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역에서 옆자리에 누가 앉는 듯하여, 한참을 감고만 있는 눈을 뜬다.
창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터라 차창 안을 보고 있는 한 잘 생긴 청년이 바로 앞에 보여 흠칫거린다.
손을 흔들거나 말을 하진 않지만 내 옆에 앉은 누군가를 배웅하는 듯 하다.
고개를 바로 하여 곁눈질을 하니 갓 대학생인 듯한 웬 여자다.
월요일 오전, 약속이 갑자기 취소되는 바람에 서울역에서 일찍 타게 된 무궁화호는 늘 그랬듯 한산하고 어르신들, 기껏해야 3, 40대가 대부분이다.
20대는 간혹 보여도 한시간 남짓 타는 경우는 드물다.
이처럼 혼자 탄 여학생이 옆에 앉는 것은 매우 드물지만 그냥 그려려니 하면서 다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다.
어제 일찍 잔 터라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 그녀의 인기척이 들린다.
카톡을 하듯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친구인듯한 상대에게 전화를 한다.
대화 중 '죽을래?'를 세 번이나 말한다.
다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조용하다.
한참을 조용하길래 고개를 돌려 곁눈질을 하니 고개를 통로쪽으로 살짝 떨군채 잠들어 있다.
긴 스트레이트 머리가 기울어진 뺨을 덮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상의는 검은색에 가까운 무채색 짧은 티셔츠, 무릎 위엔 검푸른 빛의 둥글납작한 큰 가죽 백, 백을 거의 다 덮은 벗어놓은 검고 얇은 가디건, 가디건 위에 엎어져 있는 (뒷면을 보아하니) 갤럭시S2, 스마트폰 위에 반쯤 풀린 팔짱을 낀 손이 보인다.
그래서 스커트인 듯한 하의는 잘 보이지 않는다.
웨지힐 앞으로 오렌지색 매니큐어를 모두 바른 발톱이 보인다.
손과 발은 작은 편이지만 아기 피부같은 팔에 비해 피부는 살짝 거칠다.
겉으로 보아 미모를 위해 과감한 노출도 마다않는다는 소위 패셔니스트인 듯한데, 이런 부류는 보통 혼자 어디 가면서 자지 않고, 잠들더라고 이내 깬다.
흔치 않은 경우라고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다.
평택에서 사람들이 타자 통로쪽이 부산한 듯 고개를 반대쪽인 내쪽으로 기울인다.
천안에서 눈을 뜨니 다시 통로쪽으로 고개가 기울어 있는게 보인다.
이렇게 오래 자는 걸 보니 소위 잠에 취한 듯하다.
잠에 취하면 가끔 꿈 속에서도 잠을 깨려고 아둥바둥대고 그래도 못 일어난단다.
그녀는 어젯밤 대체 뭘 했기에 이렇게 잠에 취했을까?
다시 눈을 한참 감고 있으니 이제 잠이 올 듯 한데, 그때 헉!
왼쪽 어깨 아래 팔에 천천히 뭔가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살짝 보니 내 팔에 닿은 그녀의 머리에서 샴푸 향기가 난다.
그녀가 잠을 깨지 않은 건 모르는 게 아니라 잠에 취해 못 일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짧게 고민했지만, 몇 분 후 그녀는 고개를 반대로 기울인다.
하지만 그때부터 고민은 시작된다.
또 기댄다면?
기댄채 잠이 깨어 무안해하거나 쪽팔려 하는 걸 최악의 경우로 설정하고 이를 막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어깨를 빼서 멀리하면 그녀가 기대와도 괜찮을 듯 하지만 잠이 깨서 상체를 멀리하고 있는 나를 본다면 웃긴 일이다.
그렇다고 기대올 걸 대비해 어깨를 들이밀고 있는 것도 이상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일단 자세를 꽂꽂히 세워야겠다고 생각한다.
먼저, 혹시라도 내 어깨에 기대지 못하고 내 앞으로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울인 등받이를 세워 그녀의 등받이와 각도를 맞춘다.
처음 앉을 때부터 특별히 흔들림이 심한 좌석이라고 느껴서, 조심조심하지만 끼익 소리가 난다.
다행히 그녀는 깨진 않는다.
다음으로, 오랫동안 같은 자세여서 아래쪽으로 약간 미끄러진 지금 상태로 있다가는 그녀가 기대다가 내 어깨 뼈에 닿을 수 있기에 고쳐 앉아 상체를 더 세우기로 한다.
평소 같으면 살짝 일어나 다시 제대로 앉으면 되지만 지금 그랬다간 소리며 흔들림에 잠이 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왼팔은 그냥 둔 채 오른팔로 팔걸이를 아래쪽으로 눌러 상체를 세우려한다.
헉! 평소에 운동을 안하다가 갑자기 힘을 줘서 그런지 쥐가 난다.
오른쪽 어깨에서 목까지 다 아프지만 이를 악물고 참는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녀가 기대다가 깨더라도 무안하지 않도록 고개를 차창쪽으로 돌리고 자는체 해야지.
힐끗 본 그녀는 내게 기대지 않으려고 그랬는지, 자세를 살짝 돌려 내게 비스듬히 등돌린 자세로 자고 있다.
팔짱은 더 풀어지고 손 아래 있던 스마트폰은 옆으로 약간 밀려나 있다.
다 좋은데, 비스듬히 앉은 채로 더 흐트러지면 지금도 붙지 않은 다리가 더 벌어져 통로를 지나는 사람들이 쳐다보겠다.
걱정이 지나친 듯, 몇 분 후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한다.
나는 그녀가 깨길 기다리며 자야하고 자는체 해야한다.
한참을 더 가서 그녀가 깼는지 어쨋는지 궁금하던 차에 갑자기 헉!
누가 팔을 툭 친다.
하지만 위치로 보나 느낌으로 보나 그녀의 머리다.
살짝이라고 표현하기엔 센 충격이다.
어깨 뼈였다면 아플 정도다.
무척 놀랐지만 순간적으로 그녀가 깰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은 눈을 더 질끈 감는다.
머릿속이 하얗다.
기댄 정도가 살짝 약해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이젠 아예 내 팔에 맡긴다.
갑자기 어깨를 빼면 쓰러질 정도다.
온 몸이 굳어온다.
과연 깼을까?
쪽팔려서 계속 자는체 하는 건 아니겠지?
한참을 또 그렇게 있는 걸 보니 잠에 제대로 취한 듯.
대전이 가까이 오자 그제서야 고개를 슬며서 반대로 젖힌다.
휴~
하지만 내 머릿속이 더 하얘 지는 건 보통 이런 여자가 이렇게 오래 혼자 이걸 타고 가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이번 대전역에 내릴 것 같은데...
플랫폼에 들어서기 위해 속도를 늦춘다.
깨워야 하나?
깨웠더니 더 가야하면 어쩌나?
그보다 내릴 곳이 벌써 지났으면 어쩌나?
애가 탄다.
대전을 출발한다.
다음 옥천역을 섰다가 가도 계속 취해 있다.
오늘따라 특별히 자주 왔다갔다하던 (매번 다른 아저씨지만) 단말기를 든 역무원이 그녀 옆에 서서, '아가씨~ 표 좀 봅시다.'하고 깨우니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지만, 한편으로 그 아저씨가 야속한 건 왜일까?
이럴 때가 아니다.
그녀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 상황파악할 시간을 벌기 위해, 또 파악 후 무안해할지도 모를 그녀를 위해, 또 나도 자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 아저씨가 나한테 말한 게 아닌 걸 알면서도 나는 아저씨를 쳐다보며 '저...저요?'하고 잠에서 깬 듯 말한다.
아저씨는 내게 손을 젖고는 이내 그녀에게 '어디까지 가요?'
그녀는 슬슬 상황파악이 됐는지 천천히 입을 열어 '대전이요.'
헉! 깨울 걸.
깨워주기로 하고는 깜박한 엄마가 약속에 늦은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이랄까.
이번 영동역에 내려 대전으로 가는 기차를 타라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아저씨는 이동한다.
난 더 이상 자는체도 못하고 꽂꽂이 앉아 앞만 바라보지만, 짧게 후~ 내쉬는 그녀의 한숨에 그녀의 난처한 심정이 그대로 전해와 죄책감마저 든다.
카톡을 하는지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며 한번 더 후~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다.
역이 가까워오자 의자 앞쪽에 앉아 가디건을 허리에 묶는다.
그때 슬쩍 보이는 것은 얼핏 손연재를 닮은 얼굴에 162에 47쯤 되어 보이는 팔다리가 가늘고 긴 모델형 몸매, 검은 스커트가 매우 짧다.
잠시 더 앉았다가 이내 뒤쪽으로 걸어가는 건 보지 못하고 그걸로 끝이다.
대전까지 잘 갔을까?
내릴 때가 다 되어서야 잠깐 본 얼굴이지만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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