속에 넣어보지만, 오줌만큼 뜨끈한 바닷물에 더위가 식힐 리 없다. 꼬르륵... 배가 고프다.
물속에서 조그마한 무언가가 움직인다. 최장수 음료 포카리스웨트처럼 뿌연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물고기다. 엄도준은 한숨을 깊이 쉬며 입을 뗀다.
"성환아, 물고기네."
"응..."
두 남자는 다시 잠을 청한다. 배고픔을 잊을 수 있는 건 잘 때뿐이므로.
(다음 날)
극심해진 허기에 힘이 빠진 엄도준. 멍하니 수면을 바라본다. 반나절이 지났을까. 어제 본 물고기가 생각난다.
(그다음 날)
온종일 가만히 누워있던 엄도준이 상체를 일으켜 통조림 캔을 집어 든다. 그리고 바닷물에 넣어 이리저리 휘젓는다. 있는 힘껏. 입을 다시며...
"야, 뭐해?" 조성환이 묻는다.
"..."
"지금... 물고기 잡어?"
"..."
"돌았냐? 쓸데없이 힘 빼지 마... 사람이 그걸 어떻게 먹어?"
엄도준은 그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역사책에서 읽은 어떤 일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먹을 게 없어 신발 밑창과 벨트를 뜯어 먹었다는 피난민들의 이야기였는데, 몇몇은 탈이 나서 그간 먹어둔 것까지 게워낸 후 죽었다고 했다. '그래, 성환이 말이 맞다. 쓸데없이 힘 빼지 말자.' 엄도준은 꽉 쥐고 있던 파인애플 캔을 놓아 버린다.
꼬르륵, 꼬르륵...
.
.
.
꼬르륵...
.
.
.
꾸르르륵...
굶주림의 소리만큼 끊이지 않는 건, 엄도준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음식 생각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구워낸 타란툴라. 남프랑스산 밀웜 가루로 빚고 흰점박이꽃무지 유충으로 안을 채운 트러플 크림 라비올리. 캐러멜 입힌 유기농 귀뚜라미로 토핑한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엄도준은 결혼기념일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은 저녁 식사를 떠올렸다.
'아내가 참 좋아했었지. 지금 이렇게 죽게 될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걸. 요즘은 마트에서 뭐만 집어도 200만 원이라며 생활비를 더 달라 했을 때, 화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물가는 핑계였던 거다. 아내는 캄보디아 양식장에서 대량 사육한싸구려 물방개 대신, 남들처럼 캐나다산 자연 채취 딱정벌레로 장바구니를 채우고 싶었던 거다. '저축이고 나발이고, 사람답게 먹고 싶은 거 먹고살자는 소리였는데...'
어릴 적에 엄마가 해주시던 개미 매운양념볶음도 생각났다. 폭탄 세일할 때는 꿀단지개미로 볶아주셨는데, 제철엔 복부에 꿀이 가득해 환상의 맵단 맛이 났다. 일반 개미보다 3배가량 비쌌지만 확실히 값어치를 했다. 집안 형편이 고스란히 반영된 밥상엔 일반 개미가 주로 올라왔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알이 꽉 찬 여왕개미가 섞여 있을 때도 있었으니... 오독오독 터지는 그 맛이란...! 흰쌀밥에 비벼 먹을 날이 올는지.
입에 침이 고였다. 맛있는 상상은 허기진 엄도준을 더욱 힘들게 했다. 이대로라면 이틀도 버티지 못할 것 같다.
.
.
.
1주일 뒤, 서울 어느 아파트.
박윤지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앞에 앉아 맥주를 들이켠다. 메뚜기포를 한 움큼 입에 넣으며 TV 전원을 켜는데.
[2080년 새해에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남성 시신 2구가 베링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폐플라스틱을 수거 중인 바다정화선이 발견한 것으로 확인되며, 한국 정부는 러시아 당국과 협조해...]
(리모컨 ▼ 버튼)
[ (...) 고등어조림 맛, 오징어볶음 맛, 닭강정 맛, 장조림 맛, 이렇게 4가지를 200g 8개입, 단돈 999,000원에 구성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옛날얘기에 나오는 추억의 맛. 어르신 선물로 그만입니다. 미세 플라스틱은 걱정 마세요. 곡물과 채소, 곤충으로 100% 만들었으니까요. '고등어', '닭'이라 해서 깜짝 놀란 분들이계실 텐데, 자연 향료로 맛만 냈습니다. 하하하. 어패류, 육류 넣으면 저희도 큰일 납니다. 식약처 허가도 안 나요. 지금 구매하시...]
"크... 미쳤네... 저걸 누가 사." 박윤지는 메뚜기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혼잣말을 한다.
(리모컨 ▼ 버튼)
[ (...)와 브라질 '플라스틱' 쌀 사건에 이어, 태국의 한 농장에서 사육한 귀뚜라미에서도 미세 플라스틱 햠유량이 기존 안전 수치를 10배 초과한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학계에서는 짧게는 5년 뒤면 먹이 피라미드 하단의 곡류, 곤충류도 섭취에 안전하지 않다는...]
"아 씨발..." 박윤지는 씹던 메뚜기포를 뱉는다. 남은 맥주로 배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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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뒤, 박윤지의 거실.
윙~ 윙. 박윤지의 안마의자 옆 머신이 힘차게 돈다. 전체 사이클 종료까지 앞으로 4시간. '움직일 수 없으니 TV나 보자...'
[ 오늘 9시 뉴스의 마지막 소식입니다. 다음 달 1일부터, 운전면허 신체검사에 혈액 검사가 추가되며, 혈중 플라스틱 농도가 0.08%를 넘을 경우 면허가 발급되지 않습니다. 최근 증가한 주행 중 쇼크사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정부가 지원을 검토 중인 자가 투석 치료와... ]
(리모컨 ▼ 버튼)
[ (...)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면서 어떻게 빼냐고요? 가능합니다! 간단합니다! 오늘 보여드릴 화이자테크 2544k 투석기만 있으면 됩니다! 미국 FDA 승인을 받은 최첨단 기술로, 혈액에 녹아든 미세 플라스틱을 99.7%까지 걸러냅니다. 투석 시간도 최대 2시간으로, 기존 제품들과 비교할 수도 없는 성능인데요. 20% 할인된 5천 5백만 원에 지금 장만해, 마음껏 먹고 쭉쭉 빼세요. 언제까지, 먹으면서 죄책감 느끼실 건가요?...]
"에이씨. 비싸도 저걸로 살걸..." 박윤지는 짜증 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지난주에 들여놓은 투석기를 쳐다본다.
윙~ 윙. 투석기에 연결된 기다란 튜브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빨간 피. 박윤지의 왼팔 삽입관으로 이동해 온몸을 돌고 돌아, 다시 삽입관을 거쳐 투석기로, 그리고 박윤지에게로 돌아온다.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이 돌고 돌아 다시 인간에게 오는 것처럼.
출처 | https://blog.naver.com/dookobee/222715803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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