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 사장은 입구까지 나와 우리 일행을 영접했고 현관을 들어서자 십여여명의 웨이터들이 도열해 중국말로 뭐라뭐라 외치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지. 대단했어. 나까지 우쭐했으니까. 말석으로 참석한 입사 삼년차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나 봤겠어.
널직한 룸에 손님들과 마주 보고 앉자, 특별 주문한 음식이 화려하게 장식된 과일과 함께 차려지기 시작했어. 세팅이 완료되자, 업소 사장이 싱긋이 웃으며 큰 보자기 세 개를 들고 오는 거라, 귀한 손님에게 줄 선물이라면서 말이야. 보자기 하나를 풀고, 사각 박스에서 딱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하얀색 도자기 하나를 꺼내 들더니 말하는 거야. 대학 친구가 부산 근교에서 도자기를 굽는데 귀한 손님을 위해 자신이 특별히 부탁했다는 거지.
예상치 않게 도자기 선물을 받게 된 손님들은 입이 벌어졌어. 우리도 놀랐지. 이건, 사전에 계획된 일이 아니었으니까. 모든 게 순조로 왔어. 일이 되려 하니 센스쟁이 업소 사장까지 한 몫 거던 거지. 한 달 술값만 많을 땐 2-3천씩 결제하는 A급 고객사에서 귀한 손님을 모셔왔으니 술집 사장으로선 당연했겠지만 말이야.
모두에게 술 한 잔씩 권한 사장이 나가고, 드디어 귀한 손님을 접대할 언니 세 명이 들어왔는데, 아~ 딱 봐도 누가 시*동의 파트너인지 알 수 있었어. 전*현 몸매에 송*교의 가슴, 최*우의 얼굴을 한 뽀안 피부의 훤칠한 그녀가 단연 돗보였으니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 ‘시*동, 복도 많은 넘’ ‘존나 부러븐 시키...’
눈인사를 건넨 언니들이 상대할 손님들 옆에 앉자 우린 호흡을 가다듬었어. 이제부턴 며칠동안 연습한 시나리오대로 쭉 달려야 했으니까.
득의양양, 시*동의 표정을 살폈어. 근데 흡족해하는 두 사람과는 달리 시*동의 표정이 떨뜨름한 거야. 에이젼트를 봤어, 약간 굳었다고나 할까. 순간, 전무님과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어. 십수년간 이런저런 각양각색 사람들을 상대해 온, 눈치 100단 전무님 역시 미묘하게 변한 시*동의 표정을 놓칠 리 없었으니까.
에이~ 아니겠지. 우리가 오버하는 거겠지. 여기 아니면 언제 시*동이 저런 미인의 접대를 받으며 술 마실 수 있겠어. 시동 걸기로 한 난 모른 척, 분위기 띄우려 평소 연습한 중국어를 몇 마디 곁들이며 건배를 외쳤지. 몇 순배 잔이 돌았어. 하지만 분위기는 좀처럼 달아오르지 않는 거야. 왜? 저녁 식사자리, 업소 사장이 도자기 선물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흡족해하던 시*동이 시큰둥했으니...
급기야 에이젼트와 전무님이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혼자 돌아 온, 에이젼트는 전무님이 옆방에서 나를 잠깐 보잔다는 거야. 가보니, 업소 사장과 전무님이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지. 전무님이 나보고 그러더라.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안이하게 생각했다. 시*동은 더 큰 가슴의 소유자를 원하는 듯한데 어쩌면 좋겠냐는 거였지. 나보고 어쩌라고...
어처구니가 없었지. 그렇다고 시*동이 고작 파트너 가슴 문제로 판을 깨고, 거래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최악의 상황이 생기기야 하겠냐마는, 밴드마스터에 3인이 좋아하는 중국노래 악보를 어렵게 구해 주고, 틈만 나면 중국노래 연습하고,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3일간 금주하고, 예상 시나리오 짜 돌발상황 대비 한, 이 한판을 위해 기울인 모든 노력이 마지막 한 점을 제대로 못 찍는다는 게 너무 아쉽고 자존심 상했던 거지.
전무님은 담배를 권했고, 난 크게 한 모금 삼켰어. 후~ 하고 연기를 내뿜는 순간, 한 명이 딱 떠오르는 거야.
“선희 어떻습니까?”
“누구?”
“여송에 선희 말입니다. 내 친구...”
“아, 그 여사장...”
굳어 있던 전무님 표정이 살짝 풀린 것도 한순간, 이내 고개를 흔들었어.
“에이~ 근데 오시려 하겠나? 장사는 어쩌고...”
“전화는 해보겠습니다. 안 되면 할 수 없고요.”
뭔 친척인 선희가 시골에 홀로 계신, 할머니 댁에 맡겨진 건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
아내와 이별 한, 친척 아재가, 하나 있는 딸을 제대로 키울 수 없어 고향 어머님 댁에 맡긴 거였지. 내겐 아재 뻘인 선희 아버지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쯤 재혼해 선희를 데려갈 때까지 우린 친하게 지냈어.
동갑이었지만 선희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어른스러웠어. 키뿐만 아니라, 가슴이 또래보다 유난히 컸던 선희는 종종 짓궂은 사내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나서 막아 주고 심하면 치고받기까지 했었지. 딴 뜻은 없었어. 친척이었고, 어머님께서 잘 돌봐주라 했으니까.
하루는 추어탕을 가마솥 가득 끓인 어머님이 냄비 가득 담더니 선희 할머니 댁에 가져다주라는 거야. 종종 있는 일이었어. 김장하거나 뭔가 특별한 음식을 하면 어머님께선 꼭 심부름을 시켰거든.
두칸짜리 슬레트 집, 할머닌 마실가셨는지 선희 혼자 있었어. 둘만 있는 게 어색해서 냄비를 놓고 돌아서려는데 선희가 부르는 거야. 갔지. 싱긋이 웃으며 손을 줘보라 해서 난 그냥 내밀었을 뿐이야. 그랬더니 아 글쎄 내 손을 자기 가슴 쪽으로 가져가더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고, 어찌할 바 몰라 손을 선희 가슴에 댄 체, 가만히 있었지. 내 표정이 볼만했는지, 선희는 킥~ 웃으며 말했어.
“고맙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 순간, 멋있는 말을 해얀다는 생각이 들더라.
“뭘~ 앞으로 누가 괴롭히면 나한테 얘기해라.”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더라. 이후, 학교나 동네서 마주치면 태연했던 선희와는 달리 난 얼굴이 빨게지곤 했었지. 그래도 난 얼레리꼴레리~ 친구들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선희의 호위무사를 자처했었고, 어머님이 뭘 가져다주라면 총알같이 달려갔고, 해질녁 때까지 같이 놀았어.
그런 선희를 대학 졸업 후 입사한 지, 이년쯤 지나 부산서 다시 만난 거야. 반가웠지. 처음 만난 날, 선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내가 그랬어.
“문 거 걸로 다 갔나?(너 먹은 거 가슴으로 다 갔니?)”
종종 만나 소주를 마셨어. 선희는 사연이 많았지. 고등학교 졸업하자 바로 독립했고, 일찍 결혼이란 걸 했고, 애가 생기지 않았고, 시댁과의 갈등이 남편과 다툼으로 이어져 결국은 이혼했다는 걸 후에 알게 되었어. 이혼 위자료에 몇 년 간 일해 번 목돈을 가지고 친한 언니와 서면서 조그만 Bar를 동업하고 있었는데, 내가 가면 월급쟁이가 돈이 어디 있냐며 빈 양주병에 소주를 채워주곤 했어. 물론 재수 좋으면 손님이 남기고 간 고급 양주를 얻어먹기도 하고...
술자리 죽이 맞는 전무님과 난, 한 번씩 들러 매상 올려주곤 했는지라 전무님은 선희를 알고 있었던 거지.
급하게 선희에게 전화했어. 사정 설명하고, 하루 매상 보상할 터이니 와 줄 수 있냐고...
저녁 장사 준비 중이던 선희는 한참을 깔깔대며 웃더니 ‘그 넘 이상한 넘 아니냐?’ ‘살다살다 그런 넘은 처음 본다.’며 킥킥 댔는데 싫지는 않은 느낌이었고 약간 호기심도 생긴 듯 했어.
“그기 어딘데?”
흥미가 생겨서인지, 내가 부탁을 해선지 모르지만, 선희는 OK, 도착 10분전 쯤 **호텔 입구로 나가 선희를 기다렸지.
택시에서 한 여인이 내렸어. 꽉 끼는 청바지에 윗 단추를 두 서너 개 푼 새하얀 셔츠 사이로 터질 듯한 빵빵한 가슴의 소유자가 나를 보곤 싱긋이 웃는데, 순간 난 놀랐어. 맥라이언이 살 좀 붙고 가슴이 컸더라면 딱 이 모습이 아닐까.
일행이 있는 룸으로 갔고, 시*동에게 조그만 가게를 하는 내 친구라며 소개시켰어. 이후 어떻게 되었냐고? 내가 시*동에게 잔을 따르려 하자, 그는 조그만 양주잔을 구석으로 돌리더니 음료수 마시는 유리잔 두 개를 앞에 놓더니 그 비싼 양주를 가득 붓는 거야. 그러면서 내게 한 잔 권하고는 자신부터 벌컥벌컥 원샷. 호기를 부린 거야. 자신들은 쩨쩨하게 작은 잔엔 잘 안 마신다면서 말이지. 두 사람의 술배틀이 벌어진 거야. 대략 열 잔 정도를 들이붓고서는 난 기절했어.
잠결에 아주 감미로운 노래가 들리더라. 눈을 떴지. 수출부 팀장과 에이젼트는 오간 데 없고, 시*동이 한 여인의 노래를 지긋이 듣고 있는 게 보이는 거라. 황급히 자세를 고쳐잡고 주변 확인을 하고서는 다시 시*동 쪽을 바라 봤어. 이건 뭐... 선희는 악보도 보지 않은 체 밴드마스터의 연주에 따라 난생 처음 듣는 중국노래를 불렀는데, 그게 떵리쥔(등려군)의 웨량따이뾰아더쉰(월량대표아적심)인 건 나중에 알았지. 노래가 끝나자 박수와 환호가 터졌지. 시*동이 흡족한 표정으로 일어나 정중하게 악수를 청하고는 뭐라뭐라 하자 선희는 알아들은 듯 밴드마스터에 귀엣말을 했고 신나는 중국노래 한 곡을 더 불렀지. 반주가 나가자마자 시*동은 박수를 치고, 기업체 총감은 일어나 춤을 추고.... 난리도 난리도..
시*동과 눈이 마주쳤어. 나를 보고 묘한 미소를 짓더니 아 글쎄 이**놈이 다시 두 개의 글래스 잔에 양주를 붓는 거야. 얼음도 없는, 물 한 방울 더하지 않는 독한 양주를 말이야.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했지만 난 단박에 원샷했지 그리고 또 기절. 어쨌든 난 장렬히 전사했어. 비록 계획대로 상대에게 중상을 입히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누가 날 흔들었고, 깨어보니 파장이었는데 분위기는 좋았지. 잠시 사라졌던 에이젼트와 수출부 팀장도 와 있었고. 전무님의 마무리 발언을 에이젼트가 열심히 통역하고 있었는데 시*동을 포함한 일행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을 했었지.
그렇게 술자리는 끝이 나고 일행들은 각자 호텔로, 집으로 갔어. 나와 선희만 남겨 둔 채 말이야.
둘은 근처 해장국집으로 갔어. 희한한 게 말이야. 그렇게 마셨는데, 기절을 두 번이나 할 정도로 취했었는데, 소주 들어갈 자리는 또 있더라. 자정이 넘어가는데, 술꾼들이 허한 속을 달래기엔 이른 시간인지 해장국집엔 선희와 나밖에 없었어.
고맙단 말에 선희는 살짝 웃기만 했지. 그렇게 둘은 소주를 마셨어. 중국노래는 언제 배웠냐? 등려군도 모르냐? 아재는 잘 계시냐? 니 꼬추는 아직도 쬐그만하냐? 꼬추가 아니라 가지다, 임마. 의심나면 한 번 만져 보던가? 아지메는 잘 계시냐? 장사는 어떠냐? 애는 몇이냐? 재혼은 안 할 거냐? 실없는 농담을 섞어가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지. 그대로인 해장국에 비해 소주병은 차곡차곡 쌓였어.
혀는 꼬부라지고 아까 한 말 또하고... 이제 뻗으면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하나, 둘, 손님이 들어섰고 조용하던 해장국집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지. 그만 일어나자니 선희는 나를 지긋이 쳐다봤어. 쓸쓸한 듯, 아닌 듯...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했는데, 선희는 입을 다물고는 빽을 챙겼지.
난, 선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았어. 그 말은 나도 하고 싶었으니까. 내가 살아오면서 잘한 일이 몇 가지 있어. 그중 하나가 선희를 그날 집까지 고이 데려다 준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몇 년 후 선희가 애 하나 딸린 마음 좋은 카센터 사장과 조촐한 혼인식을 했을 때 친구들과 기쁜 마음으로 가지 못했을 터이고 무엇보다 아내에게 떳떳한 가장이 될 수 없었을 터이니.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졌네. 마무리해야겠어. 다음 날 시*동은 에이젼트를 통해 요청이 왔어, 판에 박힌 관광보다는 서민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혹 선희가 가이드해 줄 수 있냐는. 선희는 OK, 그날 저녁 따로 여행한 시*동과 중국손님들은 저녁 식사 후 선희 가게에 다시 모였지. 자리는 처음부터 후끈 달아오르고... 우린 마치 오랜 친구마냥 또 술을 들이부었지. 다행인 것은 시*동, 이**놈이 더이상 글래스 잔으로 권하지 않았다는 거야.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 덕에 우리회사는 어려웠던 시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었어.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본격적인 중국 진출을 위해 **시에 공장을 세울 때 시*동은 많은 도움을 줬지. 본의아니게 일등공신이 된 선희, 전후사정을 알게 된 사장님까지 나서 발 벗고 덤비는 바람에 가게는 연일 손님들로 가득 찼었어. 물론 전무님과 나 역시 틈만 나면 찾았었고. 몇달이 지났을 거야. 그때 선희가 부른 감미롭고 애절했던 노래가 갑자기 생각 나는 거라. 등려군을 검색해봤어. 그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지. 선희는 가슴 큰 맥라이언이 아니었어. 얼굴 형태나 눈매가 등려군과 흡사했었으니까.
'니 웬 워 아이니 요우 지 휀~ ' 한 번 들어야겠어. 등려군의 웨량따이뾰아더쉰(월량대표아적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