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한살때 였습니다. 저는 유모차에 누워 있었고. 제 앞에 나비모양 모빌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때 보았던 모빌의 모습은. 색조가 선명하지 않은 뿌연 흑백사진 느낌입니다. 저는 그 모빌이 매우 좋았습니다.
외가집은 전라도 나주에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저를 업고 외가에 갈 때가 있었는데. 그 때 당시 광주의 버스 종점에서 내릴 때 저를 보고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던 안내양 누나를 기억합니다.
세살 무렵에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저는 엄마품을 빼았고 친척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한 동생이 매우 얄미웠습니다. 한번은 엄마한태 동생이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죽는다 는게 어떤건지 이해 못하던 시절의 발언이였죠. 죽음의 개념을 아는건 훗날 초등학교 입학 후. 학교앞에서 팔던 병아리 두마리를 사왔을 때 였어요. 어느날 두 다리를 쭉 뻗고 움직이지 않는 병아리를 보고. 죽음이 뭔지 알게 됐어요. 그전 까지 죽음이 뭔지 몰랐죠. 그래서 인지 그때 어머님은 그 발언에 대해 크게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어쨌든 동생이 미웠던 저는. 엄마몰래 동생이 먹는 분유의 뚜껑을 따고 그것을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하곤 했어요.
친척들이 동생만 보는게 분해서. 걸어다닐 수 있음에도 일부러 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안방에 보일러 온수관이 터져서 뜨거운 물을 왼쪽 허벅지에 뒤집어 쓰는 사고가 났는데. (당시 보일러는 아마도 순환을 더 좋게 하기 위한 목적인지 벽을 타고 올라가는 파이프와 다시 내려가는 파이프. 그리고 그 파이프가 연결 된 플라스틱 물통. 을 벽에 걸어두는 형태의 장치가 있었습니다. ) 아파서 우는 와중에도. 어른들이 전부 모여서 저를 걱정하는 모습에 안도하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당시 저에게는 엄지발가락을 빠는 버릇이 있었는데. 보통 손가락을 빨다가 뭔가 색다른게 빨고 싶었던 저는 발가락을 입에 넣어보았거든요. 그 자세와 뭔가 짭조롬한 맛 등이 특이하다 고 생각했는데. 발가락을 빠는 저를 보는 주변 어른들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더 그랬었어요.
그 무렵. 우리집은 영등포 양남동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제가 놀고 있으면 동네 어른들이 달력 같은것을 가져와서 거기에 인쇄된 글자를 가리키며 읽어보라고 시킵니다. 그러면 그걸 다 읽었거든요. 그러면 동네 어른들은 놀라워 하며 신기해 했습니다. 어떻게 3살짜리 꼬마가 글을 이리 읽느냐며. 제가 세살 때 이미 한글을 읽을 줄 알았다는 사실은 어머님한테 들어서 안 사실인데. (어머님이 저를 업고 길을 가면 저는 이 간판 저 간판 가리키며 저게 뭐냐고 어머님께 물어보고. 그러면 어머님은 그 간판을 소리내어 읽으며 가르쳐 줍니다. 그러다가 한글과 아라비아숫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네요. ) 그러한것이 제 기억에 전혀 없는 것을 보면…. 글공부나 글읽기 같은건 저에게 그다지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식당에서 제가 했던 놀이 중 가장 재미있는 놀이는 앞문으로 들어간 다음 뒷문으로 나와서 다시 앞문으로 들어가고. 이것을 몇번이고 계속 반복하는거 였어요. 뭐랄까. 몇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왠지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착각도 들고. 거기에 재미 포인트가 있었던거 같아요. 지금 생각 하면 그때 왜 그런 놀이를 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요.
그러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여느때와 같이 뒷문으로 나와 골목길을 지나 앞문으로 해서 들어가려는대 어째서인지 문이 닫혔고. 당황한 저한테 인도를 넘은 트럭이 다가왔습니다. 그 다음 장면은 병원이였는데. 아버지가 동그란 통에 담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사 사지고 오셨고. 저는 그것을 한숟가락 정도 먹은것 같은데…. 그 이후로 기억이 흐릿하다가. 네살때 까지는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제 오른손바닥에는 붉은 반점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한약방에서 침을 맞았는데 그 자국이라고 합니다. 전 그런 침을 맞은 기억이 전혀 없는데… 아마도 제게 기억이 전혀 없는 네살때 맞은 모양입니다. 무슨 침을 어떻게 맞았으면 평생 가는 붉은 반점이 생기는지. 그 침을 맞은 목적이 혹 자폐증 치료는 아니었는지… 그래서 가끔 오른손바닥 반점을 보면 기분이 좀 이상해요.
다섯살 때. 그때 당시 세살인 사촌동생 하고 동네 시장 근처에서 놀고 있었어요. 길 바닥에서 놀고 있는 사촌동생의 뒤로 커다란 트럭이 다가옵니다. 저한테는 그 장면이 마치 슬로모션 처럼 보였어요. 즉시 몸을 날려서 사촌동생을 가슴으로 받아 안고 시멘트 포장된 땅을 굴렀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트럭은 제 뒤로 지나갔구요. 동생을 사고에서 구했다는 기쁨도 잠시. 땅을 굴런던 것이 너무 아파서 바닥에 주저 앉아서 울었습니다. 엉엉 울었어요. 그제야 동네 어른들이 뭔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다가왔지만. 저는 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 후로 사고처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트럭 은 정차했는지 그냥 지나쳐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후로 기억나는 일이 제법 있는것으로 미루어 볼때. 세살 때 교통사고를 이유로 뭔가 잠겨 있던 것이 동생을 교통사고에서 구해준 것을 계기로 풀린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섯살 되던 해. 엄마손 잡고 유치원에 갔으나 입학 거절당합니다. 제가 자폐아 라는 이유 였어요. 저는 그해 유치원 대신 태권도 학원에 다녔습니다. 태권도 학원에서 비가 오면 창밖으로 도로를 보곤 했는데. 자동차에서 흘린 기름때문에 무지게 빛으로 빛이 나던 도로의 모습이 기억나네요. 저는 도로에 무지개가 떴다며 좋아했어요. 차가운 겨울 바람과 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면서. 그당시 저는 나무가 흔들리면 바람이 불기 때문에. 나무가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물질 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엄마. 나무는 바람물질이지요?” 라고 묻기도 했어요. “나무는 발암물질 이 아니야.” “나무가 바람을 일으키는데요?” “???”
친척들이 모이면. 어른들이 아이스크림을 사주시곤 했는데. 월드콘은 당시 저한테 너무 양이 많아서… 월드콘을 집어주면 마다하고. 동생과 나눠 먹을 수 있는 쌍쌍바 나 쭈쭈바 같은 것을 집었어요. 그것을 또 어른들은 기특해 하셨죠. 용돈을 주셔도 천원짜리 마다하고. 백원짜리만 받았어요. 백원짜리로 쭈쭈바를 두개 살 수 있었어요.
국민학교 입학하고 첫날에 제가 선생님한테 드린 질문은. “준비물 이 뭐에요?” 였어요. 준비물 이라는 단어는 그때 처음 봤거든요.
준비물로 문재집을 사야 했어요. 어머니가 문제집 살 돈 500원(백원짜리 5개)을 주셔서 그거 들고 문방구로 가다가 길에서 넘어졌어요. 무릎 까진 것 보다 넘어져서 돈을 잃어버린 것이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울면서 집에 돌아갔어요.
한번은 어머니 심부름으로 약국에서 탈지면을 사오라 해서 사러 갔는데. 약국 문 앞에서. 탈지면이 뭔지. 그게 과연 약국에서 판매하는게 맞는지. 탈지면 주세요 하면 그런거 약국에 없다. 하는건 아닌지… 근데 그거를 확인하는 것이 두려운 마음이 들었어요. 보통이면 그냥 문 열고 들어가서 “탈지면 주세요” 할 텐데. 저는 그것을 못해서 약국 앞에서 서성이다 약국 옆에 해가 떨어질 때 까지 앉아 있었죠. 약국 옆 골목길에서 혼자 답이 언니오는 고민을 하며 앉아있는 저를 저녁이 되어 찾아온 어머니는. 별 말씀 없이 제 손에서 돈을 받아서 약국에 들어가 탈지면을 사고. 제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때 제가 초등학교 4학년 쯤 되던 해였어요.
학창시절 교우관계는. 아주 친한 영혼의 단짝 한명. 그리고 그친구의 친구라서 어울려 다니는 느낌으로 세네명. 그런 느낌 이었어요. 심하게 왕따를 당한가거나 그런 적은 없었는데. 아니 없지는 않았죠. 방과후에는 저를 괴롭히는 친구들을 피해서 일부러 멀리 돌아서 집에 가곤 했거든요.
제가 그래도 공부는 제법 했어요. 5학년 기말고사를 전과목 다 합쳐서 딱 4문제 틀렸어요. 당시 전교 석차를 안 알려줬는데 아마도 전교1등 했을거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이용하는 친구가 생기네요. 시험 시간에. 지우게 뒤에 번호를 적어서 저에게 전달해요. 그럼 저는 거기에 그 숫자의 문제 정답을 적어서 다시 줍니다. 그런 부정행위로 그 친구는 평균 점수를 80점 이상으로 올렸어요. 저는 그런 그 친구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어요. 거절하면 괴롭히니까요.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IQ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는 충주에 가서 알았어요. 137이였데요. 초등학교 에서는 안알려 줬는데. 충주의 중학교에서 기록부를 살펴보던 담임 선생님이 알려 주셨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우리집은 충주로 이사를 갔어요. 거기서도 나쁜 친구가 있었었고. 저는 거기에 이용당했죠. 책은 빌려가서 안 돌려주고. 어디 같이 놀러가자. 비용은 자기가 계산 할 거니까 일단 돈은 나한테 맡겨라. 해놓고 놀러갔다 와서는 놀러가서 정작 쓴 돈이 별로 없는데도 맡긴 돈 전부 때먹고…. 그랬어요.
학창시절 취미는 그림그리기. 컴퓨터. 음악은 록 음악을 주로 들었어요. 저를 록음악의 세계로 인도 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이었죠. 교실이데아가 참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림그리는 것이 좋았던 저는 만화가를 꿈꿨어요. 만화가가 되는데 대학이 뭔 소용인가. 고등학교 중퇴 한 서태지도 이렇게 성공 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저는 고교시절 학업을 게을리 했죠. 공부와 담 쌓은 생활을 했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대여점에서 소설 책이나 만화등을 빌려서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드래곤 라자. 퓨쳐워커. 폴라리스 랩소디. 퇴마록. 파이로 매니악. 등을 읽었어요.
군대에서는 참 힘들었어요. 구타. 가혹행위. 관심사병. 누구하나 내 편이 없었어요. 여긴 마치 지옥이다. 나는 지금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다. 나는 지금 악몽 속에 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저는 감각 과잉이 좀 있는거 같은데. 빛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는 편인것 같아요. 어두운 방에 있다가 불이 켜진 마루로 나오면 눈이 부셔서 눈을 찡그리는데. 눈이 아파서 그리 되는건데 아침부터 표정이 그게 뭐냐고 항상 한소리 들어요. 비가 와서 흐린 날에도 해가 떠 있으면 난 반사된 했빛이 눈이 부셔요. 군대에서 이거 때문에 힘들었는데.
“신병. 지금 표정이 왜그래? 일하기 싫나?”
“아닙니다. 햇볓이 눈이 부셔서 그렇습니다.”
“지금 해가 어디 떠있다고 햇볓 타령이야!”
이런 식으로… 정말로 눈 부셔서 눈이 아파서 찡그린 건데 누구도 믿지 않아 억울했어요. 지옥 같았던 군대. 그래도 죽지않고 만기 전역 했네요. (제가 자살 안한게 용하다. 라는 선임병도 있었어요. )
마흔두살이 된 지금은 프로그래머로. iOS , android 용 앱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
아스퍼거 관련 문서를 읽어봤는데. 많은 부분에서 제가 해당하는 부분이 있었네요. 지금 제 직업도 프로그래머고… 지금도 대인관계는 어렵기만 합니다. 만나는 친구도 없고. 어렸을적에 친했던 친구는 연락이 안되는데. 되더라도 분명 변해 있을 옛 친구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고. 이제 슬슬 여자도 사귀고 하라는데 관계는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지속되는지 전혀 모르겠고. 가연 가입해서 몇번 아가씨도 만나보고 했는데. 관계가 계속된건 한번도 없었어요. 연예 어려워요.
아스퍼거는 표정을 짖는게 어렵다는데 제가 그래요. 자연스럽게 웃는게 어려워서. 거울보고 웃는 연습을 따로 했어요. 지금은 함박 웃음 짓는 표정은 만 들 수 있는데. 자연스럽게 나오는 미소를 만드는게 어려워요. 아스퍼거는 표정근육을 잘 사용하지 않아서. 안면 노화가 늦어 동안이라고 하는데. 제 동안의 이유를 이제 안것 같아요. 피부 좋다는 말도 많이 듣죠.
길을 걸으면 걸음걸이 이상하다고 어머니 한태 맨날 지적 당하는데 안고쳐져요. 저 자신은 제 걸음걸이가 뭐가 어떻게 이상하다는지 이해가 인가요.
저는 고지능 아스퍼거 였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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