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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헉...
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번이라도 돌아보면 그 자리에서 멈춰버릴까봐, 그녀의 눈물을 보면 차마 떼어놓지 못 할까봐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미칠듯이 달렸다.
가쁘게 내뱉는 입김이 뽀얗게 나의 시야를 감싸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순간 세상으로 부터 너와 나를 떨어지게 해주는 그 입김이 고마웠다.
모든것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별 후의 세상은 볼록렌즈로 바라본 어린 시절의 세상처럼, 모든것이 부풀어 내 눈안에서 어리고 있었다. 하얗게 세상을, 나를 , 너와의 기억을 덮고 있는 함박눈 속에서...
톡.톡.톡.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따라 너와의 사랑도 떨어지고 있었다. 영원히 보이지 않을것 처럼..
새로운 문자 메세지 01
어디니? 응? 제발 말 좀 해줘. 만나서 더 이야기 하자 응?
새로운 문자 메세지 02
밤새서라도 네 집 앞에서 기다릴꺼야. 안 온다고 말해도 기다릴꺼야 지금 집으로 갈꺼야. 너의 집으로.
새로운 문자 매세지 03
집 앞이야. 기다리고 있어. 추워. 나 추위 많이 타는거 알지? 그래도 기다릴래.
미안해. 나 그곳에 없어. 이미 그곳은 내 집도 아니야. 기억속에서 우리 추억이 있던 풍경일 뿐이야. 미안해. 미안해.
몇 천번이나 속으로 되내이는 미안하다라는 말로 나를 자위하며, 애써 너의 문자들을 무시했다. 소중하고 소중해서 차마 지우지 못한 몇 십여개의 문자들을, 오늘 너와의 이별 후에 다 지웠다. 기억속으로 몇년 후 희미해질 기억속으로 모든걸 버렸다.
3 시간 전.
몸서리치는 휴대폰의 울림을 확인했더니, 그녀로 부터 문자가 왔었다.
새로운 문자 메세지 01
7시30분 우리집 앞으로 올것. 내 방 창문에 불이 켜지기 전까지 유효한 약속임.^0^
7시 30분 까지 라면, 더군다나 불빛이 비치기 전까지 라면, 6시 까지는 오라는 이야기잖아. 겨울인데. 겨울이면 낮도 짧은데.. 달려야 겠군.
짧은 생각을 하며 휴대폰 폴더를 닫았다.
' 서둘러야겠네. 퇴근시간도 얼마 안남은듯 한데, 어쩌지. '
" 어이 이 군! "
" 네? "
" 이거 좀 처리해 주겠나? "
" 네.. "
' 쩝.. 하필이면 약속잡힌 날에 다른 업무라니.. '
일 복많은 나를 탓하며 굵게 철 된 서류뭉치를 받아들었다.
" 퇴근 전까지만 처리해주면 되고, 발주는 내일 이니까, 오전 발주중으로 마무리 지어주게 "
" 네. "
' 후 아..... 내일 아침 발주 전 까지라.. '
의외의 말에 안도하며 책상을 올려다 봤다. 산더미 처럼 쌓인 서류들. 그래 내일 아침에 일찍 나와서 정리를 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한다.
5시 30분 정시 퇴근
" 저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
뒤통수에 꽂히는 따가운 눈초리들을 애써 모른체 하며 서둘러 달렸다.
옷도 엉망인데, 지갑은?
지갑을 확인해보니 얼마 남지 않은 돈이 나를 서글프게 한다. 가난한 이의 사랑이란..
버스 정류장은 아직 멀리 있는데, 나는 아직 여기 있는데, 발걸음은 이미 저기 멀리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있나보다. 몸과 반하는 감정의 움직임.
이제 곧 남남으로 남아야 할 우리인데, 우리라고도 부를 수 없는 우리 인데, 아직도 감정은 너를 내 사랑으로 인식하고 있나보다. 아니 영원히 인식하고 가둘것만 같다. 너 라는 사람을. 나라는 사람의 감정의 굴레 속에.
생각외로 막히지 않고 조금 일찍 도착한 탓에,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요량으로 쇼윈도에 나를 비추어보니, 달려오느라 머리도 엉망이고, 퇴근 후 바로 온거라 옷도 부시시한 주름이 잡혀있었다.
옷가게 아가씨의 구경하는 눈길따위는 무시하며, 이리저리 손 보고 있는데, 나의 시선속으로 빨간 모자달린 코트가 들어왔다.
' 이쁘다. ' ' 은영이가 입으면 어울리겠는걸. '
사랑이란 이런것인가 보다. 좋은 것. 이쁜 것. 아름다운 것. 맛있는 것. 오감으로 느끼는 가장 행복한 것들을 공유 하고픈 감정. 그게 사랑인가 보다.
' 다음에 사줘야지. 지금은 여유가 없으니.. ' ' 13만 9천원 이라.... '
늘 메고다니던 크로스 쌕을 열어 다이어리를 꺼내어, 가게와 가격표 그리고 사줄 날을 메모해뒀다.
' 이별인데, 정을 떼야지. ' ' 아냐 그래도 겨울인데 아직은 몰라도 곧 더 추울꺼야, 가뜩이나 추위 잘 타는데, ' ' 괜찮아. 헤어짐 앞에서 그런 것들은 미련을 남기는 것일뿐이야. 그만해 '
나를 가로짓고 나를 나누는 두가지 감정. 답답한 맘까지 구겨넣어 가방을 닫는데 작은 메모지 한장 떨어진다.
사랑해. 난 영원을 믿지 않지만, 영원까지 이르를 사랑은 믿어. 나를 안아준 너의 마음까지도. 더 사랑하자. - 은영 -
왜이렇게도 나를 잡아끄는 것이 많은 오늘일까. 곧 보내야 할 기억속의 모든 단편일텐데, 그리고 몇년후면 희미해질 모든 기억일텐데, 왜 이리도 기억을 이어주게 하는 일들이 많은 것일까.
서글픈 생각을 갈무리 하며 멀리 바라보는데, 누군가 손을 흔들며 뛰어온다. 그녀였다. 가쁘고 위태한 내리막길 인데도 - 더구나 눈까지 내린! - 그녀는 나에게로 안기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 이 순간도 과거가 될테지. 미안해. 미안해.
민아! 나 여기있어. 여기.
응. 뭐야 창문 앞으로 오라더니. 먼저 나오고, 반칙했어.
생각은 본능보다 뜨겁지 않다. 애써 감추는 감정보다 본능은 뜨거움으로 너를 반기고 있으니.
아. 그게. 옷갈아 입구 이리저리 하다보니 시간이 남더라구, 이때 쯤이면 너 여기쯤 이지 않을까 싶어서, 걸어오고 있었지.
내리막길인데, 잘 넘어지면서 뭣하러 나와. 걱정 되게.
피.. 마중나오는거 싫은가부지?
아.. 그건 아닌데, 걱정되서 그렇지 머. 저녁은 먹었어?
응 간단하게, 넌?
아직 전이지. 너 때문에 무지 달려온걸. 회사사람들 눈치가 뒤통수에 박히는데 아파서 죽는줄 알았어.
호호호. 그래? 밥먹으러 가자. 너 배고프겠다.
그래.
잡은 손에 들어오는 힘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제 말해야 겠지. 이별을.
Post Script
1.
4~6 년 전의 일을 기억해내기란 상당히 어렵군요.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시간이라는 거대한 물결속에서 서서히 희석되어가는 기억들은, 잡으려고 잡으려고 애를 써도, 아이의 손을 떠나버린 잠자리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이어지는 순간까지는 기억해야겠지요. 어쩌면 이렇게 글로서 남기는것도 잊지 않으려는 행위일지도 모르니까요.
2.
행복하세요. 바라는 만큼의 행복을, 그리고 지금 그대들의 곁에서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고마워하고 또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나날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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