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관계 있으세요?
대화할 때마다 상대방의 말에서 반박할 여지가 수천 가지는 되는데
거듭된 경험을 통해 상대방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고,
그렇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쌓여만 가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속에서 썩혀가야만 하는 그런 관계요.
제겐 그런 관계가 모친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집은 좀 이상했던 것 같아요.
저는 외동딸에다가 늦둥이, 심지어 제 이전에 있던 첫째는 신생아 때 일찍이 죽었고요.
때문에 아버지는 저를 금쪽같이 아꼈지만 평소 관계조차 좋지 않아 모친을 두들겨패기 십상이었고,
그런 모친은 가정 내에서 언제나 기가 죽어있었지만 유일하게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는 딸만은 스트레스 풀기에 적합한 대상이었죠.
그 시절엔 이상한 게 아니라 이게 보통인가요?
저는 황금기로 시작해 추락으로 끝난 90년대의 딸입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있을 거란 믿음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그런 시대상도 반영한다면, 그렇게 나쁜 가정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배우고 익힌 욕의 절반은 모친에게 들은 것이겠죠. 화가 쌓이고 쌓이면 끝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게 되는 그런 성질도 모친에게 받은 것이겠죠. 저는 유년기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맞았던 기억은 있어요. 아주 사소한 이유로 걸핏하면 맞았고 욕을 들었어요. 어느 날은 아침에 준 우유잔을 쏟았다는 이유로 두들겨맞고 유치원을 못 갔던 기억도 있어요. 그것만은 성인이 된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내 아이가 지금 이 상황을 나이가 들면 잊어버릴 거라곤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각인된 장면은 결국 생생히 기억하게 되니까요.
구두주걱, 효자손, 참 다양한 걸로 맞았는데 가장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건 우산입니다. 우산에 맞아서 손가락이 부러졌었거든요. 뼈가 부러져 손바닥과 손가락의 이음새 부분이 퉁퉁 부어오르고 날마다 욱씬거려도 아무도 절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어요. 허구한 날 맞기 일쑤였고 그것들이 모두 탈 없이 나았듯 손가락도 놔두면 나을 거라고 모두가 생각했으니까요. 아버지조차도요.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차도가 없자 모친이 절 데리고 병원에 갔고,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의사가 이렇게 된 경위를 물을 땐 위에서 잘못 떨어진 물건에 맞았다며 둘러대고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지 묻더군요.
모친에게 얼굴을 맞고 그대로 학교에 갔던 날도 기억해요. 과학 선생님께서 조폭 마누라냐, 어디서 싸움질하고 다니냐, 농담조로 물으셨는데 아이들도 웃고 저도 같이 웃었어요.
쓰고 있으니까 죽고 싶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또 다른 날은 맞다 못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문을 걸어잠그니까 모친이 때려부술 기세로 두들기다 못해 망치를 가져와 문고리를 부수고 들어왔어요. 그때의 기억이 선명한 이유는 방 안에서 느꼈던 그 공황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아직도 여전히 아직까지도 여전히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곤 해요. 부서져가는 문고리를 바라보며 느껴야했던 그 무력감, 공포. 더는 도망칠 곳도 없는 절벽 끝에 몰린 기분. 결국 문은 부서지고 망치를 휘두르더라고요. 미쳤구나.
미친 거구나.
벌건 얼굴로 광분해 욕을 내쏘며 우산이며 구두주걱이며 심지어는 망치까지 휘두르던 모습은 그거였어요. 그래, 미친 여자.
아버지가 저를 금쪽같이 아끼셨다 했지만 이상하게 그런 상황에 있어서는 언제나 관조적이셨죠. 모친이 뭐라고 소리치건, 내가 울부짖건,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TV만 바라보던 모습은 너무 웃겼어요. 이상한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각설하고,
결국 부모님은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 이후에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저는 나아지는 게 없었어요. 항상 우울증에 시달려 학생 신분으로 해선 안 될 짓이었지만 술도 자주 마셨고 술에 취하기만 하면 누가 있건, 없건 오열하며 눈물을 쏟아내곤 했고 그러다 손목도 몇 번이고 긋고 락스도 마셔봤습니다. 그런데도 살아있네요. 지겹기도 해라. 아버지는 그러한 모든 일탈에 지치셨는지 난생 처음으로 제 뺨을 올려붙이며 물으시더라고요. 너 왜 이러냐? 내가 뭘 못해줬다고 그러냐?
그때 왜 안 말렸어?
당신께선 말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럼 제가 손가락이 부러질 일도 망치로 방문이 부서질 일도 없었을 텐데 뭐가 문제일까.
그만뒀어요. 원래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하기 마련이잖아요.
자살시도로 응급실에 간 환자는 상담을 받게 돼있더라고요. 저는 시에서 나온 상담사도 만나봤고, 센터에 가서 상담사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못했어요. 제가 좀 무기력하거든요. 간신히 학교를 다니는 패턴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녹초가 될 정도로 빈약한 에너지밖에 없는 시절이었어요. 무엇보다 남한테 제 얘길 하는 것도 싫었어요. 전적으로 이해하고 너그럽게 포용하겠다는 눈빛도 싫었어요. 그런 눈으로 누가 절 보면 울 것 같아서요. 이런 얘길 하면 꼭 울게 되는데 상담을 하면 꼭 이런 걸 물어봐서요. 전 우는 게 싫어요. 누구한테 말하는 것도 잘 못해요. 어릴 적에 울지 마라, 뭘 잘했다고 소리내서 우냐면서 몇 번이고 혼났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입을 다물면 말하라고 다그치던 사람들밖에 없어서 그랬을지도.
그렇게 자살도 포기하고, 상담도 포기하고, 자라서 마침내 성인이 됐습니다.
저 잘 지내요. 예쁘고 똑똑하거든요.
저는 제가 언제나 처해있는 이러한 감정상태가 기원한 인과관계를 모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익혔고, 길에서 번호도 더러 따이고 친구도 스스럼없이 잘 사귀고 술을 마셔도 울지 않아요. 지망 기업도 대형 로펌이나 대기업까지 생각할 만큼 아주 좋아요.
저는 사람이 싫어요. 다 싫어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싫어요. 구역질나게 싫어요. 그 사람들이 특별히 제게 무슨 짓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진저리가 나요. 여자만, 남자만, 동성애자만, 특정 누구만 싫은 게 아니라 그냥 전부 다 싫어요.
그래도 이렇게 잘 살아요.
아버지랑도 잘 웃고 살아요.
이렇게 싫은데도.
대신 깊이 감정적으로 교류하는 사람은 없어요. 있더라도 미리 잘라내요. 그러려고 안간힘을 써요. 의지할 누구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감정이 깊어지면 깊은 속내까지 드러내게 되잖아요. 제 속내가 너무 무겁고 우울하고 지쳤고 허무하고 피곤한데 이런 부정적인 에너지를 누구도 감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혹은 그걸 보고 놀라서 떠나버릴 수도 있겠죠. 어쩌면 저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고요.
아냐, 그래도 나 잘 살아요.
오늘 모친이 찾아왔어요. 연락은 지속적으로 오지만 다 무시해요. 대답하기 싫거든요. 이혼하고 떨어져지내게 된지 5년이나 지났지만 저는 아직도 마주하기만 해도 목소리만 들어도 눈만 마주쳐도 화가 나거든요. 무섭진 않아요. 그냥 스트레스로 손끝 발끝까지 저려오고 뒷목이 당기고 당장이라도 소리치지 않고선 버틸 수 없는 상태가 될 뿐이에요. 걔가 그러더라고요.
첫째, 이혼할 때 조건으로 달에 한 번씩은 너를 보기로 했다.
법정에서 그렇게 정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헌법 아래 제 자유권을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그래서 법정에서 약속한 저 조항이 구속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게 안 되면 다시 법정 서죠. 가서 증언이라도 해야죠.
둘째, 네가 나에 대해 뭘 오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나도 힘들었다.
구구절절 말씀하시는데 정말 숨이 막히고 웃겨 뒤집어지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가 그때 뭐 때문에 힘들었니 어쩌니 듣고 싶지 않거든요. 결국 자기가 한 짓은 하나도 기억을 안 하거나 그게 잘못이라고조차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그게 어떻게 잘못이 아니지? 어떻게? 난 지금 이렇게 사는데 자기가 그때 힘들었으면 다 되는 건가? 부모가 됐으면 자녀가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기본적인 건 해야되는 거 아니었나? 근데 정말 미안하지도 않나?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하지?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나 다 아는데.
그래요, 많이 힘들었겠죠! 남편이라는 사람은 허구한 날 때리고 돈은 항상 부족한데다 나이가 들면 몸도 아프잖아요. 저같아도 좀 미쳤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잘못이 상쇄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로인해 남들은 모르고 살아도 될 불안에 우울까지 평생 지고 살아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 앞에서 사과가 아닌 변명이 앞서면 어떡하나요.
셋째, 이제부턴 잘 지내자.
난 당신만 보면 뒷목이 당기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이 속이 메스껍다니까.
제가 이걸 안 말해본 게 아니에요. 다 말했어요. 내가 당신한테 바라는 건 어머니와 딸로서의 감정적 교류가 아니라고. 이제와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면 돈으로나 하라고. 그것도 싫으면 그냥 내 인생에서 제발 꺼져달라고. 난 당신 볼 법적 의무가 없다고. 몇 번이고 말했어요. 스무 번은 넘게 말했을 걸요? 찾아올 때마다! 어쩜 그리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지. 진짜 웃기는 사람이네. 사람이 이렇게 멍청해도 되나. 간절하면 이렇게 멍청해지나.
단도직입으로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하겠어요.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도 잘 지내고 얼굴만 마주치지 않으면 무척이나 평온할 만큼 무료하고 권태롭게 잘 지내요.
근데 자꾸 찾아와요. 심지어 사과하려고 오는 게 아니에요. 오해라고, 이제부턴 잘 지내자고.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너는 이혼해봤자 내 딸이라고.
법적으로 아닌데 뭐가 문제일까.
찾아올 때마다 소리치고 역정까지 내다가 포기한 이후론 말도 안 해요. 쳐다보지도 않아요. 문을 잠그면 예전처럼 문을 두드리죠. 미친듯이. 열 때까지. 도저히 과거의 기억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게.
그냥 소리 좀 지르고 싶어요. 소리 지르면서 길거리도 맨발로 뛰어다니고 울고 싶은 대로 울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저 지금 너무 답답하거든요. 매번 찾아올 때마다 반박할 게 자꾸 떠오르는데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거. 꼭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아요.
죽고 싶다 그냥.
그 사람이 돌아가고 나면 전 매일 울어요. 아까도 울었고 이 글을 쓰면서도 울었어요. 결국 내가 나쁜 사람인가? 머리로는 이미 내가 아무 잘못 없는 줄 아는데 사람이 앞에서 울며불며 쇼를 하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잖아요. 내가 나쁜년인가.
아니다. 난 안 나쁘다. 난 앞으로 정말 잘 살 거고 당신들 따위는 거들떠도 안 볼 거고 그러고 살아야겠다. 돈이 필요하면 먹고 떨어지든가 하고 다시는 안 보면 좋겠다. 그래. 가끔은 소스라치게 외롭겠지. 하나 고마운 건 날 정말 예쁘고 똑똑하게 낳아준 것쯤. 덕분에 잘 산다. 내실은 이렇게 엉망인데 치장만 화려하게 하고 다니면 뭐하냐고 했지. 내실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거라도 해야하는 거예요, 엄마. 매일 사람들 앞에서 있어보이는 척, 예쁜 양, 똑똑하게 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난 그것들 하려고 안간힘 쓰면서 살고 그래서 날 아는 사람도 없어. 하긴, 네깟 게 뭘 알겠니. 원래 사람은 자기 손으로 망쳐놓은 게 뭔지 잘 몰라.
그냥 답답해서 써봤어요. 각오 다질려고 썼는지도 몰라요. 혹시 다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죄송해요. 이 글이 오직 부정적인 영향밖에 안 될 거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더 죄송해요. 저 잘 살겠죠. 그 사람들 앞에서 보란듯이 잘 못 살면 미쳐버릴지도 몰라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못 살면 안 되죠. 분노랑 설움이란 원동력으로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다들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행복하세요. 이 커뮤니티에 가끔 와서 감정적인 위로도 받곤 하는데 항상 빚진 기분으로 고마워요.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