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바람을 폈습니다...
제 아내는 태국사람입니다.
저와는 무려 열세살이나 차이가 나지요.
속된말로 여자를 사온다는 국제결혼업체를 통한 것은 아닙니다
아내는 한국에 돈을 벌러 온, 흔하디 흔한 불법체류자였습니다.
마침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고 새로운 지역에서 새시작을 하던 저는 식당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을때 엉뚱한 매력이 느껴진 아내와 연락처를 교환한 것을 시작으로 잦은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아이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당시 애인이었던 아내의 임신을 확인한 저는 일단 아내와 혼인신고부터 했습니다. 그리고 신원보증을 서면서 불법체류 자진신고를 했습니다. 불법체류 담당 수사관의 조사 대상을 자처한 저는 담당관님께 눈물로 호소하고 아내의 불법체류와 관련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 아내의 추방여부는 출산이후, 그것도 결혼비자 발급 여부에 따르며, 규정에 있는 벌금을 납부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결혼비자를 신청하였으나 모든 결정이 출산 뒤에 내려질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아내는 제 거주지 인근 병원에서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였고 때마침 결혼 비자까지 나오면서 아내는 더이상 불법체류자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작은 단칸방에서 아기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이 결혼을 반대했던 부모님은 끝내 결혼을 인정하고 본가로 복귀를 명하셨습니다. 아내와 아이를 모두 포함해서요
우리 두 사람 아래에서 자주 아프던 아이는, 할머니의 지극한 돌봄 아래 점차 건강해졌습니다. 육아 경험이 많았던 할머니는 마음만 앞서던 엄마아빠보다 훨씬 좋은 보호자였습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아이가 복덩이었는지 우리집 경제사정도 점차 나아졌습니다.
한국 생활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아내는 일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이제는 불법체류도 불법취업도 아닌 정당한 취업과 법으로 보호받는 근로가 가능했습니다. 같은 국적의 키크고 잘생긴 어떤 태국남자의 소개을 통해, 아내는 집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한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취직한지 얼마 지나고부터 아내는 점점 집안에 소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출근할때마다, 여러명이 먹을 수 있는 태국요리를 만들어서 싸갔습니다. 퇴근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주말과 일요일에도 자주 친구를 만난다며 외출했습니다. 술을 먹고 오는 날도 늘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술냄새를 풍기며 귀가하는 일도 늘었습니다.
아이의 어린이집 등하원은 오롯이 저와 아이 할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위해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귀가해야 했습니다. 영아시절 자주 아팠던 아이를 생각하면 언제든지 아이를 차에 태워서 야간 소아과나 응급실을 방문해야 했기에 한달에 한두번 마시는 한캔의 맥주도 큰 마음을 먹어야 즐길 수 있는 사치였습니다.
취업 이후 변해버린 아내를, 저는 응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는 외국인이고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일상에서 받는 피로감이 저와 다를거라고 추측했기 때문입니다. 잠자리도 줄여야 했습니다. 일주일에 1회로 줄어버린 잠자리는 한달에 한번이 되고 두달에 한번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매번 피곤하다, 몸이 아프다, 졸리다 등등 여러가지 이유를 댔습니다. 저는 어내를 이해하는게 좋은 남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몇일 전, 아내는 또다시 만취한채 늦게 귀가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아내의 핸드폰을 몰래 확인하게 되었고, 아내가 평소에 자주 사용하지 않는 메신저에서, 보고싶지 않은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어떤 남자와 포옹하고 키스하는 사진들, 임신테스트(한줄) 사진을 찍어서 내연남에게 보내는 내용들...
저는 이런 일들이 드라마에만 있는 일인줄 알았습니다. 현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불륜사진들을 제 핸드폰 카메라로 다시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옷장들을 모두 열어서 아내의 옷을 모두 꺼내 여행 캐리어에 밀어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완전히 잠든 아내를 억지로 깨워서 불륜 사실을 추궁했습니다.
불륜을 추궁받은 아내는 처음에 모른다고 발뺌하다가 본인의 핸드폰에서 모든 기록을 지운 뒤 '옛날 사진'이라며 불륜이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진에 찍힌 옷은 최근에 산 옷이었고, 사진속에서 아내가 들고 있은 선물은 최근 제가 사준 아이폰이었으며 임신 테스트기를 사용한 화장실은 얼마전에 리모델링한 우리집 화장실이었습니다.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모르쇠로 일관하였습니다. 소란에 깬 시어머니의 추궁에도 대꾸없이 째려보기만 하였습니다.
분노한 저는 관련 증거를 모두 처가집 거른들에게 발송하고 아내의 불륜사실을 알렸습니다. 저는 평소 SNS에 아이의 사진을 자주 업로드했고, 처가 식구들은 언제나 그 사진을 확인하곤 하었습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SNS를 통해서 처가 식구들이 이런 끔찍한 일을 알리려 한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불륜사실을 알게된 자정부터 만 하루가 넘는 시간동안, 저는 이상하게도 안자도 졸리지 않고 안먹어도 배고프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는 이상하게 변하고 세상은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잡히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고난 후, 아이를 하원시켜서 집에 돌아왔을때, 아내는 제게 무릎을 꿇고 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내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바끨때마다 거짓말을 반복해온 아내의 이번 사과도 진심이라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아내의 증언에 의하면 처가의 식구들 모두가 아내에게 전화해서 매우 화를 냈고, 특히 아내의 할아버지가 아내에게 보인 분노는 대단했다고 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긴 했습니다. 본래 아내의 처가는 집성촌에 가까울 정도로 친척들이 한 마을에 모여살았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한국에 돈벌러 갔던 아내의 친척여성 한명이 한국 남자를 만나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태국에 귀국해서 아이를 낳으면 곧 태국으로 따라가겠다는 한국 남자의 말을 믿은 그녀는 정말 그대로 귀국했고, 그 순간 남자는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수년간 홀로 힘들게 아이를 키우다가, 학교도 못간 아이를 두고 암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아비가 버리고 어미가 죽은 그 아이가 우리 애보다 불과 한 살 많지요.
그래서 아내가 한국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때 , 태국 처가에서는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내의 불법체류상태를 해소하고 비자 발급을 진행했으며, 아이가 돌이 지나고나서 한상자 가득한 선물을 가지고 처가를 방문하였습니다. 가족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고 연말연시 축제를 후원하고 냉장고도 바꿔드리고 어른들 용돈도 드리며 어울렸습니다. 저는 그 동네를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이었고, 처가의 걱정은 곧 처가의 자랑으로 뒤바뀌었습니다. 첫 방문으로부터 2년 뒤 두번째 방문에서 처가의 환대는 제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환대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기에 아내의 할아버지가 보인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태국을 떠나 외국에서 불법체류를 했던 수많은 고향 젊은이들 중, 해피엔딩은 아내 한명뿐이었으니까요.
조금 정신이 돌아온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법무사,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전문가들의 예상에 의하면 굳이 합의가 아니라도 이혼이 가능할 정도이며, 아이 양육권은 높은 확률로 가져올 수 있고, 다만 제가 확보한 증거를 이용해 상간소송을 할 경우 변호사 선임비를 뛰어넘는 위자료를 받을 수 있을진 확실치 않다고 했습니다. 법적 조치를 알아보고 온 그날 저녁, 아내는 저는 물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빌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내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본래 스킨십을 좋아하는 제가 아내의 잠자리 거부를 이해해준 것은 아내가 회사에 다니면서 피곤했을거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렵의 아내는 내연남과 수시로 함께 지내며 임신을 우려할 지경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저는 용서와는 별개로 이혼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엄마가 없는게 싫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알은, 아직 나이도 어리면서, 아빠도 엄마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모두 같이 있고싶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없어지는게 싫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알았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는게 무엇을 뜻하는지를요. 그저 못먹고 못자고 못입고 못사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일해야 하는건 희생의 짜투리에 불과했습니다. 아이가 엄마를 원한다면, 저 혐오스러운 여자를 아내로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것... 용서는 못해도 용납은 해야하는 그게 희생이었습니다. 아이를 좋아하는 제가 이 이상의 출산은 포기하고, 성적인 쾌락도 포기하고 설령 아내가 또 바람를 피우더라도 아이가 어느정도 크기 전까진 무조건 참는게 아빠의 희생이었네요.
그래서 저에겐 고민이 없습니다. 제 인생에 선택권은 없으니까요. 고민이란 선택의 문제니까요.
저는 앞으로 살면서 결코 사찰엔 가지 않으려 합니다. 불교는 믿지 않으려고요. 이딴게 인생이라면, 한번 살면 되었지 뭘 자꾸 윤회해서 또 산단 말입니까
제게 소망이 있다면, 아이가 빨리 자라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빨리 자라서 저에게 왜 그러고 사느냐고, 그냥 이혼하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날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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