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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글 예수는 사실 뭐라고 했는가?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hil&no=16408&s_no=16408&page=1
첫번째 글을 읽고 오셔야 더 자세히 이해가 가능하므로 가급적 읽고 오시는 편을 추천드립니다.
더 짧고 핵심적이기도 하구요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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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째서 그렇게 말했는가?
종교 행위를 그만 두고 선한 행위를 하자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가 신이라고 말하던 예수의 사상을 분석하다 보면 우리에게 종교 행위를 그만 두고 선한 행위를 하자고 말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글은 이를 주제로 예수의 사상을 분석해 볼 것입니다.
이를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사회를 주름잡고 있던 2천년 전의 유대교에 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인류의 원시적 종교에 대해서도 짚고 가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있었던 국사 시간이나 역사책을 통해서 인류의 원시종교에 대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토테미즘과 애니미즘 신앙입니다. 도무지 통제 할 수 없는 자연의 힘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이를 통제하는 수단으로써 종교를 만들어내 제물과 의식을 행하는 종교입니다. 화산 폭발, 홍수, 지진, 번개 등 저항 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나 맹수의 습격 같은 상황을 심리적으로 나마 위안 받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로 분석하죠.
이 토테미즘과 애니미즘 신앙이 시간이 지나 뼈대가 붙으며 만들어지는 것이 고대의 종교들입니다. 의인화된 자연물들을 신으로 만들어내어 그들이 인간보다 더욱 위대하며 세계의 지도자 같은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수메르 종교를 원점으로 이집트의 종교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하시면 편할 것 같습니다. 고대의 종교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데 장대한 신화를 바탕으로 죽음이나 사랑 같은 개념도 차차 신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인간의 감정과 추상적인 개념이 신이 되어 간다는 데서도 진보된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나중에 고대 근동종교를 분석할 때 아주 자세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이런 고대의 종교가 아주 조금 더 진일보 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일신교입니다. 딱히 진보라고 하기도 뭣하나 다신교에서 발전되었으니 이렇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신교는 다신교의 신들보다 더더욱 강대한 신을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봅니다. 혹은 정치 지도자가 권력을 집중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신일 수 도 있구요. 아무튼 여러 가지 자연을 대표하는 각각의 신이 아닌 모든 것을 통제하는 진짜 초월적인 신이 인류의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분석해 보아야할 유대교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만들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신인 야훼를 믿습니다. 그리고 기원후 등장한 이슬람 역시 이 야훼를 숭배하죠.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에 직면 했을 때 자신을 도와줄 초월자를 의식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원시 종교들은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재앙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추상적인 존재를 꿈꿨고 고대 종교들 역시 그러합니다. 허나 각각의 재앙에서 자신이 기댈 신들에게 상황에 맞춰 제각각 기도하고 헌신하는 것은 꽤나 복잡하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단 하나의 신만 믿어도 모든 종류의 재앙에서 건져 준다고 말하는 일신교는 꽤나 먹히기 쉬운 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자신을 도와줄 단 하나의 초월자만을 의식하면 되니까요.
야훼를 믿는 유대인들은 한때는 강성했지만 다른 민족들의 침략을 받게 되고 나라를 잃어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빈약하고 타락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자기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바른 신앙을 되찾고 신을 온전히 섬긴다면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을 구원해줄 이가 나타난다고 믿게 됩니다. 이것이 메시아 신앙입니다.
신에게 선택받은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왕인 메시아가 자신들을 이끌어 세상의 모든 왕들과 민족을 무릎 꿇리고 온 세상을 지배해 줄 것이라는 이 메시아 신앙 예언은 예수가 태어났을 당시 유대민족의 최고 관심사였습니다. 당장 예수가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수많은 혁명가와 지도자들이 이 예언을 통해서 유대민족을 이끌려고 시도를 해왔었습니다. 정치적으로써 최고의 명분이니까요.
이런 메시아가 나타나려면 그들의 신앙은 온전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법전이자 경전인 구약 성경의 모든 율법과 의식을 행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매우 엄격한 종교가 된 것이죠. 이들은 해야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 매우 철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조는 사실 유대교를 믿으면서도 당시의 수많은 수메르 신앙을 뒤 섞어서 믿는 모습이 여러 번 나타났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출생 당시에는 그런 것은 차마 용서 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 행위로 인해서 신이 분노하여 자기들이 몰락하게 되었다고 믿었으니까요.
이제 그들은 코셔 푸드라고 불리는 음식에 대한 금기에서부터 일에 대한 금기, 돈에 대한 금기, 부부생활에 대한 금기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종교 율법들을 모두 지키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10계명에 불과 했던 것이 지켜야할 의무적 율법 248개, 하지 말아야할 금지적 율법 365개로 합쳐서 613가지나 되는 금제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존 티한의 ‘신의 이름으로’ 라는 책에서는 이를 자기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 형태를 띈 법이라고 분석합니다. 제정일치의 사회인 것이죠. 허나 문제는 우리가 모든 법을 지키면서 살아 갈 수 없듯이 이들도 살다보면 율법들을 하나 둘 어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제물을 바치고 의식을 올려서 자신의 죄를 씻는 방식으로 사회를 유지하고 종교를 이어나갑니다. 몇몇 금제는 즉시 처벌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더더욱 법의 성격이 진하게 나타내 보입니다.
실존 철학의 선구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완벽한 인간이 존재 할 리가 없으므로 어떤 인간이든 한계를 겪고 절망을 겪게 된다는 윤리적 실존상태를 말했습니다. 원초적인 쾌락을 추구하다가 절망하게 되는 미적 실존 이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주장하죠. 유대교는 완벽하게 지키기 힘든 수많은 율법들 속에서 윤리적 실존이 나타나게 되는 데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제물과 의식을 바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큰 죄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제사로써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으니 윤리적 실존상태, 즉 ‘나는 악한 인간인가?’ 라는 절망 상태를 쉽게 극복 할 수 있게 되죠.
여기서 예수는 의문을 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와 도덕이 완전히 합치되지 못하는 상황에 말입니다. 랍비들이 대중에게 가르치는 완벽한 인간은 모든 율법사항들을 지켜서 죄를 짓지 않고 제사를 잘 지내는 인간입니다. 선한 인간이란 죄를 짓지 않는 인간이지만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은 제사를 제때제때 잘 지내는 인간이 선한 인간이라고 보며 신이 원하는 인간상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이 점을 예수는 주시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도덕과 종교가 완전히 합치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예수의 생애에서 이에 대한 의문과 답답함, 고민이 묻어나옵니다. 예수는 ‘제사로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인가’ 하고 의문을 품었기에 위에서 언급한 윤리적 실존 상태를 극심하게 겪었을 겁니다. 허나 키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윤리적 실존 상태를 극복하고서 신 앞에 단독자가 되어 낡아 있는 당시의 유대교 전반을 뜯어내는데 성공합니다. 종교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유대인들에게 제시하게 되는 것이죠. 종교적 실존 상태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물론 이삭을 번제에 바치려던 아브라함을 종교적 실존 상태로 보며 신앙심으로 사는 것을 이 종교적 실존 상태로 보았습니다. 허나 종교가 글러먹었을 때에 자신의 기준으로 정말 올바른 방향으로 종교를 바꿔내려는 이 예수의 각오야 말로 진정한 종교적 실존입니다. 기존 신앙과 결부된 수많은 기득권자와 종교 지도자들과 싸우더라도 진정한 종교인의 신앙을 주장하는 것이 참된 종교인의 길이니까요.
예수가 첫 번째로 행한 것은 숭배대상인 여호와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파악하기 힘들고 폭력적이며 초월적인 모습에서 끌어냅니다. 기존의 종교는 마치 왕을 섬기듯이 신전 앞에서 노심초사해야만 했으며 경건한 태도를 취해야했지만 그런 종교의 모습을 필요 없다고 잘라내 버립니다. 이는 그저 권력자들이 종교를 이용하기 편하도록 만들어낸 모습으로 간주하고 신을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우리의 숭배대상이 신전 안 장막 속에서 꼭꼭 숨어있으며 마치 현실의 왕과 권력자처럼 우리를 부리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도와야만 하는 이들이 우리의 신이라며 인식을 전환 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굉장한 사상입니다. 인류역사가 지속되어 오면서 종교는 지배층의 지배 수단으로써 사용되는 도구나 다름없었습니다. 기존 종교에도 물론 선을 권장하는 부분들은 조금씩은 있어왔지만 이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 내부에만 적용되며 권장하는 선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교에서는 이방인이나 병자, 장애인들을 더러운 것으로 여겨 근처에 다가가지도 않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습니다. 나아가 선을 행하려고 신을 배척한다거나 거스르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 당시의 룰이었습니다. 신에게는 절대복종해야 하며 그른 것을 요구한다 해도 신의 명령이기에 행하는 것이 선이며 행하지 않는 다면 악이 되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게 되는 일화에서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이 당시 종교는 선함과는 너무나도 크게 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개의 종교는 권력층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신을 자신들의 위에 설정해두고 자신들도 신에 명령에 복종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신으로 말하는 부류의 종교도 존재하지만 대부분 신의 아들 격이나 부하신의 위치에 설정합니다. 혹은 신들의 대리라고 말하기도 하죠. 그들이 피지배층에게 ‘우리들도 종교로 보자면 너희들과 같은 피지배층이다. 지배층인 신에게 거스르지 않기 위해 우리를 거스르지 말아라’라고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부당한 대접과 명령을 받게 되어도 당장 눈에 보이는 왕과 권력층을 칠 수 야는 있지만 신을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천벌과 사후세계의 심판이 두렵거든요.태어나자마자 공동체 내에서 강하게 교육받은 종교관 때문에 섣불리 신의 대리격인 그들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되며 복종하게 됩니다. 어떤 지도자가 들고 일어나도 대부분의 민중은 이미 종교에 세뇌되어 있어 세력이 되어 주지 못하죠. 즉 권력층이 종교를 사람들 부리는데 사용하는 심리적 정치도구로 사용하는 겁니다. 원시종교의 선민사상이 발전 된 것의 형태이기도 하며 신과 인간의 매개체인 제사장이 존재하는 샤머니즘 종교가 발전된 형태이기도 합니다. 유대교는 이 두 가지 종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예수는 이 점을 간파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들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기존 종교에 얽매이지 않아도 신은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다고 보게 된 겁니다. 그들을 통해서 정해진 제사와 의식을 치뤄야만 신과 관계될 수 있다는 것이냐? 는 비아냥이 신약에 걸쳐 여러 번 등장하는 사마리아 인들 이야기에서 분석 될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4장과 당시 몇 가지의 사회, 문화적 배경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굉장히 멸시 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타 민족에게 침략 당하며 반으로 갈라졌는데 이때 남쪽 유다는 단일민족을 유지했으나 북쪽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함락당하면서 혼혈족이 되어 여러 종교가 혼합되기도 하고 정통 유대교를 지키기 힘들어졌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유대교를 믿는 것 같지만 타 종교들의 전통들이 사마리아 전역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죠. 또한 예루살렘이 남유다 땅에 있었기에 예루살렘의 정통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게리짐 산에 성소를 세워서 자기들끼리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위해 자기네들의 게리짐 산이 진짜 정통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죠. 정통 종교를 행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은 이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취급하며 경멸하게 되기 시작 됩니다. 심지어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했는데 이를 지나가지 않고 6일이나 걸리는 요단 계곡을 통해서 갈 정도로 말입니다.
둘째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을 받았고 종교, 사회, 정치에 참여를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여성들은 회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여성의 뜰’에서 예배해야만 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사유재산권이나 증인도 될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아예 참여 자체가 불가능 했죠. 그 당시 여성은 그저 남성의 후손을 낳는 존재로 치부되었을 뿐입니다. 심지어 여성을 사악하다고 여겨 순진한 남성이 꼬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여성들이 다른 남성과 접촉하는 것을 가능한 막았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아내를 포함해 그 어떤 여자와도 말조차 섞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나병환자, 장애인, 여성은 더러운 존재이니 깨끗한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아예 접촉을 최대한 삼간 것입니다.
자 이제 일화를 분석해봅시다. 요한 복음 4장 3~4절에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라고 쓰여 있는데 당시 유대인은 일부러 가지 않는 사마리아 지역을 예수는 일부러 갑니다. 번역이 다소 잘못 되어 있어 중립적인 의미로 보이지만 원어문에서는 ‘필요에 의해 그곳으로 가야겠다’ 라는 뜻이 내포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사마리아에 도착해서 제자들이 식량을 얻으러 간 동안
예수는 그곳에서 만난 여인에게 물을 달라 요청합니다.
5: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여인이 놀란 것도 무리가 없습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에 있는 것도 모자라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거는데 심지어 대상이 여성입니다. 유대의 금기를 죄다 깡그리 무시하는 현장이니까요.
허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을 종교적으로 차별하며 멸시하는 것이 얼마나 쓸데 없는 일이고 악한 일이며 인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인지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건 게리짐 산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건 남성이건 여성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예수의 생각을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예수는 예배를 성소에서 드리는 것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반석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성소를 없애버리고 싶어 하니까요. 그의 사상에선 신앙생활에 성소란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는 것을 이전 글에서 충분히 설명 드렸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제사와 의식을 별 의미도 없는 것으로 배척하는 것. 이것이 예수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실 겁니까? 일단 사전에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일. 또는, 그러한 믿음의 체계나 가르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는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각종 재앙에 대하여 초월자를 의존하거나 성인들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거야 뭐 저 혼자만의 생각이니 그냥 넘어갑시다. 각자 해석이 다른 것일 뿐이니까요.
허나 유대교 랍비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랍비에게 있어서는 ‘신이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고 숭배하는 것’ 대충 이런 뉘앙스의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수많은 율법들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중점입니다.
허나 이러한 모든 행동들은 초월적인 강자인 신에게 약자인 인간이 제물을 바치며 아양을 떠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당신이 명령하는 것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므로 우리를 지켜주고 부유하게 만들어 달라는 일종의 거래 행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죠. 이는 자연계의 아주 당연한 현상입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아부하는 것이니까요. 당시의 유대교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현실을 바꾸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딴 것이 왜 종교여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어떤 입장을 긍정하는 단계인 테제와 그 입장을 부정하고 두 입장이 서로 모순을 일으켜 대립하는 단계인 안티테제가 서로 충돌하고 대립함으로써 더욱 고차원인 진테제로 종합되어 발전한다는 사고법, ‘변증법’을 말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전화기를 예로 들자면 집 전화기가 테제라면 안티테제로써 ‘이동하며 쓸 수 없다’가 존재하기에 휴대 전화라는 진테제가 나타나 이동하며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종교를 발전 시켜낸 모습을 이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가 테제이고
안티테제로써 ‘제사와 율법이 없으면 신과 관계 될 수 없다’가 존재합니다.
예수가 이것을 꼬집어 제사와 율법 없이도 신과 관계 될 수 있는 진테제인 기독교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의 노예가 될 것인가 스스로가 남에게 신이 되어줄 것인가?
예수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제사와 율법이 도대체 우리 인간의 삶에 무슨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냐? 제사와 의식을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를 돕는 것으로 하면 안 되는 것이냐? 종교가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냐? 묻는 것입니다.
주위에 힘들어 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를 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그에게 다가가 신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 받는 이에게는 도움을 주는 자가 곧 신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초월자를 원하며 기도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면 그 기도가 이루어지고 신이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자가 어떤 신을 상상했던지 간에 도움을 주는 그 순간 우리는 그자가 믿는 신의 현신이나 다름없습니다. 즉 어려운 상황에 도움을 주는 행위 그 자체, [선행]이 곧 신 그 자체인 것입니다. 신이 참 여러 가지죠? 어려운 처지의 사람도 신이고 도움을 주는 이도 신이고 이러한 선행조차도 신이라니.
하지만 분석해보면 예수는 자신의 삶을 이것을 주장하는데 쓴 것으로 보입니다. 나아가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더더욱 중대한 도발 행위들을 합니다. 마가복음에서 마구 저지르죠.
신에게 죄를 저질러 벌을 받았다고 보는 중풍병자에게 제사장을 통하지도 않고 저 혼자서 죄를 사해주었다고 말하고 (막 2:1~12)
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이랑 세리와 같이 밥을 먹지를 않나(막 2:13~19)
금식도 안하면서 (막 2:18~22)
엄숙히 지켜야할 안식일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라며 무시하고 (마가복음 2:23~28)
자신들이 바치는 수많은 액수의 헌금을 과부의 두 렙돈 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12:41)
그들에게 있어서는 완전히 자기를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듯 하는 일들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는 이들로 인해 자기가 죽게 될 것임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 언급하며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있었던 겁니다. 수많은 역사의 위인들이 중대한 순간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는 모습을 보인 것과 같이 말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세상의 모든 종교 행위를 없애버리는데 쓰려한 의도가 보이십니까? 종교 행위를 그만 두고 선한 행위를 하자는 것입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교회의 시설에서 사는 글리젤레 팔로마라는 소녀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 아이의 질문은 수많은 어린이들이 마약과 매춘에 내몰리고 있는데 신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고 있냐는 것이었죠.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 소녀가 바란 것은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이 할 일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까? 현재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를 창시한 예수는 어떻게 보자면 종교를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신에게 모든 것을 기대지 말고 우리들이 서로서로가 신이 되어주자는 예수의 말은 세상에서 신이 개입할 어떤 것을 지워나가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기독교는 다소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신에게 기대면서 선행을 하기 보다는 세력을 불리는데 치중합니다. 입지 좋은 곳에 그 거대하고 휘황찬란한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는 것을 예수가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참담합니다. 예수는 유대교의 거대한 신전을 반석위에 돌 하나 없이 다 없애기를 원했는데 그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누가 더 멋지고 큰 신전을 짓는가 경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행 없이 ‘예수가 신의 아들임을 믿는다’ 라는 심리적 제사 행위를 통해서 면죄부를 받고 있습니다. 혹은 주말 예배를 꾸준히 나간다는 심리적 제사 행위 또는 교회에 맹목적으로 바치는 헌금을 통한 면죄부를 자기들끼리 나누고 있는데 바쁩니다. 예수가 보기에는 그것들은 죄다 2천년전 유대교에서 양을 잡아 죽이던 제사방식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행위들로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고통에서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현대 기독교는 특히나 우상을 세우는 것에 민감합니다. 거기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고 그저 나무토막과 돌덩이라고 가르침 받기 때문입니다. 허나 현대 기독교에는 심리적 우상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신상에 신이 깃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마음속에 추상적인 심리우상에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3자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나무토막을 믿는 것이나 심리우상을 믿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허나 타인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는 마음에는 신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 나가는 것은 괜찮은데 다른 이들에게 봉사 하는 것은 꺼려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선한 사람 혹은 죄 없는 어린아이가 이유 없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혹자는 말합니다. ‘신이 있다면 저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역시나 신은 없다. 예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 니체가 말 했던 것처럼 신은 죽었다’ 라구요. 허나 예수는 우리에게 답합니다. 저 고통 받는 사람이 우리의 신이다. 네가 가서 도와주고 너 역시 신이 되어라 하고 말입니다. 그는 우리들이 배고프면 먹고 벗었으면 입는 것처럼 우리들의 이웃이 굶주리면 먹을 것을 주고 벗었으면 입을 것을 주라고 외쳤습니다.
당신이 여호와란 존재를 믿건 믿지 않건 예수에게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기독교를 믿으니까 남을 돕지 않아도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당신은 어려운 이들을 보고서 도와달라며 초월자에게 기도를 하는 원시종교 행위를 하실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을 직접 돕자는 예수의 사상에 동조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종교를 믿건 믿지 않건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들끼리 서로 신이 되어주고 도와주는 세상. 인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불살랐던 한 청년, 예수가 꿈꿨던 세상입니다. 그는 그저 당신의 작은 기부와 봉사를 원했습니다. 단 돈 만원도 괜찮습니다. 예수가 아마 현대에 있었으면 기업의 수백억 기부보다 당신의 만원이 더 갚지다고 고마워했을 겁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선하게 살고 더 나은 삶을 누리면서 더 잘 살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삼위일체의 아들신이 아닌 인간의 삶에 대하여 고민하고 세상에 소리쳤던 다소 인간적인, 아니 정말로 인간적이었던 예수를 여러분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두 번째 글을 읽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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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는 어째서 철학게가 이렇게 화력이 약하죠 ㅜㅜ
찾아보니까 한번도 오유로 올라간적이 없다는 투정글이 나오고 잇네요 ㄷㄷㄷ
그래도 뭐랄까 댓글 써주시는분들 수준이 높은거 같습니다
진짜 철학 관심있는 분들만 꽉꽉 채워넣은 게시판이라 그런가 ㅇㅇ
질문도 전부 보고는 있는데 다 답해드릴까 하다가
나중에 답할 부분이 글에서 등장하는게 많아서요. 시간상 글 구성상 안하기로는 했습니다만.....
제가 그러질 못하더군요. 답변이 안달리면 그냥 나중에 글에 나오니까 안달리는구나 해주세요.
처음에 중립적인 입장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구성 해뒀는데
그래도 중립적인 입장이 참 어렵더군요. 결국 글의 전체적인 구성을 엎어버리고
다음번 글은 현대 정통 기독교의 입장과 그에대한 철학분석과 신학자들의 의견과 역사들의 분석등으로
예수신학을 써볼 예정입니다. 예수 철학이 아니라요
읽어주시고 기다리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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