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빠를 진짜 사랑한다. 대단하신 분이다. 열심히 일하시고 진보 성향으로 정치적으로도 관심 많으시고 우리에게도 항상 신경써주신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여자를 싫어하는 것 같다.
일단 엄마와 엄마가 하는 일을 무시하신다. 엄마는 가정주부다. 솔직히 현모양처다. 시대에 한물가긴 했지만. 아빠는 엄마가 일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신다. 사회생활은 그럴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사람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 십 년 넘게 시집살이하시고 가족들 수발 들고 아빠 자잘한 심부름부터 다 하시는데. 아니 가정주부 일이 한달 삼백의 가치를 한다는데. 아빠에게 그건 별 거 아니다.
지난번엔 그러셨다. 회사에서 인사업무를 볼 때 여자를 뽑지 않는다고. 여자는 일을 미루고 힘든 건 안하고 애사심도 없이 오래있지 않고 나가버린다고. 그럼 나는 왜 계속 공부를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임금은 똑같고 승진은 시켜주시나요? 간혹 가다 몇배로 일 잘하는 여자가 아주 가끔 있다고, 그런 사람은 승진도 한다고 하셨다.
또 그러셨다. 요새 여자애들은 다 남자 뒤에 숨어서 절대 잘못한 것에 사과하지 않는다고. 얘길 들어보니 그 상황에서는 아빠와 부딪힌 여자애가 나빴다. 그래도 나와 내 친구들 다 젊은 여자애들인데, 사과 잘 한다.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나도 결국 젊은 여자애여서 그냥 쭈뼛쭈뼛 넘어갔을까?
시집간 언니 얘기 듣는데 분통터진다. 왜 언니는 생일, 기념일 시댁 어르신 사촌까지 챙기고 선물하고 인사하는데 남편은 전화도 찔러야 한다고 할까. 왜 언니는 그 모든 부조리함을 가만히 참고 넘기고 남편은 아무것도 모를까. 남편이 직장 그만둔 건 남편 문제인데 왜 언니한테 욕을 할까. 나한테는 완전 정신나간 상황인데 왜 그럴 수도 있다, 원래 한국에서 시집살이가 이정도면 그래도 나은거야 소리를 하는 걸까.
아는 언니가 메갈을 옹호한다. 직접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다. 난 메갈 싫다. 말도 안되는 욕을 하는 게 전혀 페미니즘 같지도 않고 양극화만 확산시킨다고 본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신드롬이 이는지는 이해가 간다. 많은 사이트들에서 삼일한이라던지 말도 안되는 용어들을 쓰니까 나도 화난다. 사실 나도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만, 뭘 해야 먹히나? 우리나라에서 뭔가 바뀌지 않는 단 건 알겠다. 온화하게 얘기해도 솔직히 여성부로 통틀어진 페미니스트의 이미지에 씨알도 안 먹히는 거. 언니가 자꾸 이상한 용어를 섞어 써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 말은 맞다. 성우였나 그 여자, 티셔츠를 입었다고 직장에서 잘려서 밥줄 끊기는 건 아니다. 아무리 이상한 말을 한대도 생존권은 보장되어야 했다. ... 안 그래도 살기 힘든 요새라 각종 혐오 감정과 범죄가 많아지니 여성에 대한 혐오도 커지고, 남성에 대한 혐오도 커지고, 그래서 이렇게 안타까운 상황까지 온 걸까?
나는 지금 공부를 오래 하고 있다. 나중에 내가 하고 싶은 일 평생 열심히 하고 싶다. 나는 내가 일한 만큼 인정받고 승진도 하고 싶다. 그런데 아이도 너무 낳고 싶다. 만약 가정부를 쓸 상황이 못 되어 누군가 가정주부가 되어야 한다면 난 내가 가장이 되고 싶다. 그런데 그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고 승진도 힘들텐데 비효율적이라고 했다. 또 나중에 부모님들이 아프시면 난 내 형제보다 내가 우리 부모님 모시고 살고 싶다.
남자로 살면 기분이 어떨까? 당당하진 못해도 용인되는 선에서, 우리 부모님 모셔야 겠다고 할 수 있나? 밤에 큰길 골라서 다니지 않아도 되고 운전할때 뭐만하면 김여사소리 들을 생각 안 해도 되고, 밥먹을때 살찌네 소리 좀 덜 들을까? 길가는데 자꾸 이상한 사람들 쫓아오는 일이 덜할까? 공중화장실 이용하는 게 좀 덜 무서워질까? 쏟아지는 성적인 모욕들 ..
당연히 남성차별도 있겠지? 그렇지만 역차별 역차별 하듯 진짜 이렇게 남자들도 힘들까? 대체 이 뿌리깊은 역사를 뒤집으려면 나라는 작은 존재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이 고민들이 다 너무 내 입장, 여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걸까? 내가 조신한 여자였으면 오히려 이런 상황이 기꺼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