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는 밤늦게 옹기종기 모여서 썰 푸는 분위기로 해야 제 맛 아니겠어. 크크. 유독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많고 공포 관련 썰도 많은 곳이 군대인거 같아. 하지만 나는 실제로 겪은 일에 대해서만 말할거란 걸 미리 밝힐게.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이야기 한 적 몇번 있었는데 "이새끼 군대 갔다오더니 구라만 졸라 늘었네. 낄낄낄" 이런 반응이었거든. 약간의 과장이나 생략 같은건 이해해주길 바라. 크크.
나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바로 다음해 1월에 입대를 했어. 입대하던 날 아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 사촌 형이 훈련소까지 태워주려고 전날 우리집에서 잤거든. 그날 아침 아버지가 지방에 내려가신다고 분주했는데 엄마는 군대가는 아들은 안중에도 없고 아버지 밥 차리고 넥타이 매어 주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어. 논산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굉장히 서글픈 기분이 들더라고. 나중에 내가 보낸 옷가지를 받고 엄마가 엄청 많이 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멘탈이 흔들릴 만큼 인간 자체가 엄청 위축되어 있었던거 같아.
군대에서는 생각이란 걸 할 필요가 없어서 너무 좋았어. 조교가 시키는 것을 하고 하지 말란건 안하면 되니까. 처음 2주 동안은 새벽 구보에 낙오를 했어. 팔굽혀 펴기는 5개도 못했고. 근데 몇대 쳐맞고나니까 다 할 수 있게 되더라. 참 신기하지.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햇볕 많이 쬐고 쉴새 없이 구르면서 나는 예전에 자신만만했던 캐릭터를 조금씩 찾았어. 수료할 때는 상장도 받았어. 100미터 기록이 17초 정도 밖에 안되던 내가 몸쓰는 곳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내다니. 진짜 기쁘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열의가 생겼던 것같아.
신검에서 키가 175였는데 뜬금없이 주특기가 헌병이 나왔어. 전공이 법학이라서 그랬던건가, 암튼 헌병 학교에서도 조교들에게 평판이 나쁘지 않았어. 어느날 구대장이 나를 부르더니, 제대하는 병사 후임으로 나를 뽑고 싶다고 위에다 보고했다고 했거든. 결국 면접에서 뽀대가 너무 안난다는 이유로 탈락했어. 헌병 장구 착용했을 때 모습이 위압감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너무 웃기다는거야. 한 기수가 200명쯤 됐는데 키 순으로 뒤에서 1,2등이었으니. 크크. 다들 꼬마 헌병이라고 놀렸어.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대 통지를 받았어. 헌병은 일반적으로 수방사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출해 가거든. 2호선 사당역 근처에 있는 거기 말야. 후반기 성적도 좋았기 때문에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뜬금 없이 강원도에 있는 모 사단에 배정이 된거야. 실망이 꽤 컸지. 그래도 그 당시에는 어느 부대를 가더라도 사랑받는 후임이 될 자신이 있어서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어.
보충대에서 길고 지루한 대기 끝에 나를 데리러 차가 왔어. 흰색 차체에 헌병이라고 쓰여있는 미니 버스였는데 그걸 콤비라고 불렀어. 딱 올라타면 ktx처럼 마주보는 좌석이 있거든. 거기에 앉으라고 하더라고. 따블빽을 벗을 새도 없이 맞은 편에 헌병 하이바 쓴 병장이 전투모 챙을 사정없이 내려치면서 소리를 질렀어. "야이 개새/끼야. 노래 불러. 노래 하라고!!"
막 소리를 지르면서 머리를 때리는데 진짜 혼이 쏙 빠져서 말도 안돼는 노래를 나오는대로 막 불렀어. 훈련소와 후반기 교육을 거치면서 '군생활 별거 아니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나는 뭔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예비역들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 많을거야. 창 밖으로 풍경이 얼핏얼핏 보였지만 무서워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어. 야트막한 산중턱으로 이어진 비탈길을 기어올라 위병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어. 차에서 내리자마자, 길고 긴 군생활을 함께 할 자대 모습이 파노라마 필름처럼 눈에 들어왔어.
2년을 거기서 보내는 동안 분명 여름도 있었을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지독하게 춥고 쓸쓸했던 풍경만 떠오르네. 해골처럼 앙상한 나뭇숲에 둘러쌓인 음산하고 황량한 막사가 있었어. 누가 강제로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흐릿하고 칙칙한 배경 속에 덩그러니 지어진 건물이었어. 산 아래에 꽤 큰 하천이 흐르고 있어서 사시사철 안개가 껴 있었거든. 대한민국 군대가 다 거기서 거기지만, 지은지 30년은 가뿐하게 넘긴 건물이라 그 모습만 보고 있어도 왠지 가슴이 답답하고 끝없이 막막해지는 그런 곳이었어. 높다란 계단 위에 당직대 건물이 있었는데 한 고참이 건물 아래에 뻐끔하게 내어 놓은 창문 두개를 가리키면서 저기가 영창이라고 알려 주었어. 눈알이 뻐끔하게 뚤려있는 시체의 눈구멍을 보는 것처럼 기분이 오싹했어. 말라죽은 덩굴 같은게 철창에 어지럽게 감겨 있어서 더 을씨년스러웠어.
아무도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무실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어. 약간 긴장이 풀리려고 할때 쯤, 병장 몇명이 일병 한명을 끌고와서 내 눈앞에서 쌍욕을 하면서 다구리를 치기 시작하는거야. 훈련소에서도 군화발로 차거나 탄띠를 풀어서 후려치는 조교들이 몇몇 있긴 했어. 그래도 교육자와 피교육생 관계인지라 최소한의 마지노선은 있었거든. 근데 여기는 그런게 아니었어. 일병 가슴팍에 정통으로 주먹을 꽂아버리니까 내무실 바닥에 꼬꾸라져서 숨을 꺾꺾 거리면서 침을 질질 흘렸어. 진심으로 너무 무서워서 상단 관물대에서 1센티도 눈을 돌릴수가 없었어.
그렇게 점호시간이 시작되면서 나는 완전히 절망에 빠져버렸어. 나와 마주보는 침상에 그 다구리 당한 고참이 서 있었거든. 부동 자세로 점호를 받는 중에 이마를 타고 핏줄기가 흐르기 시작하는거야. 일직 사관은 청소 상태를 점검 하는 중이라 발견하지 못한 눈치였어. 그걸 보고 있는데 진짜 입안이 바작바작 마르더라고. 전투복하고 침상에 피가 계속 떨어지는데 그걸 일직 사관이 발견 못할리가 없잔아. 나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간부들이 폭행 사실을 인지하면 어떤식으로든 징계를 하거나 주의를 줄거라고 믿었어. 그러면 고참들이 일시적으로나마 몸을 사릴테니까. 그런데 간부란 놈이 피 흘리는 병사를 쓱 쳐다보더니 일직 부관을 보고 나직하게 말했어.
"야, 이새끼 데려가서 피 닦아. 적당히 좀 하라니까..."
이게 끝이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리더라고. 신고를 하든 소원 수리를 하든 초동 수사는 헌병대 수사과에서 하거든. 이제 이 울타리 안에서 내가 죽는다해도 나의 구조 요청에 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 제발 살아만 있자는 심정으로 이 부대의 실체를 파악해보려고 노력했어. 병장 몇명 외에 모든 부대원이 극도의 긴장상태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어. 만성적인 수면부족과 불안 때문에 단체로 무슨 전염병이라도 걸린 얼굴이었어. 농담을 하거나 웃음을 보인다는 건 상상할수가 없었어. 부대 전체가 안개 속에서 시작해서 안개 속으로 빨려가는 느낌이었어.
하나 알게된 것이 있는데, '점호 스타' 라고 부르는 우리 부대에만 있는 이상한 전통이었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런거야. 병장들이 상병 밑으로 해서는 안될 금기 사항을 정해두는거지. 웃지 않기, 노가리까지 않기, 휴게실과 이어지는 문 사용하지않기, 담배 필때 왼손으로 피기, 취사장으로 이동할때 반드시 연병장으로 돌아가기, 전화나 PX 이용 금지, 전투화 닦을때 쭈그려 앉아서 닦기 뭐 이런 민망할 정도로 유치한 금기사항이 많았어. 필연적으로 어길 수 밖에 없는건데 그걸 점호시간에 발표를 시키는거야. "야 XXX일어나. 오늘 너 점호 스타 만들어 준다. 너 낮에 했던거 다 발표해." 이러면 무슨 인민 재판하듯이 자기 잘못을 스스로 고백하고 고백이 끝나면 미/친놈들처럼 그 사람 가슴과 배를 발로 마구 차고 반합 같은걸로 머리를 내리 찍었어. 그런데 진짜 무섭고 소름돋는 건 따로 있었어.
전에 다구리 당한 일병을 C일병이라고 할게. 나는 아직 짬이 안되서 외곽근무(순찰, 터미널, 검문소)는 못나가고 영내근무(위병소, 영창)만 나갈 수 있었거든. C일병도 윗선에 찍혀서 영창, 위병소만 돌고 있던 때라 나랑 근무가 겹칠 때가 많았어. 나는 C일병과 함께하는 근무 시간이 좋았어. 그나마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었거든. C일병은 생존에 꼭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 비교적 친절하게 설명해주었어. 제일 먼저 당부하는게 절대 주위 사람을 믿거나 누구 욕하거나 그러지 말라고 했어. 왜 그런가 했더니 일병, 상병 중에 병장들이 심어놓은 일종의 쁘락치들이 있어서 내 일거수일투족이 병장들 귀에 다 들어간다는거야. 점호시간에 병장들이 스타로 지목 했다는건 이미 보고를 받았다는 의미니까, 어설프게 부인하다가 봉변 당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실토하라고 하더라고. 존나 소름 돋았어.
근무를 자주 같이 서면서 약간 친분도 생기고 질문도 하고 그런 정도 사이가 됐어. 전에 내무실에서 왜 그렇게 린치를 당했냐고 물어봤거든. 갑자기 눈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면서 혼잣말로 육두문자를 날리더라고.
"티라노 그 씹/쌔끼..."
그때 C일병을 주도적으로 때린 사람이 '티라노'라고 불리는 T병장이었어. 최고참은 아니었지만, 무소불위의 철권을 휘두르며 사실상 내무반을 통치하고 있었어. 카리스마가 대단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누가 지었는지 별명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 작년에 라틴어를 아주 살짝 공부했던 적이 있어. 진짜 한두달 정도만 깔짝거리다 포기했는데 tyrannus 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거든. 영어의 타이런트(폭군, 참주), 티라노 사우르스 같은 단어의 어원이래. 그걸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 10년도 더 잊고 있었던 티라노의 얼굴이 팍 떠오른거야. 으 소름끼쳐. 나중에 들은 사실인데 티라노가 일병 시절에 멀쩡한 발톱을 내성 발톱이라고 바득바득 우겨서 의무대에서 한 3개월 삐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고참들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티라노의 발톱' 이라고 옛날 영화 제목 따서 별명 지어준거래. 크크
C일병이 이등병으로 처음 전입왔을 때, 티라노에게 사회에서 리니지1을 했었다는 이야길 했대. 티라노가 자기도 리니지 했었다고 서버하고 아이템 같은거 막 물어보더래. 고가 아이템은 입대 전에 정리했고 휴가나가서 놀 수 있을 정도만 맞춰놓고 들어왔다고 하니까 자기도 휴가나가서 잠깐 하고 싶다고 비밀번호를 물어보더란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이등병 시절이라 그냥 가르쳐 줬대. 그 후로 100일 휴가 나가서 잠깐 접속 했을 때까지 아이템이 그대로 있었다는거야. 그래서 별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일병 휴가 나갔는데 아이템이 싹 다 털리고 없더래. 그래서 휴가 복귀한날 티라노에게 아이템 가져갔냐고 했더니 너 휴가 나가기 전에 본인은 휴가 나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이템을 가져가냐고 되묻더래. 티라노가 휴가를 나가지 않은건 사실이었거든. 근데 얼마 전에 티라노 측근 한명이 휴가 나갔다 온게 머리에 번뜩 떠오른거야. 그래서 휴가나간 K상병 시켜서 가져간거 아니냐고 따졌다가 린치 당했다고 하더라. 계정에 남아있던 아이템만 팔아도 족히 천만원을 됐을거라고 하던데...
암튼 티라노 이 새끼는 진짜 무시무시한 놈이었어. 단순히 힘으로 찍어 누르기만 하는 폭군이 아니라 반간계와 기만술까지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책략가였던거야. 도편추방제가 있던 아테네에서 교묘한 궤변으로 민중을 선동하는 참주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훈련소에서는 그래도 전우애라는게 있었거든. 근데 여기는 배신과 모략으로 가득한 정치판이나 다름 없었어. 자기 실수를 후임에게 뒤집어 씌우고 술취해서 자는 애들 깨워서 돈 뺏고 그런 것 따위는 일상다반사였어. 자유한국당 같은데 들어갔으면, 어떤 의미로는 진짜 가공할 만한 정치력을 보여 줬을거야.
자대에 온지 두달쯤 지나 약간씩 그런 분위기를 파악해가고 있었어. 오후 근무를 끝내고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티라노 이새끼가 취사장에 들어와서 소리를 막 질렀어.
"야, 개들!"
그러자 밥 먹고 있던 고참들이 다들 숟가락을 놓고 관등성명을 외쳤어. 나도 숟가락을 놓고 바싹 얼어 있었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부대에서는 일병을 '개'라고 불렀거든.
"개/새끼들이 왜 사람같이 먹고 있어. 앙?"
갑자기 일병들이 숟가락을 놓고 식판에 얼굴을 쳐박고 밥을 먹기 시작하는거야. 너무 황당했지만 짬 찌끄러기도 안되는 이등병이 뭘 어쩌겠어. 얼굴에 최대한 밥풀이 붙지 않게 식판에 입을 대고 밥을 먹기 시작했어. 옆에 있던 고참이 이등병은 하는거 아니라고 엄청 화난 눈짓을 보내더라고. 참 미칠 노릇이었지. 숟가락을 들고 티라노 쪽을 보니까 옆에 약간 띨빵하게 생긴 처음보는 사람을 한명 데리고 왔어. 러닝 셔츠나 활동화가 깨끗한거 보니까 왠지 신병인거 같더라고. 나도 벌써 후임을 받는건가 생각이 들어서 약간 기분이 좋았어. 극도로 핍박받는 경험을 해보면 후임한테는 진짜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막 들잔아. 군대 갔다온 사람들은 아마 다 알거야. 티라노가 내 옆자리에 신병을 앉히더니 챙겨주라고 말했어.
저녁을 다 먹고 취사장 뒷편에서 고참들 담배 피는걸 기다리고 있었어. 짬통 근처에 고양이들이 살았는데 이 부대는 고양이까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사람을 피했어. 고참들이 식판에 남은 반찬을 들고 다가가려하면 앙칼진 울음소리를 냈거든. 야간에 근무를 서면 고양이 울음소리가 위병소까지 들려. 밤에 들으면 그 소리가 어린애들 울음소리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진짜 으스스하고 찝찝했어. 말 없이 담배를 피우던 티라노와 다른 고참들이 신병하고 나만 두고 취사장 안으로 들어갔어. 5분쯤 기다려도 안나오길래 신병에게 집은 어디인지 몇기인지 이런거 슬쩍슬쩍 물어봤어. 더듬더듬 하면서 막 XX이병님 이러면서 나한테도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 나는 신이나서 아는데까지 다 이야기 해줬어.
근데 얘가 "혹시 고참들 중에 조심해야 할 사람 있습니까?" 이런걸 묻더라고. 아까 니 옆에 있었던 티라노 그 새끼가 최고 요주의 인물이라고 완전 개XX라고 말해주려는 참이었어. 근데 신병 마빡에 빨갛게 동그라미 자국이 보이는거야. 해가 저물기 시작하던 때라 벌써 어둑어둑했는데 어둠 속에서 그 빨간 자국이 엄청 선명하게 눈에 띄더라고. 갑자기 고양이도 묘하게 귀기 어린 소리로 앵앵거리고 기분이 께름칙해서 그냥 얼버무려 버렸어. "사실, 나도 온지 얼마 안되서 자세히는 몰라." 이런식으로. 근데 신병이란 새끼가 존나 집요하게 캐묻더라고. 뭔가 약간 이상해서 계속 입을 다물었지. 그때 마침 취사장에서 고참들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어. 갑자기 신병 이새끼가 존나 큰소리로 웃으면서 이러더라고.
"아 시발, T병장님 이새끼 안 속는데 말임다. 낄낄낄."
존나 음침한 눈빛으로 날 보면서 웃고 있는거야. 알고 보니 이새끼 티라노 측근 중에 한명인데 초소에 땜빵으로 갔다가 오늘 복귀한거라고 하더라고. 이마에 빨간 동그라미 자국은 치약 뚜껑에 대가리 박아서 난 자국이라 하고. 와 소름이 소름이 진짜... 그 사건 이후로 나는 24시간 극도의 긴장 상태로 있을 수 밖에 없었어. 야간 근무 갔다와서 빨래나 개인 정비도 해야하니 항상 잠은 3~4시간 밖에 못잤어. 그런 생활이 이어지면서 거의 정신적으로 탈진 상태까지 오게 되었어. 몸무게가 20키로 가까이 빠졌던거 같아. 그렇게 외줄타기 하듯 간신히 버텨가고 있을 때 영창에 미결수로 간부 한명이 들어오면서 부대 분위기가 묘한 국면으로 흘러갔어.
우선 영창에 관해서 모르는 사람이 많을거 같아서 간단한거 몇 가지만 설명할게. 실제 영창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수 없는 영역이니까 한번쯤 들어두는 것도 재미있을거라 생각해. 영창에 들어오는 사람은 '징계 입창자'와 '미결수'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어. 징계 입창은 가벼운 후임병 폭행이나 휴가 미귀 같은 경우에 최대 15일 이내로 영창에 보내는거야. 그러면 입창자가 영창에 있었던 기간만큼 군 생활이 가산이 되는거지. 대부분 영창에 들어온 병사는 징계 입창이야. 우리가 '수용자' 라고 부르면 '일병 김철수 지시불이행' 이런식으로 관등성명에 자기 죄명을 붙여서 대답을 해. 죄명에 따라 '상병 김영희 폭행' 이런식이야.
미결수는 징계 입창과 완전히 달라. 미결수는 단순 징계성 행위를 넘어서 범죄 혐의가 있는데 아직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재판 전까지 감금되어 있는 경우야. 일종의 구치소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돼. 미결수들은 길면 3~4개월까지도 있는 경우도 있고 대기한 기간은 군생활에 포함돼서 따로 군생활이 가산되지 않는게 차이점이야. '상해'라던가 교통사고 관련 '특가법 위반' 같은 죄명이 많았어.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으면 육군 교도소로 이송이 되서 형을 받은 만큼 복역하는거지. 경기도 이천에 육군 교도소가 있어서 죄수 이송하는 근무는 인기가 좋았어. 오랜만에 바깥 구경도 하고 하루 근무 공치는거니까.
식사는 끼니 때마다 수용자 3명을 꺼내서 취사장에 데려가 직접 퍼오는 방식이야. 배식도 수용자들이 직접 하고. 그렇게 철창 안에서 밥을 다 먹으면 각 내무실 마다 돌아가면서 청소와 설거지를 시켜. 잠시 소화시킬겸 일어서서 내무실 안을 걸어 다닐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 나머지 시간은 그냥 쭉 각잡고 앉아 있는거야. 아침 6시 기상해서 저녁 10시까지. 보통 50분 각잡고 10분 휴식 시스템이거든. 해본 적은 없지만 생각만 해도 미칠 노릇이지. 근데 이건 근무자 성향에 따라서 약간씩 달라서 FM대로 빡빡하게 시키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같은 경우는 그냥 들어오자마자 편하게 앉으라고 하고 가벼운 노가리 정도는 허용해 줬어. 근무자에 따라 천국이냐 지옥이냐 갈리기 때문에 수용자들은 근무자 성향 파악에 대단히 민감한거 같았어.
예전에 고참들 이야기 들으면 영창에서 진짜 말도 안돼는거 많이 시켰대. 내가 근무했을 때만 해도 수용자한테 존대말 써줬거든. 예전에는 반말은 당연하고 근무 헌병들이 수용자 패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대. '매미' 라고 하는 고문법이 있는데, 수용자를 철창에 매달리게 해서 땅에 발 닿으면 경봉으로 막 패고 그랬대. 퇴소한 수용자들이 소원 수리를 하도 많이 해서 그런건 많이 없어졌었어. 의외로 영창 수용자들 하고 근무자들하고 친해지는 경우가 많아. 근무 시간은 길고 할 일은 없고 그러니 수용자들하고 노가리 까면서 놀고 그랬어. 당시 드라마 ost를 부른 가수가 영창에 들어온 적이 있어서 노래 불러달라고 그런 적도 있었어. 크크.
(참고사진, 우리부대 아님)
우리 부대 영창 구조는 이런식으로 생겼어. 지하였는데 천장이 3~4미터 될 정도로 엄청 높았어. 수용자들이 자해를 하지 못하게 유리창이라던가 목을 매달 수 있는 구조물이 없었어. 다용도실에는 수용자들이 가져온 세면백과 속옷 같은 것들을 보관하는 물품 보관대와 수용자를 위한 책장 같은게 있었어. 그리고 자살 예방 교육할 때 쓰는 패널도 있었고. 수류탄에 폭사한 사진 같은게 붙어 있어서 밤에 보면 굉장히 으스스했어. 토요일 저녁시간에는 유일하게 TV를 시청하게 해줬어. 1~4내무실 수용자를 꺼내서 5, 6 내무실로 옮겨서 같이 예능프로 같은걸 봤어. 그래서 토요일 저녁 근무는 일병선에서 인기가 좋았어. 설명을 하려면 끝도 없지만 이정도까지만 할게 크크.
어느날 근무 중에 영창을 담당하는 수사과 계원 H일병이 미결수 한명을 데리고 내려왔어. 2내무실에 넣고 상황판을 보니까 '진XX 상사, 상해' 라고 적혀 있더라고. 간부들도 영창에 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는데 진상사는 옷도 사복이고 머리도 덮수룩해서 뭔가 특이하다 느낌이 들었어. 형무 담당 H일병은 사법 시험을 준비하다가 늦게 군대에 온 케이스야. 나이도 거의 서른 가까이 됐었고 같은 법학도라고 나를 많이 챙겨줬었어. 성품도 좋고 간부들과도 친해서 티라노 같은 쓰레기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어. 가령 점호시간에 푸닥거리를 하는 경우에는 "H형은 나가있어. 뒤지기 싫으면." 이렇게 미리 언질을 줬어. 평소답지않게 진상사에게는 쌀쌀맞게 대하더라고. 왜 사복을입고 왔냐고 물어보니까 민간인 신고받고 경찰이 잡은거라 그렇대. 오늘 헌병대로 이첩받은거라고 했어.
일반적으로 병장급이나 간부면 영창에 들어와도 약간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같은게 있거든. 행동도 느릿느릿하고 될대로 되라는 식의 여유가 느껴지는데 진상사는 무언가에 쫒기듯 굉장히 불안해 보였어. 철창 안을 빙빙 돌거나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면서 안절부절 못했어.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밥도 한숟가락 안 뜨더라고. 식판만 바라보고 한참을 앉아 있더니 나를 불러서 혹시 성경책을 구해다 줄 수 있냐고 물었어. 원대에 연락 해놨으니까 전투복하고 개인 물품은 며칠 이내에 이쪽으로 보내 줄거라고 기다리라고 말했어. 뭔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어. 근무 교대 시간이 돼서 진상사와의 첫 대면은 그렇게 끝났어.
나도 외곽 근무를 나가기 시작했던 시기라서 며칠간 영창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어. 내무실이 시끌시끌해서 뭔가 했더니 고참들이 진상사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 진상사는 떠오르는 진상의 아이돌이 되어 있었어. 밥을 먹기만 하면 토하고 야간에는 허옇게 눈을 뜨고 잠꼬대를 심하게 한다는거야. 영창 근무를 하다보면 별에 별 또라이를 다 볼 수 있거든. 후임을 때리거나 물건 훔치거나 이런건 지극히 정상적인 영역이야. 생긴건 멀쩡하게 해가지고 자기 성기에 비닐 씌워서 후임에게 빨게 시킨다거나 후임 여동생 불러내서 추행하고 이런 개쓰레기들도 있었으니까. 암튼 진상사 이야기를 듣고 제발 내 근무시간에는 진상 안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다음 영창 근무 시간에 교대를 하자 마자 진상사의 상태를 확인했어. 표정도 많이 밝아졌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성경 책을 보고 있는거야. 조금씩 영창에 적응을 하고 있는거 같아서 마음이 놓였어. 정신적으로도 꽤 안정되 보였고 가끔 나에게 말을 걸기도 하더라고. 이야기를 해보니까 의외로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조곤조곤하게 하고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은 안들었어. 사실 그렇게 느낀 이유가 따로 있었어. 원래 영창 수용자들에게 자기 전에 '수양록'이라고 일기를 쓰게 하거든. 간부들은 수양록이 없어서 따로 시키지는 않았는데 진상사는 사제 노트에 일기를 쓰는 눈치였어. 수용자들이 일기를 다 쓰고 나면 수양록과 볼펜을 회수해서 다용도실의 물품 보관대에 모아놓거든. 야간 근무 중에 시간이 안가는 경우에는 가끔 수용자들 일기를 훔쳐보곤 했어. 대부분 오늘 무슨무슨 반찬을 먹었다, 오늘은 이것저것을 했다 이렇게 단조로운 내용이라서 몇번 보다가 안보게 되었어.
어느날 진상사의 노트를 본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게 잘 썼더라고. 성경에 관해서 자기가 느낀바를 정리한 글이라든가 어머니와 가족들에 대한 구구절절한 이야기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는데 나름의 진심이 묻어 있어서 좋았던 거 같아. 입대 전에 이윤기씨가 쓴 '그리스 신화'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었거든. 성경도 신화의 한 갈래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들으면 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브라함, 이삭, 출애굽, 여호수아, 예수의 수난과 사도들의 이야기 같은 것들. 약간 개인적이고 급진적인 해석 같은 것들을 걷어내면 상당히 해박한 인문학 강의였어. 그래서 진상사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거겠지 그냥 이 정도로 드라이하게 받아들였어.
어느날 심부름을 갔다가 수사과 뒷편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H일병을 만났어. 노가리를 잠깐 깠는데 진상사 욕을 엄청 하더라고. 왜 그러냐고 했더니 수사관들이 넘겨준 기록을 봤는데 와이프를 가위로 마구 찔러서 들어온거라고 하더라고. 수사과에서 조사중에도 변명도 전혀 안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했어.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갑자기 확 무서워 지면서 사람이 달라 보이는거야.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더니, 다음 근무부터는 진상사를 너무 가까이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던 중에 티라노가 조장으로 영창 근무를 같이 들어가게 되었어. 티라노는 자기 근무시간에 약간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전 부대원들을 상대로 난리를 피우는 스타일이라 바싹 긴장해서 초FM대로 근무를 섰어. 제발 이 시간 동안만 말썽 없이 지나갔으면 하고 계속 빌었어. 그런데 식사 시간이 되어서 배식을 하는데 수용자 한명이 참기름 캔을 흔들면서 참기름이 다 떨어졌다고 하는거야. 그날 메뉴가 비빔밤이었거든. 가져올 때 머릿수에 넉넉할만큼 남아 있는걸 확인했는데 빈통이더라고. 티라노가 배식 감독 안하고 뭐했냐고 다용도 실로 끌고가 가슴팍을 때리면서 엄청 갈궜어. 복도를 돌면서 수용자들 밥먹는 걸 확인했는데 진상사 식판을 보고 경악하고 말았어. 밥 위에 참기름을 국처럼 가득 부어서 그걸 와구와구 퍼먹고 있는거야.
티라노는 잔뜩 빡이 올라서 식사가 끝나고 쉬는 시간도 없이 수용자들을 괴롭혔어. 아무리 근무자라고 해도 간부들은 잘 안건들거든. 근데 티라노는 영창 규정을 내세우면서 진상사를 못 움직이게 하고 성경책도 내 놓으라고 윽박질렀어. 진상사는 신경과민 상태가 되어서 거칠게 항의를 했어. 티라노는 계속 고압적인 자세로 성경책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고, 결국 직접 영창 문을 열고 들어가서 성경 책을 뺏으려 했어. 갑자기 티라노가 '악' 하고 비명을 질러서 봤더니 진상사가 티라노의 팔을 깨물었더라고. 티라노는 진상사를 밀치고 성경책을 들고 영창을 나왔어. 나중에 근무 끝나고 내무실에서 보니까 진상사 욕을 하면서 물린 팔 부위에 약을 바르고 있더라고. 그날 밤 점호 시간에 나는 점호 스타로 지목 당해서 엄청 맞았어. 티라노는 다른 병사들에게도 진상사하고 노가리를 까거나 규정 제대로 안지키면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어.
티라노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나는 몇달간 야간 2번초로 영창 근무를 나가게 되었어. 예비역들은 잘 알겠지만 2번초가 참 지랄맞은 시간대야. 야간 근무가 보통 1시간 30분 단위로 짜여 있으니까 2번초는 11시 30분에서 1시까지거든. 보통 10시 땡 하자마자 잠드는 사람은 없으니까 뒤척거리다 보면 10시 30분쯤 되고 초번초 근무자들이 대부분 최고참들이라서 10~20분 전에 신고를 하려면 거의 11시부터 근무 준비를 해야 한단말야. 잠들만 하면 일어나서 근무 준비를 해야 하고, 근무 다녀와서 장구류 정리하고 밀렸던 빨래나 전투화 광내고 그러면 새벽 2시~3시가 되거든. 늘 그런식이니 평균 수면시간이 4시간이 채 안되는거지. 그런 생활을 몇개월동안 하고 나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게 돼. 항상 의식에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릿한 상태가 되는거지.
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날 밤도 굉장히 지친 상태였어. 약간 친했던 C일병이 조장으로 나가는 근무라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영창에 들어갔어. C일병은 어차피 한 사람만 깨어 있으면 되니까 자기가 먼저 1시간 정도 잠을 자겠다고 하더라고. 1시간 후에 교대 해준다고. 알았다고 하고 환하게 불이 켜진 복도를 걸어다녔어. 영창에는 야간에도 형광등을 완전히 켠 상태로 잠을 재우거든. 혼자 영창에 있으면 굉장히 무서울 것 같지만 너무 환해서 사실 별로 안무서워.
무서운거 보다 수용자들 자는 모습을 보면 진심으로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 수용자가 되는 한이 있어도 잠 한번 원 없이 자보는게 소원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집 생각을 하게 돼. 휴가 신고를 하고 위병소를 지나 터미널로 가서 순대국을 먹고 과자를 잔뜩 사서 고속버스를 타는거지. 톨게이트를 지나고 지하철을 타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집 대문을 벌컥 열면 엄마가 맛있는 밥을 차려놓고 나를 안아주는 거야. 그런 상상을 많이 했던거 같아.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죽을 것 같은 군생활이 약간은 버틸만 해졌으니까.
그렇게 1시간이 휘리릭 지나서 C일병과 교대를 했어. 다용도실 바닥에 앉아서 하이바까지 벗고 기쁜 마음으로 잠을 청했어. 진짜 마취주사를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잠이 들어버렸어. 얼만큼 잠이 들어 있었는지 모르겠어. 갑자기 찢어지는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서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어. 눈을 딱 떴는데 앞이 캄캄하더라고.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내 손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칠흙같은 어둠이었어. 절대 불이 꺼져서는 안되는 영창이었기 때문에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어.
건강한 눈으로 생활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면 극도의 공황 상태에 빠지게 돼. 논리적인 생각이나 침착한 대처능력 같은 것들은 다 눈이 보이니까 가능한거라고.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일이야. 전자 시계의 야광기능을 키거나 그런 생각은 절대 떠오르지 않아. 누군가 정체모를 비명을 꽥꽥 지르고 C일병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뭐하냐고 빨리 불키라고 소리치고 있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 나는 숨이 너무 가빠져서 약간 과호흡 상태가 된 것 같았어. 호흡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벽에 손을 짚고 다용도실 출입구 쪽이라고 추정되는 쪽으로 한걸음 한걸음 옮겨갔어. 그쪽에 형광등 버튼이 모여 있었거든.
예전에 TV에서 눈과 코를 막고 사람들에게 양파를 먹이면 사과와 구별 할 수 없다는 실험 카메라를 본 적이 있어. 당연히 주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까 요즘은 진짜라고 믿는 편이야. 영창 벽을 더듬거리며 걸어가는데 이끼가 잔뜩 낀 축축한 동굴 벽을 짚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어. 아니면 정체모를 파충류의 표피를 만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아무튼 시각이라는 건 참 고맙고 위대한 능력이야. 나는 전인미답의 심연을 향해 나아가는 기분으로 엉금엉금 걸었어. 그렇게 벽을 더듬다가 한쪽 손에 전원 버튼이 걸린게 느껴져서 손바닥으로 버튼을 다다닥 눌렀어. 환하게 불이 들어오는데 진짜 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어. 온 몸이 마른 땀으로 축축했어.
영창이 너무 시끄러우니까 당직 하사하고 일직 사관까지 내려오더라고. 그날 일직 사관이 수송관이었는데 우리 부대에서 가장 깐깐한 사람이었어. 이 사람은 병과가 수송이기 때문에 헌병과는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던 사람이었거든. 헌병 대장에게도 한번 개긴적이 있을 정도로 깡이 좋은 사람이야. 영창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소리를 지르더라고. C일병이나 나나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어. 더 황당했던건 2내무실 안에 있어야 할 진상사가 어찌된 일인지 복도 바닥에 엎드려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거야. 수송관은 저건 뭐냐고 빨리 영창안에 집어 넣으라고 길길이 소리를 질렀어.
그때가 마침 근무 교대 타이밍이라 후번초 근무자가 내려오고 있었어. 수송관은 거의 우리 멱살을 잡다시피 해서 우리를 당직대로 끌고 올라갔어. 영창에 불은 왜 꺼졌는지 누가 진상사를 밖으로 꺼내 줬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C일병이나 나나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선 채로 따귀를 후려치면서 정식으로 상부에 보고하고 징계위원회에 회부할거니까 당장 경위서를 쓰라고 말했어. 우리는 당직대에 꿇어 앉아서 경위서를 써서 수송관에게 내밀었어. 나는 자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C일병이 뭔가 알고 있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송관이 경위서를 읽어 보더니 진상사가 어떻게 2내무실 밖으로 나왔는데 계속 물어 보더라고. 둘다 제대로 대답을 못하니까 불침번에게 우리 직전에 근무했던 초번초 근무자를 깨워서 당직대로 오라고 시켰어.
갑자기 머릿속이 아뜩 하더라고. 초번초 근무 교대할때 봤는데 초번 근무자가 티라노였거든. 당직대 문을 열고 티라노가 들어오는데 진짜 도끼로 당장 사람을 찍어버릴거 같은 표정이었어. 수송관이 초번 근무할 때 2내무실 열었던적 있냐고 물었는데 티라노는 열었던 적 없다고 했어. 그 당시에 영창에 CCTV도 고장나있던 상황이라 확인을 할 수가 없었어. 아무리 말을 맞춰봐도 앞뒤가 안맞으니까 일단 들어가라고 하고 단단히 각오하라고 말했어.
잠도 거의 못잔 상태에서 기상 나팔소리를 들었어. 진짜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자살 안하고 버텼는지 신기할 정도야. 의식은 흐릿하고 입안은 석면 뭉치를 씹은 것처럼 깔깔하고, 소문은 이미 다 퍼져서 전 부대원이 경멸과 원망의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어. 근무에서도 제외되고 징계 위원회의 결정을 기다렸어. 수송관이 영창에 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헌병 간부들이 영창보내면 사단까지 보고가 올라가야해서 일이 복잡해 진다고 영내에서 군기교육하는 선으로 마무리 하자고 설득을 한 모양이더라고. 사실 군대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면 안되는건데 그때는 진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결국 티라노를 포함한 초번초 근무자 2명과 2번초 근무자인 나와 C일병은 1주일 동안 완전군장 처분을 받았어. 계절은 벌써 여름에 가까웠던 시기라 하루 종일 군장을 돌고 나면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어.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어.
티라노는 군장을 돌고 나면 혼자 샤워를 했거든. 내무실에서 웃통을 벗고 다녔는데 오른쪽 팔에 파랗게 멍자국 같은게 보였어. 근데 내 눈길을 끌었던건 그게 하루하루 갈수록 눈에 띄게 커졌던거야. 색깔도 처음엔 멍처럼 푸르스름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선명한 보랏빛처럼 변했어. 일주일의 군장 뺑뺑이가 끝났을 무렵에는 티라노의 오른팔 상박 부근이 거의 보라색으로 뒤덮일 정도로 사이즈가 커져 있었어. 그쯤 되니까 티라노도 통증을 느끼나 보더라고. 멍자국이 커져갈수록 티라노는 고통을 호소하고 점점 기력을 잃어갔어. 전역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완전히 환자처럼 핼쓱해져서 의무대에 입실을 한다고 했어.
티라노가 없는 부대는 신기할 정도로 평온했어. 박근혜 게이트 같은 것도 그렇고 한사람의 영향력이 참 크다는 생각이 들어. 티라노의 위세를 믿고 호가호위하던 날파리들까지 잠잠해 지더라고. 예전에는 한달에 20일을 푸닥거리를 했다면 티라노가 없어진 후에는 그게 한자리 수로 줄더니 급기야 점호가 끝나면 취침 소등을 하는게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어. 나는 한동안 영창 근무에서 배제되어 위병소 근무만 주구장창 나가다가, 우리 부대가 운영하는 2개의 초소 가운데 한 곳에 파견을 나가게 되었어. 헌병 본부에서 한시간 가량 떨어진 산 중턱에 있는 교통 통제 초소였어. 나는 이 지옥같은 부대 밖으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진짜 구원을 받은 것처럼 기뻤어. 내가 파견을 가 있는 동안 티라노는 제대를 할테니까 이제 영영 그 얼굴을 안봐도 되는거지.
어느덧 초소 교대를 하고 새롭게 초소의 근무를 익히고 밥짓는 연습도 하고 바쁘게 초소 생활에 적응해갔어. 그렇게 정신없이 생활하느라 진상사나 티라노나 어떻게 되었는지 완전히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어. 어느날 근무 시간에 전화가 왔는데 수사과에 있는 형무 담당 H일병이더라고. 항상 나를 물심양면으로 챙겨줬던 사람이라 목소리를 들으니까 엄청 반가웠어. 잘 지내는 지 안부 전화를 한 모양이었어. 간단히 초소의 근황을 전하고 부대에는 별일 없냐고 했더니 나 파견 나간 후로 부대가 완전 발칵 뒤집혔대.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티라노가 헌병 대장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라는거야. 의무대에서 팔을 검진했는데 팔이 왜 그렇게 됐는지 원인을 밝힐 수가 없더래. 그래서 사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거기서도 정확한 원인을 알 수가 없는 상태라는거야. 그 보라색 멍자국은 점점 커져서 거의 어깨 부근까지 퍼졌는데, 팔을 거의 사용할 수가 없어서 사실상 장애인이나 다름없게 됐다고 하더라고. H일병은 처음엔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다가 그래도 군생활 같이 한 사람인데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어.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소름이 쫙 돋으면서, 진상사가 티라노의 팔을 꽉 깨물던 장면이 머릿속에 팍 떠올랐어. 티라노의 팔이 그렇게 된게 진짜 군장 뺑뺑이를 돌아서 그렇게 된걸까. 다 같이 군장을 돌았는데 왜 티라노의 팔만 그렇게 된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어. 나는 H일병에게 진상사는 어떻게 지내는지 아직 영창에 있는지 물어봤어.
안그래도 그 이야기 할려고 했던 참이라고 H일병이 이야기를 시작했어. 지금 진상사 때문에 수사과는 물론이고 사단 전체가 발칵 뒤집혔대. 진상사는 따로 변호사 선임도 하지 않고 국선 변호인을 상대로도 사건에 관해서 진술을 거의 안했나봐. 아무튼 조사 내내 침묵을 지켰대. 재판이 잡혀서 사단 법무부에서 재판을 시작하는데, 이때 심판관이 피고인 본명하고 주민 번호하고 주소 같은걸 물어보거든. 수사 과정에서 신원을 확인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냥 형식적 절차야. 근데 진상사가 자기는 사건 당사자가 아니라고 부인을 했다는거야. 그래서 재판은 즉시 중단되고 수사과로 다시 끌려가서 조사를 다시 했대. 근데 진상사라고 들어와있던 이 사람이 알고보니 진상사 본인이 아니고 진상사의 친형이었다는거야.
처음에 사건이 일어났을때, 진상사 와이프는 가위에 찔려서 병원으로 바로 후송되고 옆집 사람이 비명소리를 듣고 신고를 했거든. 이때 진짜 진상사는 도주를 해버렸고 집에 남아 있던 친형이 경찰에 잡힌거야. 수사과에서 와서도 사건에 대해서 진술을 거부하고 사진을 대조해 보니까 진상사 본인하고 친형하고 엄청 닮았고, 그러니까 진상사가 아니라고는 전혀 상상을 못했대. 그 후로 진상사 와이프가 병원에서 퇴원해서 조사를 진행하면서 모든게 밝혀졌어. 원래 진상사 친형이 정신질환도 있고 사이비종교 같은데 심취해서 어머니가 보호자로 같이 살았는데 몇년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그래서 진상사가 친형을 자기 집에서 같이 살면 안되냐고 와이프에게 요구를 했는데 의견이 안맞아서 형이 기도원 같은데 들어갔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어느날 온 몸에 상처 투성이로 진상사 집에 찾아왔다는거야. 진상사는 깜짝 놀라서 와이프에게 재차 형하고 같이 살면 안되겠냐고 부탁을 했대. 그렇게 서로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언성을 높이다가 진상사가 와이프를 가위로 찌르게 됐다는거야.
나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진심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았어. 아무리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군대지만 이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능한 일이냐고. 이야기를 다 듣고 완전 뻥쪄서 상황실 의자에 앉아 있었어. 정신을 좀 가다듬고 물도 한잔 마셨어. 그리고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타임 라인 순으로 정리를 해 보았어. C일병은 군장을 돌면서 혹시 내가 불을 껐냐고 물어봤거든. 나는 당연히 C일병님이 끈 줄 알았다고 대답했어. C일병은 내가 잠든 후에 자기도 깜빡 잠들었고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자기도 모른다고 했어.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면, 진상사(친형)가 어떤 방식으로든 2내무실 문을 열고 나와서 다용도실 입구의 버튼을 끄고 복도에 엎드려 비명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돼. 초번 근무였던 티라노가 2내무실 자물쇠를 똑바로 잠그지 않았다면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가는거지. 하지만 나는 그게 진실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들어.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너무 많으니까. 초번 근무시간이면 수용자들은 이미 취침중이라 영창 문을 열 일 자체가 없거든. 혹시 티라노가 실수로 자물쇠를 제대로 잠그지 않았다 해도 뜬금없이 진상사가 영창을 기어나와서 불을 끌 이유도 없고.
그날 밤 도대체 어둠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2내무실 문은 누가 열었으며 영창의 불은 누가 끈걸까. 정말 군장 뺑뺑이 때문에 티라노는 팔을 못쓰게 된 것일까. 악의에 찬 진상사의 저주 같은건 아니었을까. 요즘도 나는 가끔 그날 밤의 진실이 궁금할 때가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잘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뉘엿뉘엿 해가 지면서 초소 밖은 어둠에 거의 먹혀 버렸어. 독두꺼비가 뿜어낸 증기처럼 끈적끈적한 안개를 뚫고 구슬픈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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