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친구가 없다.
원인은 빌어먹을 성격과 오랜시간 지방생활로 인한 연락의 부재다.
2년 전 돌아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황량한 인간관계를 마주하니
내가 평소에 사람을 마주치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부질없을 뿐, 분명히 내 잘못이지만.
며칠전에 내가 정말 싫어하던 고등학교 동창과 연락이 닿았다.
그런데 간만에 대화를 해보니 이친구와 대화하는게 참 즐거웠다.
그친구는 그랬다. 남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좀 황당한 이야기에도 대충
맞장구를 쳐도 "야 그게 뭔 개소리래" 하면서 할 말 다하고 다니던 놈.
어쩌면 저렇게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을까. 너 그러다가 어디가서
굶어죽진 않아도 맞아죽는다고 그렇게 싸우다 연락이 끊어진 친구였는데
한참 대화하다 보니 오히려 그것이 편했다. 영혼없는 감정소모만 하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딸이 둘이냐. 참 다행이다. 예쁜게 너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어서."
"새해 덕담 졸라 고맙네. 너도 꼭 결혼하면 너 안닮은 자식 낳아라."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하자. 난 결혼을 못하니까 자식 낳을 일도 없어."
"근데 너 그 말 되게 이상한거야. 못하는건 니 혼자 생각이지 니가 맘먹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는건 그거 니 스스로를 그 수준으로만 보는거 아니냐?"
꼭 결혼할거다 라는 의미없는 이야기만 하는 것 보다는 훨씬 편했다.
스스로를 생각하는 시간도 좀 가지게 된 것 같고.
"어디가서 한잔 더 할까."
"나 옛날부터 술 안먹는거 알면서 그러냐. 말 다 끝났으면 일어나자."
"어. 빨리 집에 가라."
근 6년만에 만난 우리는 그렇게 짧은 밥자리를 뒤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아주 차분하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친구는 필요할때만 나에게 연락을 했고
나도 그 친구에게 필요할때만 연락을 한다. 필요할때만 연락하는게 뭐가
나쁘다는건지 이시점에서 난 잘 모르겠다. 이렇게 편한걸.
생각해보면 그랬다.
할머니 장례식때 친구라고 했던 이들은 핑계를 들어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놈은 와서 저녁을 먹고, 차를 가지고 왔지만 소주를 한 병 마시고 대리를 불러
집에 갔다. 그런데 얘가 술을 못마시는 놈 아니였던가?
"그때 할머니 장례식때 너만 왔었어."
"어. 아무도 안왔지. 야 애들 뭐 다 부질없어."
"그때 와줘서 고마웠지 난."
"6년도 더 지난 일인데 지금 이야기해서 뭐하냐?"
"그냥 고마웠다고."
"가는게 당연한거지. 너 할머니 좋아했다며. 원래 좋은일은 안가도
나쁜일은 챙겨야돼. 그래야 너도 나중에 나 나쁜일 생겼을때 올거아냐."
머릿속을 알 수가 없는 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시간 지나서야
이놈이랑 만나게 됐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놈과 대화를 하면 우주, 세계평화, 인류애적 관점에서 본 인도주의 같은 건
아무 의미없는 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띄워주는 이야기나
추억이야기 같은걸 하지 않고도 끊기지 않는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감정을 내려놓고 대화만 했던 그날은 속도 편하고 마음도 편했다.
예전엔 난 그것이 싸가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그 사람에게 온전히 전달되길 바랬다.
(바랐다가 표준어다. 출처 국립국어원/ 그걸로는 영 느낌이 살지를 않아서. 이게 개그포인트임.)
난 감정을 앞세워 사람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오랜 시절을 겪었다.
버스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담배 하나를 꺼냈다.
이제 또 오늘을 날려보내고 내일을 살아야지. 그가 그랬던 것 처럼 단촐한 감정과
넘쳐나는 삶의 의욕을 가지고 살아야지.
간만에 아주 기분좋은 담배 어 ㅆ발 이거 담배 밧데리 왜없어. 이 디지털담배새끼.
에필로그)
다음날 그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늘 내 생일인데 왜 축하한다고 말 안해줬냐?"
"몰랐다. 미안하다. 내년엔 좋은 선물 준비해줄게. 생일축하한다."
"그래 고맙다. 그런데 아직 오늘 하루 많이 남았으니까 잘 생각해봐라."
"아니 생각 안할래. 처가 잘 다녀와라."
"어 담에보자."
진짜 몰랐다. 미안하다.
2.
명절이라 장을 좀 봐 왔는데 아버지가 저녁때 또 장을 봐 왔다.
목록을 보니 내가 안산 것만 잔뜩 있었다. 겹치는건
참기름 한병과 들깨가루 고사리였다. 우리집은 제사도 안지내는데
뭔 음식들을 그렇게 한다고 부산을 떠는지. 그래도 명절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란게 있으니까 이럴때라도 기분내보는거다. 생각하면
제사 안지낸다고 투덜거릴 필요까지 있나 싶기도 한다.
아버지가 사온것 중 유독 눈에 띄는건 참치 식용유 선물세트였다.
누굴 줄거라고 샀냐고 하면, 당연히 경비아저씨일 것이다.
"노동자 너 이거 내일 아침에 경비아저씨한테 가서 드려라."
라고 말하기에 나는 짐짓 기분나쁜 표정으로
"저 그아저씨 별로 안좋아하는데요."
말인즉 그 경비아저씨와는 주차문제로 악연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차는 지하 주차장에, 내 차는 지상 주차장에 주차를 해 놓는데
차를 산지 얼마 안돼서 아파트에 신고를 해 놓고 등록증이 나올때까지
반나절 정도 걸렸는데 그 사이에 와서 주민외 차량이라고 딱지를 붙이려는걸
가지고 실랑이를 벌였기 때문이다.
관리사무소가 개입을 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어쨌든 그 이후로
그 아저씨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선물세트를 가지고 내려가면서 수많은 생각을 했다.
대체 이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굳이 내가 갖다줘야 하는
이유가 있는걸까? 그냥 경비실 앞에 무심하게 두고 올까. 하긴, 오늘같은
명절에도 와서 힘들게 일하는데 굳이 어두운 낮으로 갔다줄 이유는 없는데.
애초에 선물세트가 없었으면 이런 일 없는거 아니야? 불편하네 정말.
그리고 이인제 닮았잖아? 난 이인제 별로 안좋아하는데. 어휴.
그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1층에 다다르고야 말았고
나는 망설일 새도 없이 경비실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호 사는 주민입니다. 이거 별건 아닌데 올해도
잘 부탁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해드렸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따로 멘트를 준비하지 않았는데 입에서 술술 나오는걸 보니 나는 사업
안했으면 결국 사기꾼이 되었을거라고 느낀 순간이였다.
지금껏 날 대하며 본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정말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말하는 경비아저씨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인제라고 생각해서 미안해요. 오늘부터 피닉제 하세요.'
뭐 왜.
3.
과거 긱스라는 그룹이 있었다. 최근에 나온 듀오 긱스 말고, 2000년대 초반에
이적이 결성한 긱스라는 그룹.
늙은 딜러에게 묻다. 라는 노래가 있다. 긱스라는 그룹은 중학교때부터
패닉의 광팬이였던 내가 이적의 모든 노래를 찾다가 알게 된 그룹이다.
자유롭게 사는게 좋다고 생각했던 시절에는 밝거나 희망적인 곡들만
자주 들었던 것 같은데 나이가 가고 오고를 반복하다보니 가는게 슬쩍
아쉽다고 생각되는 마음이 고개를 들고 나니 듣지 않았던 노래에 관심이 동한다.
영화를 보거나 만화를 보면서 술을 마시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술을 마시면, 난 꼭 이 노래를 듣곤 한다.
생이 도박같은 선택의 연속이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지난 선택과 도박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순간을 후회하고
내 패를 너무 많이 상대방에게 보여준건 아닌지 너무 감췄던건 아닌지
그런 웃긴 것들이 모여 나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니
지금이라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군대를 다시 가던 어쩌던 만번이라도 되돌려보겠다고
다짐하지만 되돌아 간 선택을 어떻게 바꿀건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기에 나는 또 마음의
입을 닫는다. 그리고 계속 노래를 듣는다.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수십년 뒤의 늙은 딜러는 살아온 나에게 무슨 말을 해줄지.
딜러는 나인가?
마지막으로 '늙은 딜러에게 묻다' 가사를 올리며 글을 마친다.
난 아직 어려 또 어리석어 희박한 확률에 도취되어
마지막 패도 보지 못한 채 손안의 모두를 걸었다오
나의 바람대로 일지 혹은 아닐지 지루한 시간은 영영 멈춰 버린 듯
내 선택과 운명 사이로 비틀거리던 그 미래란 허약한 놈은 떨고 있소
그대 말하오 내 욕심 마저 저주받은 존재의 종양인 건지
내게 말하오 마지막 판결 손에 쥔 건 그대요
이제 내기를 끝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