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민성 대장증후군과 만성 스트레스 및 두통을 달고사는 본인으로서는,
현장에 나갔을 때 화장실의 유무란 거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내가 현장에 나갔는데,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다면 그때부터 배가 아프고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제대로 된 화장실이란, 양변기가 있는 화장실을 말한다.
똥숫간은 화장실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나프탈렌 냄새와 적절한
도끼다시 바닥이 깔려있어야만 한다.
혹자들은 이러한 화장실 취향에 대해 배가 불렀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비위가 굉장히 약한데다가 쪼그려 앉기가 불편한 본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미세먼지 없고, 드럽게 바빴지만 어쨌든 일찍끝난 어느날, 나는 어김없이
정신과가 있는 동네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늘 그렇듯,
"증세가 조금 나아지신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스트레스를 좀 줄이시고
술담배도 좀 줄이시고 무엇보다 저번에 말씀드린... 개인취미를 좀 가져보시는게 좋아요."
그래서!!! 의사양반!! 내가 취미를 가졌다!! 나는 이제부터 프로 기타리스트가 될 것이다!!
정박과 엇박을 넘나들며 눈을 감고 음악세계에 빠져드는 순간 관객들은 나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우울증이 아니였으면 기타를 잡지 않았을것이고 그랬다면 여러분의
사랑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우쭐함 섞인 감동적 대사를 내뱉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고퍼우드 입문용 20만원짜리 기타를 샀지만,
C코드새끼!!! 죽여버릴거야!!!
왜 묵비권을 행사하냐!! 소리가 왜 안나냐!!!
스티비원더같은 마음을 가지고, 말로같은 마음을 가지고 시작한 기타는 어느새
오버킬이나 뭐 루카 투릴리같은 마음가짐으로 변해버렸고, 금세 때려치려고 했지만
그래도 기타현 튕길때만큼은 술마실때보다 훨씬 편한 것 같아 유지중이다.
물론 C코드는 지금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기타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하기로 하고,
아무튼 오늘도 무난한 2커맨드 3배럭 빌드로 신나게 털린 하루였고, 사장과 함께
보람찬 로동의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였다.
집까지 남은 거리 2키로쯤 되었을 때 어김없이 배에서 신호가 왔다. 집에는...
정말 제대로 된, 나프탈렌 냄새조차 희미한 향긋한 라벤더향이 반기는 화장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쿠키런 리그 한판을 돌리고 의미없는 뽑기 한번을 한 후에
오유와 웃대를 번갈아가며 미친댓글들을 쓰거나 적당히 약이 첨가된 글을 보며
낄낄대곤 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망할놈의 엘리베이터가 19층에 서 있었고, 반대쪽 엘리베이터는
18층에 서 있었다. 18층에 서있는 엘리베이터 쪽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잠깐 보고있는데
이놈의 엘리베이터가 죽어도 내려올 생각을 안하는거다. 16층에 걸려있는 그 엘리베이터는
잠시 뒤에 움직였지만 13층에서 한번, 8층에서 한번 멈추더니 급기야 내가 누르지도 않은
반대편 엘리베이터가 먼저 내려왔고, 온갖 짜증을 속으로 삭히며 반대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이번에는 아까 멈췄던 층수대로 엘리베이터가 멈추면서 문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고,
그사이에 나는 짜증이 다시한번 날 뻔했지만, 화를 참지 못하면 괄약근도 참지 못한다는
교훈(?)을 얼마전에 살짝 경험했기에, 나는 나 자신에게 조근조근 타일렀다.
"노동자야. 이 엘리베이터만 타고 집에 가면, 화장실과 기타가 있단다. 그리고 그 열받는놈들이
모여있는 협동전 채널도 있지. 자 이제 이 문만 열리면 들어가는거야. 어려울게 없어."
자기 자신에게 중얼대는 노동자 복장의 먼지투성이 인간과, 칼을 물고 널뛰는 미1친놈 사이에서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은 아마 칼물고 널뛰는 미친1놈쪽에 달려가 살려달라고 외쳤을것이다.
그렇게 평정심을 찾기 위해 애쓰며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산골짜기를 생각하는 순간,
평화롭던 산골짜기에 먹구름이 끼며 폭우가 쏟아지고 온갖 황색 흙들이 평화롭던 골짜기를 뒤덮는
상상을 하고 말았고 내 괄약근은 더 이상 내 통제를 받는것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제발, 조금만 더...헔!"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마자 집으로 뛰어간 나는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으로 집 비밀번호를
누른뒤 작업화를 거의 현관문쪽으로 던지고
우사인볼트가 빙의한 내 다리는 빨래바구니가 있는 베란다로 향했다.
"노동자야!! 이제 조금이야!! 급할 필요 없어!! 우리는 할수 있섨헔"
눈앞이 노래졌다. 약간 열린 것 같은데 아직은 괜찮다며 식은땀을 흘린다.
이미 양말은 한쪽은 뒤집어지고 다른쪽은 정상인데 바지가 왼쪽발에 낑겨서 못나오고 윗통은
벗어야하고 빨아놓은 팬티 꺼내러 서랍까지 가야되는데 왼쪽발에 낑긴바지는 나올생각을 안하고
휴대폰은 또 식탁에 있는데 괄약근과 팬티의 자유무역 협정은 체결을 눈앞에 두고있고
모든것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기적적으로 왼발에서 빠진 바지가 신기하게도 세탁기 입구에 걸릴정도로
높이솟아올랐을 때 나는 황급히 서랍에서 팬티를 챙겨 화장실로 달려가 푸팟퐁커리를 외치며
변기에 앉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나에게 온갖 음해를 가하던 세상은 나를 위로하는 목소리들로 가득찼고,
그 미친정신에 휴대폰과 샤워 후 갈아입을 새 팬티까지 멋지게 챙겨온 나 자신이 아주 자랑스러웠으며
나는 이 모든것을 추억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와중에 동네 형과 동생은 카톡으로
지금 안나오면 이빨 다 뽑아버린다고 협박중이다. 뽑아라그래 저번에 술값 안내고 튄거 반성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