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처음 미생의 연재가 시작이 되고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미생 신드롬'이 일어났었다. 미생이 올라오면 업무도 잠시 미루고 믹스 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아 짧은 휴식을 즐겼고, 때로는 감탄을 하고 때로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장그래'와 함께 원인터네셔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연재 당시 직급에 따라서 느끼는 감상이 다르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 직급이 높으면 요즘 장그래같은 사원이 없다고 한탄하고 직급이 낮으면 오차장, 김대리같은 상사,선배가 없다며 한풀이를 했다고 한다. - 취준생과 직장인들은 술자리에서 미생 이야기만 풀어놓아 자영업자나 프리랜서 친구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연재종료와 함께 한국의 '시마'라는 찬사를 받은 미생은 곧 드라마로 제작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연재 당시부터 드라마 제작을 원하는 독자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드라마' 미생은 캐스팅에서부터 큰 화제를 몰고왔다. '장그래'역의 임시완이 원작에 비해 너무 미남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만화적' 감동을 드라마로 잘 풀어낼 수 있을지 우려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매화마다 시청율을 갱신하며 벌써부터 연장을 해달라거나 시즌2 이야기도 나오는 것을 보자면 '드라마' 미생은 말 그대로 '대박'을 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미생 신드롬'과 '웹툰' '드라마'를 모두 보면서 몇가지 느낀 점이 있기에 몇 글자 적어본다.
1. 더 처절해진 '장그래'의 적응기
'웹툰' 미생과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는 같은 상황에 쳐해 있고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은 같지만 느껴지는 감상은 완전히 다르다. '웹툰'의 장그래는 부족하고 좌절하지만 날카롭고 대담하다. 반면 '드라마'의 장그래는 현실의 압박에 더 힘겨워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배우기 위해서 더 몸부림친다. '웹툰'의 장그래가 회심의 카운트 펀치를 날리는 느낌이라면, '드라마'의 장그래는 너덜너덜 해진 몸으로 가진 것을 모두 토해내서 담아내는 최후의 한방같은 느낌이랄까?
어떤 장그래가 더 좋은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후자다. 아무리 좋은 상사와 선배가 있고 승부사의 통찰력을 지녔다고 해도 '패잔병'의 입장에서 사회에 던져진 청년의 현실은 '웹툰'의 날카로움보다는 '드라마'의 처절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웹툰을 보면서 상상하고 기대했던 '장그래'와는 다르지만 그래서 더 와 닿는다.
2. 어쩔 수 없달까, 어쩌면 현실적이랄까. 꽁기꽁기한 미생
한국 드라마의 러브라인 집착증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주제 불문에 상황 불문. 드라마에서 사랑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야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등장인물 전체가 짝짓기에 몰두하느라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웹툰' 미생에서도 장그래와 안영이의 교감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 '드라마' 미생에서는 장그래를 의식하는 장백기까지 포함해서 꽤나 그럴사한 삼각관계가 진행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썸'으로 발전하기 직전같은 느낌이다. 드라마 전체에 비해서 비중도 적은 편이고 워낙 큰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서 크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장면이었나'를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비록 치열한 회사에 던져졌다고 두근거림이 없을까. 처음에야 정신이 없고 적응하느라 신경쓰기 힘들지만 앉은 책상이 내 습관에 맞게 변해가고 파티션 너머의 세상도 훔쳐볼 여유가 생기면 쪼그라들었던 심장도 다시 팔딱거리고 뛸테니 말이다. 심지어 그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를 보인다면 이미 게임은 끝. 업무고 뭐고 어떻게 같이 밥한번 먹을까 작전을 짜느라 바쁠텐데.
원작에 비해서 분명 오묘한 미생이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겠다. 뭐, 회사에 임시완이나 강소라가 있기는 힘들다는 점에서는 비현실적이겠지만 말이다. 다만 바라는 점은 장백기까지 껴서 삼각관계같은 쪽으로 지나치게 몰아가며 분량을 때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딱! 지금정도가 좋다.
3. 순종적인 안영이, 흔들리는 천과장
'드라마' 미생의 대부분을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지만 '안영이'와 '천과장'은 좀 입맛에 안 맞는다.
안영이가 팀에서 차별을 겪는 내용이 원작에 있기는 하지만 '성별'보다는 '능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드라마는 반대로 다루고 있다. 아무래도 직장내 성희롱이나 성차별이 큰 이슈이고 이것을 안영이에게 대입하여 풀어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시도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해결방식에 있어서 지나치게 저자세로 임하며 상사들의 쓰레기통까지 치우고 의욕만 앞서서 냉정하게 상황파악을 못해 흔들리다가 이를 동정한 대리가 던져준 업무에 감동하며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이 '웹툰'과의 차이를 떠나서 불편했다.
최근 고용노동부 워크넷에서 올라왔던 '성희롱을 당하면 농담으로 넘긴다.'라는 면접 모범답안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현실이 저렇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반박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안영이가 그런 부조리함을 질타하고 '능력'으로 증명해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었으나 '드라마' 미생은 안영이의 눈동자에서 자신감을 지우고 사무실 바닥의 타일만 박아넣었기에 아쉬움이 크다.
천과장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막 등장한 천과장의 경우에 '사내정치'라는 상황에서 갈등하며 스스로 말이 되기를 자처한 모습을 크게 키우고 있다. 장그래의 훈수로 메뉴얼을 무시하는 오차장을 김대리와 따로 있는 자리에서 맹비난하고 장그래에게 적대감마저 드러내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제작진의 무리수라고 생각 된다. 12회를 장식할 요르단 사업계획 PT는 '웹툰'에서 '요르단 사업 횡령사건'에 이어지는 가장 박진감 넘치는 내용이었고 때문에 그런 긴장감을 최고조로 올리려는 제작진의 연출이 아닐까 싶지만 억지스러움이 느껴진다.
주변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정치적 게임'에 스스로 빠져버린 천과장은 원래 그다지 '정치적' 인물이 아니다. 김대리의 '노멀하신 분이다.' 라는 평과 단정한 차림으로 장그래의 머리카락을 지적했던 메뉴얼적인 사람이 '사내정치'에 빠져 전무를 찾아다닌다는 상황전개는 납득이 어렵다. 갈등이 깊을 수록 해소가 되었을 때 더 큰 감동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20회까지 꽤 남은 '드라마' 미생의 상황으로 봐서 장그래를 계속해서 힘들게 만들며 갈등의 중심으로 나올까 싶기도 하다.
'웹툰' 미생과 '드라마' 미생의 등장인물의 차이는 신선하기도 하고 즐거움을 더해주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안영이와 천과장은 아쉽기만 하다.
'드라마' 미생과 같이 원작이 있는 경우, 제작자로서는 큰 갈등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원작을 최대한 살려야하는가. 다른 그림을 그릴 것인가. 이는 컨텐츠를 소비하는 사회마다 반응이 다른데 우리나라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일본이나 대만의 경우 원작을 최대한 살려서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우리나라는 각색을 통해서 변화를 주는 쪽이 더 많다. 시청자들도 지나치게 원작재현으로 가면 쉽게 질려하고 오글거린다며 만화적 연출을 기피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점에 '드라마' 미생은 선을 잘 지키고 있다고 본다.
만화가 주는 임팩트 있는 대사표현보다는 절박한 상황묘사를 선택했고 등장인물들도 좀 더 현실로 끌고와 몰입도를 올렸다. 다만 아쉬운 것은 드라마화를 하며 분량을 확보하기 위함인지 불필요하게 붙은 '살'과 갈등관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억지스러운 설정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드라마' 미생은 9회가 더 남아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한달. '드라마' 미생이 '웹툰' 이상으로 다음 시즌이 기다려지는 그런 작품으로 마무리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