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는 사인에 적힌 바로 그날.......
본인이 포함된 멤버의 작품이 단편 경쟁부분에 초청이 되어
방문한 부산국제영화제......
단편부문 시상식 후 뒤풀이 자리에 참여해 달라는 권유를 받고
장소로 이동하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그 날의 날씨 때문인지 우산 있는사람, 없는사람 반 반의
덩케르크의 영국군 패잔병들 같았던 무리들 중 이상한 헤어스타일의 덩치와
분위기와 안 어울리게 지나치게 밝은 아저씨 둘이 눈에 띄었다.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 를 별 재미없게 봤던 나완 달리
우리 팀은 둘 모두에 환장했던 자들이라
어떻게하지.....하며 수근대고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상당히 똘기가 있었던지라
무작정 아이디어노트로 쓰던 작은 수첩을 들고 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상한 헤어의 덩치.....보다는 사람좋아보이는 아저씨에게.......
좋은 선택이었다.
사람좋아보이는 아저씨는 사람좋았다.
이름까지 물어봐 주시며 작품 재미있게 봤다는 덕담까지 해주시며
시간을 들여 꼼꼼히 사인해주신 후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까지 해주셔서
나는 이 사람의 영화를 꼭 극장가서 봐야지! 라는 결심을 하였다. 오랜시간이 걸렸지만.....
나의 성공을 눈앞에서 지켜본 소심한 나의 쫄ㅈ...아니 일행들은
용기를 가지고 내 뒤로 줄을 만들었다.
그 다음 나는 약간 쫄았지만 눈을 돌려 이상한 헤어스타일의 덩치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 분의 눈에서 '저....저도요?' 라는 느낌을 받았다.
살인의 추억으로 한참 주가가 올라 심사위원이 되어 우리를 심사한 분이
아직도 플란다스의 개의 실패를 이겨내지 못한 눈빛으로
'제가 사인을 해도 되겠습니까?'라는 표정이라니....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세상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간 그는
사인을 해 주었는데 그제서야 그가 망설인 이유를 알았다.
그는 멋들어진 사인을 만든 적이 없었나보다.
마지막 쫄ㅈ...아니 일행까지 사인을 받고 다시 이동할 때는
우리 일행 중 한 소녀(당시엔)가 봉감독에게 자연스레 우산을 씌워주며
뭐가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뒷풀이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그 분들은 소위 관계자들에게 둘러싸여
저 멀리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도 나는 어디선가 술이 얼큰하게 올라오면
두 감독들과 같이 술먹었을 때가 그립다고 떠벌리곤 했다.
그리고 엇그제.....
아카데미 수상 소식을 듣고 그 때가 오랜만에 떠올라
방구석에 처박혀있던 보물상자에서 이 사인을 꺼내보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적혀있는 이 사인의 문구처럼
그 분께 전해드리고싶다.
'감사' 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