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같이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종종 집사는 그런 궁금증을 가져 봅니다.
그것은 십여 년째 혼자서 생활해 오고 있는 집사의 근본적 체험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남의 집 엿보기' 같은 상상이자 욕망이 변형된 결과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야옹이를 들인 후 같이 살아오면서, 들이기 전과 비교해 봤을 때 집사의 삶이 어떻게, 또 그리고 얼마나 변하고 달라졌는지 시나브로 곱씹어 보는, 일종의 화두에 바탕한 수행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집사는 1여 년 가까이 같이-삶의 의미를 야옹이와 함께 만들어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같이 만들어 갈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꼬이고 보니, 집사는 다시금 같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만 해도 그렇습니다.
왜 같이 살아가나? 싶을 정도로 티격태격 싸우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난무하는 집들이 있습니다.
혹은, 왜 같이 살아가나? 싶을 정도로 가족 내에서 하나의 고립된 섬들로만 존재하는 집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네들은 왜 같이 살아갈까?
차라리, 저렇게 같이 살아가기보다는 헤어지는 게 훨씬 더 살맛 나는 삶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집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그런 집들이 유지되는 방식을 관성이나 타성에 젖어버린 무기력함이나 무이성적 판단의 결과로써 치부해버리면, 차라리 그게 마음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볼 때는 분명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그래서 겉으로 봤을 땐 부적절해 보이는 그런 같이-삶의 양태조차도 온전히 유지시키는, 또 다른 의미 부여 동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인간들의 논리적인 사고방식이나, 선악미추 같은 가치판단 따위로는 결코 규정될 수 없는, 좀 더 깊거나, 좀 더 높거나, 혹은 아예 그런 것들을 뚫어버리거나 하는, 어떤 틀이지 않을까 무람없이 추측해봅니다.
그것이 인연이든, 운명이든, 섭리든, 업보든 그 어떤 것으로 불리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이름들 앞에서, 그 이름이 호명하는 어떤 인간 너머의 존재 앞에서, 하릴없이 할 말을 잃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껏 집사가 야옹이와 같이 살아온 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오히려 이제서야, 그 녀석과 같이 못 살지도 모르는 이제서야, 그런 문제가 '문제'로서 드러나게 됐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집사는 지금껏 필연과 운명을 순전히 자기 입맛에 따라서만, 자기 이익의 대차대조표에 따라서만, 그렇게 마음 편하게 꾸며내고 포장해왔던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순전히 겉으로 봤을 땐 그럴듯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실상은 애써 우리에게 부과된 필연과 운명을 거부해왔던 그런 같이-삶을, 집사는 말 못하는 야옹이를 들러리 삼아 그렇게 마음 편하게 조작해온 것은 아닐까 의심이 일었던 것입니다.
같이-삶의 의미가 어떻든 하릴없이 그 삶을 벽에다 칠하며 살아내는 저 위의 집들과 달리, 우리는 같이-삶의 의미를 매순간 찾아놓고도 그것을 허공에다가 뿌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집사는 분명 우연이란 씨앗을 심으며 야옹이를 길거리에서 만나게 됐지만, 우리가 같이-삶으로 피워낸 의미의 꽃은 분명 필연의 빛깔이었다고 믿었습니다.
그 녀석과 같이 먹고,
그 녀석과 같이 잠자고, 깨고,
그 녀석과 같이 웃고, 슬퍼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필연이 되었고, 운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은 분명 집사와 그 녀석이 함께 노력하며 일군 값진 같이-삶의 열매 또한 탐스럽게 매달고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는 필연과 운명이란 빛깔로 아름답게 채색된 같이-삶의 열매를 따먹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또 그렇게 헤어져 버렸습니다.
'우리'라는 말조차 집사 혼자서 되뇔 뿐, 의미의 진동은 그 녀석에게까지 다가들며 울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도 필연이 되었고, 운명이 되었다,
라고는 차마, 우리가 키운 같이-삶의 열매가 그런 필연과 운명이란 빛깔로 슬프게 채색되었다,
라고는 차마, 내뱉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식으로 그렇게, 필연과 운명을 뇌까릴 자격은 인간에게 없었습니다.
그 녀석과 같이 잘 지낼 때는 그것이 필연이며 운명이고, 그 녀석과 헤어져 지낼 때는 그것이 필연이 아니고 운명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마음 편한 결정을 내릴 자격이 인간에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이 상황을 그런 이름으로 곱게 갈아입혀 경외하듯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가?
그 어떠한 역할도, 대응도, 반항도, 할 수 없으니까?
이 인간 너머의 세계라고 생각되는 필연적이고도 운명적인 상황 앞에서는?
그러니, 우리가 키워왔던 같이-삶의 빛깔이 그렇게 갑자기 어두워져도, 정녕 그대로 어둡게 둔 채 계속 나아가야만 할 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거 하나는 분명해 보였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비치는 저 너머 그 필연과 운명이란 열매의 빛깔은 참으로 어둡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은 분명 집사와 그 녀석이 함께 노력하며 일군 같이-삶의 열매 또한 덜 어두운 빛깔로 매달고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하늘에서 비바람이 몰아친다고,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갑자기 어그러지고 망가진다고, 우리가 여태껏 만들어 온 우산을 차마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우산이 비바람을 막아내는 데 역부족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 우산에나마 의지하여 비바람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하릴없이 비바람을 맞겠지만 그럼에도 덜 맞는 유일한 방안이었습니다.
실상, 저 너머의 필연과 운명은 어차피 인간 세계에 오롯이 발붙일 수는 없는, 그런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필연과 운명 아래에서 인간이 바꾸고 따먹을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과 수고만이 요구될 따름이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되면, 그때 겸허하게 인정하고 물러나도 늦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집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집사가 집사일 때까지 허락된 유일한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그 녀석과 만나 대화해야겠다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녀석을 다시 데려오는 게 차후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겠지만, 설령 그 삶이 지금의 삶보다 좋지 않더라도, 감히 '좋지 않을 것이다' 단언하지 않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좋다, 좋지 않다, 라는 건 항상 함께 가는 것이지, 어떤 상황에 따라 좋다만 좋이 많고, 좋지 않다는 좋이 없고, 하는 그런 식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좋지 않은 순간이 있고, 또 많으면, 그만큼 좋은 순간이 있고, 또 많다고, 그렇게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