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필자모연후人必自侮然後 인모지人侮之.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업신여긴 이후에 남들로부터 업신여김 당한다는 말이다. 맹자 말씀이다. 상대의 모욕적인 언행이 내 가슴을 쿡 찌를 때마다, 모욕감과 분노로 얼굴이 벌게지려고 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이 말을 되뇐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필자모연후 인모지"는 참으로 옳은 말 같다.
남이 나를 모욕할 때 우리는 대개 상대를 욕하기에 바쁘지만, 사실 내가 모욕 당한 이유는 먼저 나 자신에게 있다. 내가 만만하게 보일 때, 내가 나약할 때, 내가 단호하지 못할 때, 모욕 당한다. 내가 만만해보이지 않으면, 내가 강하면, 내가 단호하면, 상대는 나를 모욕하지 못한다.
모욕의 원인은 상대의 인격이 아니라 나의 인격에 있다. 나의 '좁음'과 나의 '약함'이 바로, 내가 모욕 당하는 이유다.
나를 좁게 만든 것은 누구이고, 나를 약하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나 스스로를 좁은 사람 약한 사람으로 키웠기 때문에 남들로부터도 업신여김 받는 것이지, 나는 잘못이 없고 상대한테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남의 인격 탓만 하고 있으면, 죽을 때까지 수시로 상처 받고 수시로 화내는 작은 사람으로만 살게 된다. '큰 사람' '강한 사람'이 되려면 왠만한 모욕은 웃어 넘길 수 있는 '넓음과 단단함(弘毅)'을 가져야 한다.
학원 강사 일을 하다 보니, 가끔씩 어린 학생들에게 모욕 당할 때가 있다. 중학생들이 나를 살살 놀릴 때도 있고, 초등학생한테 '뻐큐'를 먹은 적도 있다.
이 얘기를, 오랜만에 만난 아는 동생한테 했더니, 왜 그러고 사냐고, 큰 돈 버는 것도 아니고 왜 초등학생한테 '뻐큐' 먹으면서 일하냐고, 한 소리를 들었다. 그 후로도 녀석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내 인생 자체를 한심하게 보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러는 본인은 정작 직업도 없고 돈도 없어서, 여자친구의 패딩 잠바를 빌려 입고(지금은 헤어졌다), 엄마 카드로 술이나 마시고 다니는, 스물여덟의 중증 '예술가병' 환자였다. 내 기준에선 그쪽 인생이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중학생 초등학생한테 모욕 당한 걸 중학생 초등학생 탓 하고 있으면, 그게 제대로 된 어른일까?
학생들에게 모욕 당할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내가 애들 눈높이에 맞춰 스스로를 낮추다보니 만만하게 보였구나, 내가 직업에 얽매여 있다보니 단호하지 못했구나, 하는 식이다.
학생들은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냥 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놀림 받았다고 화 내고, '뻐큐' 먹었다고 그 손가락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것인가? 그게 나 스스로를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 행동 아닐까?
남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오만한 사람에게, 내 인생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필요가 있을까? 네가 내 인생에 대해 뭘 아냐고 화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오만한 사람 귀엔 다 변명으로 들릴 뿐이고, '팩트 폭행' 당해서 발끈하는 걸로 밖에는 안 보인다. 인격이 덜 된 사람과 똑같은 선상에서 싸우면, 나도 똑같이 인격이 덜 된 사람이 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아낀다.
모욕을 당해도 그저 씨익 웃는 수밖에 없다. 애랑 싸우면 나도 똑같이 애가 되고, 개랑 싸우면 나도 똑같이 개가 된다. 그러니 속으로 '참새 따위가 어찌 대붕의 큰 뜻을 알리오' 하며 웃어 넘기는 게 상책이다. 아니면 작정하고 한 번 모조리 엎어버리든가.
마지막으로, 두 사람 얘기를 하며 글을 마치겠다.
하나는, <아Q정전>의 주인공 아Q다. 그는 이른바 "정신 승리"의 대가다. 아Q는 깡패들한테 얻어 맞고 돌아가면서, 속으로 '저들은 수준이 떨어진다. 내가 저들보다 수준이 높다. 수준 높은 사람이 수준 낮은 사람과 같이 싸우면 안 된다. 가만히 맞고만 있었으니 오히려 내가 이긴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깡패들 줘팰 힘도 없으면서. 머릿속으로만 승리하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적잖이 한심스럽다.
다른 하나는,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싸울 때 대활약 했던 회음후 한신이다. 한신에게는 과하지욕胯下之辱의 일화가 있다. 동네 건달들이 한신에게 시비를 걸면서 가랑이 밑胯下을 기어가라고 하자, 한신은 말없이 그 밑을 기어갔다. 한 순간 모욕을 견딘 것이다.
그 후 한신은 전장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왕의 지위까지 올랐다. 한신은 왕이 된 이후 그때 그 '가랑이의 주인'을 찾아내,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벼슬을 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장사다. 그가 나를 욕보였을 때,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한들 이름을 얻을 길이 없어, 오랫동안 참아 공을 이루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 눈엔, 내가 "인필자모연후 인모지"니 하는 것이 마치 아Q가 했던 '정신 승리'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수모와 치욕을 감내하는 것은, 더 넓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며, 더 큰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과하지욕 고사처럼 말이다.
작은 모욕에도 발끈하는 것은 수치요, 졸렬이다. 나는 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